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천택의 손자 세르히오 림 알롱소
태초에 한줄기의 빛이 이 땅에 내려왔을 때, 그 빛은 꿈을 가진 누군가 움켜잡는 순간 여러 갈래의 줄기로 뻗어 마침내 어둠을 걷어내고 새 세상을 열기 시작합니다.
이 땅에서 빛을 되찾기 위해 어둠과 싸우고 있었던 그 때, 우리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사람, 한사람이 등불이 되어 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되찾은 빛은 그들이 보내 온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지난 11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독립유공자 임천택 선생의 손자 세르히오 림 알롱소 씨를 만났다.세르히오 림 알롱소 씨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행사 참여와 현충원 방문 등 바쁜 일정으로 따로 시간을 갖지 못하여 개벽신문에서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글쓴이가 임천택 선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지난 7월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열린 2017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새롭게 보는 하와이 한인의 독립운동사 자료전』 “미주 및 쿠바의 한인사회와 천도교” 학술회의를 통해서였다. 1903년 멕시코로 이주해 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머나먼 타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사람들, 노예와 다름없는 고된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끼니때마다 한숟가락 씩의 곡식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사람들. 글쓴이는 학술회의에 참여하며 그들이 그 낯선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가슴이 매여 왔다.
지난 11월 한국을 방문한 임천택 선생의 손자 세르히오 림 알롱소 씨와의 서면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반갑습니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초청으로 행사에 참여하게 되셨는데요, 참여하시는 소감이 어떠신지요?
20세기 초 멕시코와 쿠바로 이주한 한국인들 중 소수의 집단은 겸허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이바지했습니다. 이국에서 직면해야 했던 물리적 거리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애국지사들은 조국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저에게 한인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느끼게 했고, 쿠바 한인 후손들의 사회를 대표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당신의 조부 임천택 선생께서는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나, 조부의 헌신적인 삶에 대해 들으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멕시코와 쿠바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어떻게 정착해서 한국교민사회를 이룩했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자금을 보냈던 이야기도 해 주셨어요. 어떻게 멕시코로 이주했는지는 몰랐지만, 천여 명의 이주민들이 멕시코로 떠났다고 들었어요. 멕시코에서 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일했어요. 사탕수수농장에서도 일했고요. 그러나 그들의 임금은 매우 적었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스물다섯 살 때 돌아가셨어요. 사실 저는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할아버지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지요. 어렸을 적 할아버지 댁에 방문할 때면(할아버지와는 10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았습니다) 할아버지께 한국어나 한국인의 삶에 대해 묻곤 했고, 할아버지는 저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들려 주셨어요.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이 흐를 때까지도 그분의 헌신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천도교인이셨는데, 현재 쿠바에 거주하고 있는 천도교인들도 있나요?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의 한인 사회, 그리고 천도교인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쿠바에 거주하는 한인 천도교도 집단은 모두 돌아가셔서 더 이상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이 이주민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 스스로를 현지에 적응시켰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던 우리 할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쿠바에 사는 한국인 후손으로서의 조국과 자신들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세대와 청년들 사이에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천도교의 존재는 잊혀지게 되었죠. 하지만 저는 문화 및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민족종교라는 개념이 어떤 사람들에겐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그들에게 알릴 방법을 찾는 것은 가치 있는 시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한국에 방문하셔서 3.1운동100주년기념행사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할아버님께서 묻히신 국립대전현충원에도 방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묘소를 눈앞에서 보신 소감을 여쭙고 싶습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제게는 두 번째 방한이었습니다. 예전에 할아버지 묘소에 가보려는 계획을 세웠었지만, 업무 일정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현충원 방문은 제게 남은 숙원이었습니다. 덧붙여 이번 기회에 우리는 아버지도 모시고 함께 방한하고 싶었지만 몸이 편찮으신 관계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묘지 앞에 섰을 때, 저와 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느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분들께서 평화와 안녕을 위해 실천한 겸허한 공헌이 분명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국가 차원에서 예우하는 한국의 방식에 감명을 받았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쿠바의 동포들에게 한국의 역사나 독립운동이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요? 그리고 쿠바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폭넓게 말씀드리자면, 쿠바인들은 최근에 한국의 역사나 생활방식을 텔레비전 드라마나 각종 한국 프로그램을 통해 접하고 있습니다. TV드라마는 쿠바에서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만, 일제강점기 시대에 관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 개인적으로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사에 관해 조금 더 알고 있는 편입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선생님의 딸 아자리아 양은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나요? 그리고 따님에게 할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나요?
사랑하는 제 딸 아자리아는 한국에서 학업을 끝마쳤습니다. 아자리아는 언제나 한국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대학에 지원했고, 대전의 한남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갔습니다. 제 딸이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제 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동포들의 정과 애국심을 이해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쿠바에서 한국까지 먼 길을 오셨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대전 현충원과 한남대학교를 방문하고 사랑하는 제 딸 아자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행사에 초청된 것에 대해, 그리고 특히 천도교중앙총부와 이번 기행에서 저희를 안내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개벽신문에 인터뷰 기회를 준 당신에게 고맙습니다!
조선 사람, 천도교인, 애국지사 임천택 선생의 귀향
세르히오 림 알롱소 씨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임천택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1920년대부터 형성하기 시작한 쿠바의 한인사회는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 중 일부가 쿠바로 재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한인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임천택 선생은 기독교인이었으나 1927년 개벽사에서 활동하던 이두성과 서신 연락을 하면서 천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천도교의 인내천과 『개벽』, 『신인간』 등의 매체를 접하게 되면서 천도교 조직인 종리원을 설립하고 쿠바의 한인사회에 한글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에네켄 노동은 당시 쿠바의 최하층민들도 꺼렸던 일이었다. 혹독한 노동과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쿠바의 한인들은 광복사업과 한글교육 국사교육을 시작 하였고 1923년 3.1일을 맞아서는 독립선언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갈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은다. 한인가정들이 매 끼니때마다 식구수대로 곡식 한 숟가락을 아꼈다가 마을 창고에 저장하는 것이었다. 천도교의 성미방식을 택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한 것이다. 이렇게 모인 곡식은 수백 달러에서 많게는 1,000달러까지 여러 번에 걸쳐 중국의 임시정부에 전달됐다. 쿠바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임천택은 교육이라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인학교에서 한글을 깨우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임천택은 남다른 학구열과 2세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1925년 마탄사스 농장에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였고 카르데나스 지역에도 `진성학교’를 만들었다. 임천택 선생은 1985년 9월 6일 여든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낯선 땅에서 한 평생을 보낸 임천택 선생은 또다른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마탄사스 외곽 산카롤로스 공동묘지에 묻힌다. 1997년 대한민국정부는 1937년부터 독립자금 모금과 쿠바거주 한인동포 권익보호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해 임천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다. 2004년 4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에 임천택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했던 고국의 품에 안긴 순간이었다.
임천택(1903~1985)은 쿠바 한인 1세대, 독립운동가.
1922년 쿠바로 이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쿠바지방회의 서기, 총무, 회장, 고문 등을 역임하며 쿠밥 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쿠바 지역 한인동포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1925년 민성국어학교를 세우고 1952년까지 교사및 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청년학원을 세워 한인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1920년대 말부터 광복시까지 여러 차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
세르히오 림 알롱소
임천택 선생의 손자로 현재 쿠바 호세마르띠문화원 처장.
취재·글 신채원 / 사진 심국보 / 번역 박선경 / 자료·사진 제공 최인경
평화와 안녕을 위해 실천한 겸허한 공헌
– 임천택의 손자 세르히오 림 알롱소
임천택의 손자 세르히오 림 알롱소 씨와 그의 딸 아자리아 림
아자리아 림, 세르히오 림 알롱소, 이정희 천도교 교령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