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 시인 그리고 서예가, 김성장

남쪽에 수선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꽃소식은 언제나 기쁩니다.
어느 해 봄에 미선나무를 보러 갔다가, 봄눈, 혹은 꽃비가 내리는 산길에서함께 걷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날이었습니다. 세상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꽃잎이 다 같아 보여도, 나무가 다 같아 보여도 저마다 이세상에 내려앉아 살아가는 모습들은 다를 거라고 하시는데, 나는 그 말이‘너도 그렇다’는 말로 들려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한 걸음 떨어져 걸었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하시는 걸, 나는 그때 알아차렸던걸까요.
제목을 ‘시인 그리고 서예가, 김성장’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고’의 의미는 ‘그리다’는 뜻이다. 또 ‘그리다’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다는 뜻도 가진 말이다. 오랜 교직생활을 마치고 서예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성장 선생을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향했다.

신채원 : 조금 일찍 교직생활을 마치셨던데 아쉽지는 않으세요?

김성장 : 아이들과 지내는 것은 즐겁지만 학교생활의 한계를 느꼈던 것 같아요. 몇년 일찍 퇴직한 것뿐인 걸요. 글씨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고요. 학교의 한계라는 것은 시대의 특성을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농경사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크나큰 원인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아이들은 고통과 결핍의 기억이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결핍일 수는 있으나 그 결핍은 물질적 결핍과는 다릅니다.

신 : 결핍은 결국 또 결핍을 낳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교 교육에서 아이들과 동학을 이야기 하면 어떨까요?

김 : 학교라는 구조를 큰 틀에서 이야기하자면, 여기 조선이라는 나라를 봅시다.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아직 모든 권력이 제 자리를 잡지 못했어요. 그 속에서 사회 각 분야가 굉장히 촘촘하게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어요. 학교도 그렇습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교과서 진도 맞추기가 어렵고 틈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이 현실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무엇을 함께 나눌 시간이 없더군요.

신 : 말씀을 듣고 보니 학교라는 공간과 교사와 학생의 연결고리를 동학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네요. 선생님께서 꿈꿨던 ‘교사’의 길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김 : 저는 공고를 나왔어요. 대학을 가지 않을 생각이었거든요. 금오공고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주 힘들더군요.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냥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을 들어갔습니다. 그때 나이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그렇게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들어가 도종환 선생님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충북대학교 2학년 시절, 선생은 충북대학교 신문문학상에 시와 소설 2개 부문에 당선된다. 그리고 두 작품이 실린 신문을 들고 당시 동이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도종환 시인을 찾아갔고, 그날 이후 청년 김성장은 지역문화운동과, 전교조 활동의 문턱을 넘게 된다. 어렵사리 교사가 되었지만 옆자리의 동료 교사가 구속되는 것을 보고 교사가 된 기쁨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교실에서는 아이들과 웃었고, 밖에서는 부패한 권력에 맞서 싸웠다. 덕분에 그는 가장 짧은 시기에 가장 많은 학교로 쫓겨다닌 교사가 되었다.

신 : 붓글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글씨는 지난 1월에 타계하신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와 닮아 있기로 유명합니다. 생전에 교류도 있었는지요?

김 : 별로 없었어요. 원광대학교에서 신영복선생님의 글씨로 학위를 받았어요. <신영복 한글 서예의 사회성 연구>라는 논문을 썼는데, 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몇 번, 그리고 공적인 자리에서 몇 번 뵈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대전에서 어떤 분이 신영복 선생님께 글씨를 받으러 간 일이 있는데, 신영복 선생님께서 “대전 사람 중에 나보다 내 글씨를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어요. 그분께 가시지 그러셨어요.”라고 농담을 하셨다는 거예요.

신 :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는 언제 처음 만나셨는지요?

김 : 제가 붓글씨를 배운지 3년쯤 지나서였어요. ‘손잡고 더불어’라는 글씨를 보았는데, 지금도 그 글씨를 보았을 때의 전율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부터 글씨를 따라 쓰기 시작했어요. 한 획이라도 제대로 따라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한결같아요. 내가 선생님의 글씨를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이제 돌아가셨으니 저에게는 사명감이 더 큽니다.


글자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몇 년 전에 행사장에서 만난 김성장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명함 만들어주기’ 행사를 하고 계셨는데,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가만 가만 대화를 이어가며 아이의 이름과 함께 어울리는 한 줄의 글을 써서 나눠 주고 있었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쓴 글씨는 획이 그 사람을 닮아간다’고 말하는 선- 시인 그리고 서예가, 김성장생은 언젠가 필자에게 “바람처럼 바람도 아닌 것처럼”이라는 글을 써 주셨다.


신영복 선생의 글씨는 80년대가 잉태했다. 80년대 사회의 변화를 바라던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되었고, 시대의 정치적·문화적 변화의 거대한 요구가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선생은 단지 신영복 선생의 글씨를 닮은 것만이 아니었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정 짓지 않음, 누군가 정답이 아니라고 말하면 아니라고 한 쪽을 한 번 더 돌아보는 마음, 그런 마음까지도 닮았다.
오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라본 시각들 때문이었을까.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학위를 받는 일이란, 정통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일이었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정통 서예가들을 만났지만 한결같이 ‘할 말이 없음’으로 일괄했다. 서예를 정통으로 배운다는 것은 ‘붓을 세우는 것을배우는 것’이며, 선생은 붓을 세워 신영복을 따라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신 : 신영복 선생께서 글씨를 배운 과정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선생님의 서예관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김 : 신영복 선생님은 많은 곳에 글씨를 남기셨어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나주시청 등의 현판과 음료나 술, 영화제목…. 굉장히 많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정통 계승의 요체는 글자가 아니고 필법’이라고 하셨어요.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는 시대와 호흡하는 서체, 자기 삶에서 나타난 경험들을 서체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선생님은 어릴 때 할아버지께 서예를 배우기는 했지만, 대전 교도소에 계실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우셨다고 해요. 그때 교도소에서 재소자 교화사업의 하나로 글씨를 가르쳤는데, 거기서 정향 조병호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아주 글씨를 잘 쓰시는 분인데,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시다가 은둔의 길을 걷고 계시던 분이었어요. 조병호 선생도 세상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다가 신영복 선생을 만나면서 선생을 “유배를 왔다”고 하시며 신영복 선생을 가르치는 일에 욕심을 내지 않았을까 싶어요. 5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대전교도소로 가셨다고 해요. 출소 이후에도 신영복 선생은 스승이신 조병호 선생을 깍듯이 모셨다고 해요. 바른 스승이 되려면, 바른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말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신영복 선생님과 스승과 제자로의 인연은 없었지만 선생님의 글씨에 담긴 철학과 세계관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꿈꾸고 있습니다.

신 : 서예는 예술이라기보다는 공부이자 학문이며, 서예가는 예술가이기 보다는 학자라고 하던데, 선생님께서는 예술가이십니까, 학자이십니까?

김 : 제가 글씨를 막 배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글씨를 많이 써주는 것을 천박하게 여기던 때였어요. 그때 저는, ‘그래, 그렇다면 나는 더 천박해지겠다.’라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많이 써 주었어요. (지역문화 행사장에서 선생은 보따리장사처럼 주섬주섬 짐을 풀어 놓고 글씨를 써 주곤 했다.) 그렇게 글씨를 써 온 세월은 나로서는 익지도 않은 열매를 막 따서 나눠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예를 그렇게 완성해 가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 글을 보낼 때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쓰면 그 사람의 느낌을 담는 글씨를 쓰게 되더군요.
얘기를 좀 돌려볼까요? <암살>이라는 영화에 ‘출입금지>라는 글씨가 나와요.
글씨를 쓰고 연구하다 보니 그 서체는 그 시기에 없던 서체라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그 글씨는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나온 글씨입니다. 김기승 씨인터뷰 중 김성장 님이 개벽신문을 위해 써 준 글씨가 쓴 글씨죠.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정서를 생각해 보면, 영화 “암살”의“출입금지” 서체가 태어난 시기는 앞으로 ‘전진’하던 시대입니다. 힘과 통일과 단결을 중시하던 시기였고, 글씨도 시대상을 닮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도마찬가지였어요. 사발통문을 비롯한 동학과 관련된 책들을 보며 떠오르는 이미지에 따라 동학의 소리를 글로 쓸 때면 오래된 말들이지만 글씨 하나로 이미지가
되는 글들이 많아요.

신 : 지역문화운동을 오랫동안 해 오셨는데 충북은 특히 보은 동학을 빼 놓을 수 없는,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지역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보은 취회 행사 때마다 동학의소리를 담은 선생님의 글씨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김 : 보은에서 1998년에 보은취회 행사를 처음 시작했어요. 초기엔 행사 기획도 같이 했었지요. 보은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때였고요. 그러다가 제가 옥천으로옮기고 나서는 글씨로만 참여하게 되었어요. 보은취회 때 함께한 일 중에 안내 표지판을 세운 일은 참 기쁜 일이었지요. ‘북실진달래’라는 글씨를 썼는데, 그 작업이 참 좋았어요. 보은의 동학이 온전히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 같아서요. 표지판을 세우면서 ‘아, 이런 일을 해야 하는구나’ 생각을 했죠. 제가 글씨를 쓰면서 그런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겠어요. 보은취회를 오래전부터 지켜보는데 어느 순간 보니 처음 그 행사가 이뤄졌던 초창기와 지금은 매우 달라져 있더군요.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 씨앗을 뿌려놓는 것. 대중이 모이는 이유는 언제나 돌파구를 찾는 것이더라고요. 그것이 당장 구체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런 신기한 일들이 매년 벌어지고 있는 것 자체가 보은취회의 의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오래전에 홈페이지를 만들었었는데, 홈페이지 제목을 ‘서로살림’이라고 지었어요. 저는 그말이 동학의 내용인 것 같더라고요.

신 : 해월 선생께서 보은취회를 소집하고 광화문 복합상소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보은은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서 북실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그렇게 보은 취회는 안타깝고 슬픈 희망의 노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이 보은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 : 해월 최시형 선생은 그야말로 체게바라를 능가하는 게릴라였습니다. 혼자서 보따리 하나를 지고 백두대간을 넘나들잖아요. 30년간 관군에 쫓기면서요. 이정도로 대단한 레지스탕스가 우리 역사상 있었나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생각하면 감탄이 나와요. 개인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을까요, 위대한 민중들이 도와줬기 때문일까요? 그 당시 보은취회 때, 김구 선생이 동학의 소장 접주로 보은에 오셨다는 기록이 있어요. 백범일지에 나옵니다. 모든 역사는 결국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기에 동학을 통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 시대의 요구를 과거의 그릇에 담았을 겁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그것들은 모두 과거에서 가지고 와서 담아낸 겁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원하고 바라는 세상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는 가죠.

김성장 선생과의 대화는 세 가지의 주제로 이어졌다. 대학시절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꿈꾸고 싶던 청년 김성장, 전교조활동과 충북민예총, 충북작가에서 사회와 지역을 위해 열정을 쏟았던 옥천사람 김성장. 그리고 오늘도 선생의 손끝에서 시원하게 한바탕 춤을 추고 있을 필관의 힘을 가진 김성장. 어떤 이야기가 다시어디로 가지를 뻗어나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김성장: 충북 문화재단 이사, 전 충북 작가회의 회장, 시집 『서로 다른 두 자리』, 『모둠토의 수업
방법 10』 등, 보은 동학 행사에서 깃발 사예전, 논문 <신영복 한글 서예의 사회성 연구>

신채원 |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