월간 신채원

9월, 도쿄의 거리를 걷다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식 현장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식이 열리는 도쿄의 현장을 다녀왔다. 글쓴이는 지난해부터 오충공 감독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다큐멘터리 영화 <감춰진 손톱자국>, <불하된 조선인> 두 편의 상영운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기획자로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보지 않고 상영운동을 해온 지난 1년이 아쉬웠던 차에 9월 1일부터 도쿄 지역 일대에서 추도식이 열리는 현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본지 57호에 34년 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을 인터뷰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민족차별이 불러 온 참극이었고 그 아픈 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1923년 9월 1일, 관동지방에 강도 7.9의 강진이 일어났다. 건물이 흔들리고 무너졌으며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고 불길에 휩싸였다.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목숨을 잃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자연재해였다.
이때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전쟁이나 반란에만 선포할 수 있는 긴급 조치인 계엄령이 자연재해에 선포된 것이다.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도둑질을 한다” 등의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조선인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이 적법한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진위여부를 확인 해보지도 않고 위법적인 계엄령을 강행하기 위해 명분을 세우려는 수단이었다.
치안 당국은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삶의 터전을 잃고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사람들은 유언비어를 믿기 시작했다.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경찰과 군대와 곳곳에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모두 학살하였다. 조선인들이 잘 발음하지 못하는 십오엔오십전(十五円五十銭)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거나 앉는 자세, 걸음걸이 등의 습관으로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경찰은 살인을 보고서도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들도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학살되었다. 아라카와 강은 핏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6천명이 넘는 조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학살의 비극이 전개되었다.
독립신문 보도에 따른 학살된 희생자는 6,661명이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줄여서 발표했다. 학살을 저지른 자경단 일부를 연행·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인 책임 또는 도의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학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사과도 한마디 듣지 못했다.

김포-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다
비행기 안에서 재일 사학자 강덕상 선생의 책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책을 읽었다. 1975년 초판이 출판 되었고 국내에서는 1995년 <조선인의 죽음>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2003년 청구문화사에서 <관동대진재, 학살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을 번역한 책이다.
하네다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동안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었다.
선생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인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쟁은 제국주의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만약 이 점을 간과한다면 이 사건은 단순히 일본 역사에서 참혹한 이야기의 하나로서, 또는 가련한 조선인의 비극으로서 기껏해야 동정의 눈물을 사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문제를 절대 비껴갈 수 없다.”(후략)

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이후 조선 민중들의 조직된 힘을 본 일본 민중이 느꼈던 공포심이 학살의 비극을 저지른 배경이었다.

요코아미쵸 공원 조선인 추도식

도쿄 요코마이쵸 공원은 1930년 9월에 문을 연 도쿄도립 공원이다. 1922년 당시 도쿄 시는 육군피복창 이전에 따라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이피복장 터로 피난했다. 운반된 가재도구에 불이 붙었고, 강풍으로 불길이 번져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숨졌다. 재해조난자의 영혼을 애도하고, 도쿄를 부흥시킨 대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 내에 위령당과 부흥기념관을 건립했다. 이후 도쿄대공습 희생자들을 안치한 위령 공원이 되었다.
여기 조선인 희생자의 추도비가 있다. 매년 이곳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낸다. 행사장 입구부터 많은 인파들이 공원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추도식과 위령제에 온 사람들, 이 날은 천황이 가족이 온다고도 했다. 조선인 추도식은 추도비 앞에서 열렸다.
요코아미쵸 공원에서의 관동대진재 94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은 일조협회동경도연합회 스미다 지부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관동대지진 94주년 조선인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장과 일조협회 동경도연합회 회장이 개식의 말을 이어나갔다. 일본종교자평화협의회정토진종 본원사파 승려의 독경, 김순자 한국전통예술연구원 김순자 대표의 진혼의 춤 공연이 이어졌다. 관동대진재조선인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가메이도 사건 추도회 실행위원회, 조선총련 동경도본부 등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공원 내 부흥기념관은 관동대지진의 참사를 후세에 전하고, 초토화된 도쿄를 부흥시킨 당시의 대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재해기념당 부대시설로서 1931년에 개관했다. 여기 조선인 학살의 비극은 기억하지 않았다. 피해자로서의 일본, 부흥의 역사가 찬란한 기념관이었다. 그 역사를 어떻게 딛고 일어 섰는지 1923년 9월 도쿄의 거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함께 기억했더라면 어땠을까.
공원 한쪽에 마련된 조선인 추도비는 1973년 9월에 세워졌다. 한편 도쿄도 코이케 도지사는 이번 추도식에 매년 보내던 추도사를 거부했다.

YMCA 9.1집회
일본에서 처음으로 재일교포들의 지문날인 거부 운동을 벌인 최창화 목사(1930~1995)는 재일교포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다. 재일교포들의 참정권 획득운동을 시작으로 1975년 NHK방송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여 일본인들 사이에 광범위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이름재판’을 통해 재일교포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표기하고 민족고유음으로 발음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 바 있다.
최창화 목사의 아들과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9.1집회실행위원회의 주최로 매년 9.1집회를함께 주최하고 있다. 올해 94주기 9.1집회에는 ‘국민주권이 감춰진 식민주의-재일조선인이 보는 일본국헌법’이라는 주제로 아오야마 학원대학 손연옥 명예교수의 강연도 들을 수 있었다. 1945년 해방부터 72년째를 맞아 아직도 계속되는 재일조선인에의 배제와 차별을 직시하고 동시에 고찰해 보는 시간이었다.
YMCA에서 9.1집회와 함께 2.8독립선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은 국내외 지도자들과의 정보를 교환하며 회합과 집회를 통해 구체적인 준비를 진행하였다. 1919년 2월8일은 재일본동경조선YMCA(현 재일본한국YMCA)의 강당에서 “조선유학생 학우회총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개회선언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자는 긴급동의의 소리가 일어나, 독립단 대표 11명의 서명이 들어간 독립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지도멤버들의 일제검거가 시작되어 2명이 탈출하고 9명이 체포당했다.
재일본한국YMCA에 마련된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서 또 한번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조선학교 아이들이 ‘고향의 봄’을 추모곡으로 불렀다.
요코하마시 니시쿠 쿠보야마 묘지에는 ‘관동대지진 순난 조선인위령비’가 있다. 9월 2일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사실을 알고 추도하는 가나가와 실행위원회의 주최로 추도식이 열렸다. 이 날은 아침부터 많은 비가 내렸다. 아침 일찍부터 열리는 추도식에 참가하기 위해 일찍 서둘러야 했다. 행사를 주관하는 야마모토 선생은 지난 해 8월, 서울 광화문추도식에도 참여했다. 1년 여 만에 다시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도했다. 실행위원들은 오랫동안 이 행사를 이어나가고 있으며 이 날 행사에서 합창과 낭독을 선보였다. 이밖에도 헌화, 진혼무 등이 이어졌다. 오충공 감독도 지난 8월 30일 부산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유족회 결성 소식을 전하며 영화 제작에 대해 보고했다.

아라카와 하천
94년 전, 이곳은 희생된 조선인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한 채 그렇게 피 맺힌 최후를 맞이하고도 시체마저 ‘버려진’채 묻힌 곳이다. 피로 물들었던 아라카와 강은 세월 모르고 흐르고 있었다.‘봉선화회’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있는 모임이다. 봉선회 회는 아라카와강변에 묻힌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했으나 유골을
발견되지 않았다.
2009년에 봉선화회 대표 니시자키 씨의 집 옆에 추도비를 세웠다. 현재 그의 집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추도비 앞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희생자들을 위해 추도했다. 추도비를 향해 길게 늘어선 줄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아카와 강변으로 향하는 길까지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다.
당시 조선인들이 끌려가던 길을 생각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걷는 내내 울었다.
아라카와 강변에서 추도식이 이어졌다. 평화롭기만 한 하천가에서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라카와 강변에서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새처럼 뻐꾹뻐꾹 울음을 삼켰다.추도식은 근처 복지회관으로 옮겨 계속되었다. 재일교포 가수 이정미씨와 야노씨의 공연, 영화 <박열>에 출연한 조박씨의 공연도 이어졌다.
도쿄에서의 두 번째 밤이 깊어갔다.

후나바시 마고메 묘원
조선인, 한국인이 전후에 세운 추도비가 후나바시 마고메 묘원에 있다. 전후 재위_ 봉선화회 사무실중간_ 요코아미초 공원 부흥기념관 내에 전시된 시계. 지진이 났던 11시
58분에 멈춰져 있다 아래_ YMCA에서 열린 9.1집회는 인권운동가 최창화 목사의 뜻을 이어매년 9월 1일 열리고 있다.
일조선인이 최초로 건립한 추도비 ‘관동대지진 희생 동포 위령비’다. 1947년 3월1일인 3.1운동 기념일에 후나바시시 혼조에 재일본조선인연맹 지바현 본부가 건립했다. 학살의 주체를 명시한 유일한 추도비이며 비문은 한글로 쓰여 있다. “당시 야마모토 군벌 내각은 계엄령을 시행하고,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이 공모하여 폭동을 계획 중이라는 근거 없는 말로 재향군인과 어리석은 주민들을 선동, 교시해 사회주의자와 우리 동포를 학살했다”, 이어 “재류 동포 중, 이 흉악한 만행의 피살자는 6,300명을 헤아리고 부상자는 수만에 달하니, 그 희생 동포의 원한은 실로 천추불멸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우리는 세계 민주 세력과 제휴하여 국내 및 해외의 국수적인 군국주의의 반동 잔재세력을 박멸하고, 진정한 민주조선을 건설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숙원 설욕하도록 적극 투쟁할 것을 맹세하며,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비를 이곳에 건립한다.”라고 쓰여 있다.

관음사 보화종루
1985년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과 극단 현대극장 고(故) 김의경 대표가 중심이 되어 국내 언론인, 공연예술인 등이 모금운동을 통해 세운 보화종루가 저기 보인다.
심우성 선생이 만날 때마다 들려 주셨던 그 보화종루를 눈앞에서 보았다. 보화종루는 치바현 관음사에 서 있었다. 우리나라 각 지역의 흙을 한 줌씩 모아 기와와 목재를 싣고 현해탄을 건너가 보신각의 본을 따서 한 평짜리 종각을 짓고 1미터짜리 종을 달았다. 단청도 예쁘게 칠했다.
종을 울려 보았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절에 울려 퍼졌다.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지금 병석에 계신 심우성 선생이 종루 앞에서 넋전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했다.
한국에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보화종루를 함께 세운 전(前) 서울신문사 사장 고(故) 신우식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한번도 뵌 적이 없는 선생께 관음사 보화종루에 새겨진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94년 전 희생된 이름 없는 넋들을 흙으로, 바람으로 만나시기를.

조선인 강대흥의 묘
그들에게 고향이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강대흥씨는 1923년 9월 4일 지역 주민에게 학살당했다.
이 묘비는 “사건 관계자가 책임을 느끼고 피해자를 동정하는 마음에서 세웠다”고 전해진다. 건립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건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보고 있다.
강대흥씨의 손자는 진상규명을 기다리다 지난 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평생 기다렸다.
묘비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는 글쓴이에게 누군가 다가와 유족인지를 물었다. “대한민국 전국민이 이 사건의 유족입니다.”라고 말했다.
매년 추도식을 치러 왔다고 했다.
“저 사람이 죽지 않고 다시 가족을 만났다면 더 좋았겠죠.” 라고 말했다.

반성하는 일본인, 용서하는 한국인
5일간 도쿄에서의 일정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추도식이 열리는 현장을 다녔고, 수십 년간 조선인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를 열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진상 규명을 위해, 민족차별을 반대하며 조선 사람들을 위해 싸워 준 일본인들에게 차마 고마움의 뜻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할아버지가 지은 죄를 잊지 않고 속죄한다는 것, 그것이 밝은 미래를 열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반성하는 일본인을 용서해야만 성숙한 세계시민 사회를 이룩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이 슬픔을 딛고 넘어가려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야 하며 합의가 아닌 사과를 먼저 해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끝으로 추도식 현장에서 만난 우익단체 맞불집회에서 말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지면을 통해 남긴다.
당신들의 할아버지가 지은 죄와 벌을 당신들의 손자에게 물려줄 건가요? 우리는 우리의 손자들에게 미움과 분노를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관음사보화종루 강대흥의 묘
아라카와추도비취재수첩2 31

* 가토 나오키의 책 <9월, 도쿄의 거리에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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