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빼앗긴 들에서도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학살의 기억 그리고 개벽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동요 반달의 1절 가사로 윤극영 선생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로 알려져 있다. (윤극영은 후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글쓴이는 이 노래의 2절 마지막 소절인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를 눈물을 삼키며 불렀다.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너희는 샛별이란다, 오늘의 이어둠을 기억하렴. 그리고 너희는 등대가 되어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라.”
윤극영은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도쿄에서 색동회를 창립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중 조선어 가사를 붙인 노래들을 작곡하여 어린이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힘썼다. 이 곡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쓴 곡이다. 다음은 이상화 선생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남의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이상화는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이상화는 1926년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지에 발표한다.

남기려는 자, 지우려는 자
두 사람 모두 관동대지진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제국은 무력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그 시기 가장 많은 친일파가 탄생하기도 했다. 그 시기 동학혁명과 3.1운동을 경험한 일본제국의 지도부들은 조선 민중들이 모든 것을 지키고자 모든 것을 잃기를 주저하지 않는 항거를 기억해야 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오르고 삶의 터전은 흔적도 없이 불타 폐허가 되었다. 집단 트라우마는 광기를 불러왔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했다’, ‘조선과 일본의 사회주의자가 결탁하여 테러를 일으키고 있다’ 등의 유언비어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민중들은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 모든 광경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은 도쿄의 거리에서 조선인 사냥꾼이 되었다. 불과 며칠 사이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은 왜곡되고, 잊혀지고, 삭제되었다. 1924년 9월, 관동대지진 1주기를 맞아 조선의 청년들은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1주기 추도식을 치렀다.

누군가는 기억해야지, 누군가는 말해야지
96년이 흘렀다. 이제는 그 날의 참상을 기억하는 사람도, 전해 들은 사람도세상에 없다. 그날을 기록한 힘없는 목숨을 적은 종이와 글씨들이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을 뿐이다. 6,661명의 희생자는 이름도, 가족도, 묘비도 없다. 매년 9월이면 살아남은 목숨들이 그 힘없는 이름들을 부른다. 학살이 있었던 곳에 모여 희생자들을 추도하고 과거를 반성하려는 움직임들이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추도식의 풍경은 언제나 참담하다. 조선학교 아이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고향의 봄’을 부른다. 아이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96년 전 도쿄의 거리에서 일어난 이 참혹한 비극은 지나간 과거일까?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在日特権を許さない市民の会 자이니치톳켄오유루사나이시민노카이), 약칭 재특회(在特会 자이토쿠카이)등 혐한주의자 집단은 쉬지않고 집회를 연다. 2015년 오사카(大阪) 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혐한시위 억제조례인 ‘헤이트스피치 대책법’을 시행했으며, 1년 뒤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헤이트스피치 대책법’을 시행했다. 일본 국내외에서는 오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 문화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앞서 제정된 ‘헤이트스피치 대책법’ 등에 별다른 처벌 규정이 없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칸트가 세계시민권에 관한 그의 성찰에 주목한다. 칸트는 국가들 간 영구평화에 관한 명문 조항 3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모든 국가의 시민 헌법은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 둘째, 국민국가의 법은 자유국가들의 연방 위에 기초해야 한다. 셋째, 세계시민권의 법은 보편적 환대의 조건에 한정되어야 한다. 특히 칸트는 ‘영구평화론’ 3장에서 세계시민적 권리를 명시적으로 다루면서, 이러한 권리가 환대의 조건에 한정된다고 주장한다.
‘환대’란 “인류애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라고 부연 설명하였다.

9월이 아프게 다 갔다

동아시아 최초의 ‘민중에 대한 제노사이드(대량학살)은 1894년 10월 말부터 다음 해 2월 말까지 일본군에 의한 3만~5만의 살육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노사이드는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며,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제거하는 것으로서 학살의 한 형태이다.집단학살의 정확한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법적인 집단학살의 정의는 1948년 유엔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나온다.1

CPPCG 제2조
본 협약에서 집단학살이라 함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이하의 행위를 말한다.
가.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나. 집단의 구성원에 대하여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다.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라. 집단 내 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것
마. 집단 내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으로 이동시키는 것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군인과 경찰, 민중이 하나가 되어 조선인이라는 집단을 절멸시킨 사건이다. 대규모 집단학살에는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개재된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학살의 동기를 제공하고, 학살을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마비시키거나 위안을 줌으로써 학살에 가담하도록 돕는다.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효과 가운데 학살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2 도쿄 사이타마시 소메야(さいたま市 染谷)의 죠센지(常泉寺) 사원에 서있는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기억한다.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훗날세워졌다는 이 비석(이름 없는 마을사람들이 세웠다고 비석에 새겨져 있다)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의 할아버지들이 지은 죄를 속죄하던 일본의 시민활동가들을 향해 “한국 사람 모두가 이 사건의 유족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 적이 있다.
아니다, 그와 나는 슬픈 역사를 물려받은 가엾은 후손들이었다.
2020년 개벽지 창간 100주년을 맞이한다. 100년 전 그 사람들은 삼엄한 검열과 통제 속에서도 훗날 반드시 누군가는 찾아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조선의 정체성을 심어 두었다. 나에게 개벽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고 그 손을 뜨겁게 잡고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의지이다. 그게 샛별이든 보름달이 든 반딧불이든 무엇으로 오든 상관 없다. 오늘의 빛으로 살면 좋겠다. 아직 찾아내지 못한 말들과 기억들은 지금도 단 한 줄기의 빛을 붙잡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

<주석>
1) Office of the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the Crime of Genocide
2) 최호근,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3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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