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한 편의 시는 한 사람의 인생이 오는 것 구름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 잔돌이 되었다가

-시인 신경림

지난 1월, 어느 모임에서 선생을 뵙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어렵지 않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생께서 최근 들어 인터뷰를 거의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한 약속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아침부터 굵은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봄비 같지 않고 장맛비 같았다. 선생을 만나기로 한 날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민초들의 삶과 아픔을 노래한 ‘민족시인 신경림’. 선생의 한평생이 장맛비와 같았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비는 선생에게 많은 사연을 남겼다. 그리고 그굴곡진 생은 선생의 시에 고스란히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팔순 노인의 삶은 느릿느릿 흘러가지만 지나온 세월은 어제의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다.

반갑습니다. 최근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뵙기에 굉장히 젊어 보이셔서 놀랐습니다.

건강은 좋습니다. 요즘은 술을 거의 안 마십니다. 산에도 다니고, 전시나 영화도보러 다니고 그렇게 지내요. 조용하게 지내는 편이에요. 노인이 되고 보니 무료로 할 수 있는 것이 많더군요. 그런 점에서 노인들은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도 바둑 많이 두시나요? 실력이 상당하시다고 들었는데요.

요즘은 바둑을 컴퓨터로 두는데, 상대가 안 보이니 종종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밤새워 두기도 하고요. 주로 지는 편입니다. 저는 아마추어 5단 정도쯤은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겪어본 사람들은 1단이라고 하고 나는 5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가장 최근 시집이 재작년에 나온 『사진관집 이층』인데요, 다음 시집도 준비하고 계신지요?

시집은 시가 자연스럽게 모아지면 내야죠. 재작년에 나온 『사진관집 이층』은 내나이 팔십에 낸 시집이에요. 그 시집을 내놓고 나서 읽어 보는데, 과거의 내 시와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는 하지 않았던 말입니다만, 과거에 나는‘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지금에 와서나는 ‘나라를 생각하는 것만이 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나라를 생각 하지만 다른 것도 생각해야 한다고요. 나라만 생각하는 시가 좋은 시가 될 수 있겠나 싶어요.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라는 시가 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런 암울한 시대를 살아왔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봐요. 내 시도 그렇고요.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변하고 지나왔으니 우리 시는 폭이 넓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낼 때의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월이 변하다 보니 나도 사실은 내 이야기를잘 못할 때가 많아요. 정확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밝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표현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인가요, 세상에 퍼져 나갈 말의 무게 때문인가요?

그보다는 내가 바라보는 이 세상이 정확히 파악이 안 되어서요. 시라는 것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해야 하지만, 그 밖에도 중요한 게 참 많더군요. 시는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어야지 한쪽 면만을 바라볼 수는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 울컥 눈물이 날 때가 많아요. 방금 선생님을 기다리면서 읽었던 시는 어머니 이야기였는데요. 여기가 그 동네인가요? 어머니가 30년간 걸어오신 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 시장까지’ 라는 시죠?

마침 어제 어머니 산소에 다녀왔는데, 어머니 이야기를 좀 할까요? 나는 지금도 어머니 이야기만 하면 신명이 납니다. 어머니는 나하고 평생을 사셨어요. 내가 어머니에 대해 쓴 시가 많지는 않은데, 그 시에 등장한 어머니는 진짜 우리 어머니예요. 나에게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주고, 가르쳐 주고 가장 많은 것을 뉘우치게만든 분이에요.
나는 칠팔십년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지만 밖에서 밥을 안 먹었어요. 어머니와 같이 밥을 먹기 위해서였어요. 어머니는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저녁을 못 잡수세요. 그러니 늦더라도 꼭 어머니와 저녁을 같이 먹었어요. 친구들은 효자라고 말하고, 형제들은 불효자라고 말해요.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요. 내가 상처(喪妻)를 해서 어머니가 아이들을 키워 주셨죠. 고생 많으셨어요. 구십에 돌아가셨는데 팔십 몇 살까지도 손수 밥을 다 해 드셨어요.
평생 어머니와 가장 오래 살면서 속 이야기를 다했어요. 어머니는 안 하셨겠지만 나는 다했어요. 그 시에 쓴 것처럼 어머니는 여행을 싫어하셨어요. 그냥 집에계시는 걸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라셨다는 이야기와 시집오실 때 책을 들고 오실 정도로 책을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충북 괴산 사람인데, 시골 출생이지만 농사일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할아버지께서 며느리를 존중하셨거든요. 들일이나 밭일을 안 시키셨죠. 또 부엌에서 서서 밥 먹게 하지 않으셨고요. 할아버지께서 며느리를 가족들에게 존경받도록 만드셨어요. 남자들이 하는 험한 일을 절대 안 시키셨죠. 우리 집이 논도 몇 마지기 가지고 있고 다른 집보다 조금 낫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난했거든요. 반면에 어머니의 친정은 아주 부잣집이었어요.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부잣집 딸을 데려와서 고생시키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어머니께서 학교는 안 다니셨지만 외할아버지께서 가정교사를 두고 집에서 공부를 가르치셨어요. 시집올 때 책을 보물처럼 가지고 오셨을 정도니까요. 내가 어렸을 때 책을 가까이 하게 된 것도 어머니의 영향입니다.

외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에게 자금도 대 주고 하셨다고 하더군요.

외할아버지는 겁이 많으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사촌이 독립운동을 하셨던 모양인데 사촌이 와서 도와 달라고 반협박으로 부탁을 하니까 도와주셨을 거예요. 나중에 그 일로 고생을 좀 했죠. 집안이 망했거든요.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사시면서 시적 감성을 키우셨겠습니다. 일찍 등단을 하셨던데, 등단 이후 시골살이를 택하기도 하셨고요. 강이나 길에 대한 시가 적지 않습니다.

강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아서였을 거예요. 그리고 많이 걸어 다녔거든요. 먼 길을요. 길에서 많은 생각을 했겠죠.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당시 중요한 세계문학지는 거의 다 읽었어요. 요즘 애들보다는 조숙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분은 임화 시인이었어요. 임화는 월북한 분인데 사실 저와 작품 경향은 달라요. 임화 시인은 거의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고 철저히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시를 썼어요. 지금의 나는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시는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외에도 백석, 오장환, 이용악 시인을 좋아했어요. 내가 등단을 했을 때는 앞서 말했듯이 브레히트가 말한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였어요. 6·25 직후에 처음 시를 썼는데, 그때의 서울은 폐허였어요. 형편없는 나라였죠. 도둑놈과 사기꾼 천지였어요. 그 시대에 ‘갈대’라는 시를 쓰고 회의감을 느꼈죠. 이런 판에 내가 이런 서정시를 써서 올바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하고요. 그 이후로 시를 쓰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세상에서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생각하다가 그렇게 10년 가까이 시를 못 썼어요. 그러다가 내가 쓰는 시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있는 시, 이런 세상에서 쓸 수밖에 없는 서정시여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죠.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시 ‘갈대’를 쓴 이후 ‘농무’를 쓰기까지의 내적 갈등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시들이 생태적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편린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느낌이 듭니다. 시 ‘목계장터’에서처럼 구름과 바람과 잔돌이 되어 민중들 속으로 파고든 것인가요?

시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 그런 정서에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쓰는시에 내가 오늘 사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좋은 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면서 어릴 때 좋아했던 민요를 연구하며 민요집도 냈지요. 민요연구회도 만들었고요. 한평생을 참 많이도 떠돌았어요. 그때는 외국도 못 나가니까 그것도 영향이 있었죠.

(선생은 침묵을 강요하던 시절, 남북작가회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환경운동연합 등의 굵직한 사회운동단체 활동으로 늘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여권도 나이 환갑이 다 되어서야 발급되었다.)

장터도 많이 다니고. 우리나라 민요라는 게 들으면 흥겹잖아요. 내가 민요를 공부하면서 민요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민요를 연구하면서 제대로 쓴 민요시는 목계장터를 비롯한 몇 편밖에 없어요. 사실 목계장터는 민요를 연구하기 이전에 쓴 시예요. 민요를 들으면서 쓴 시는 제대로 쓴 시가 없어요. 아마도 민요가 지나간 이야기라서 그런가 봐요.

지금은 서정시를 쓸 만한 시대인가요?

서정시를 쓸 만한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제 생각해 보니 브레히트의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서정시를 쓸 만한 시대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쓸 수 없는 시대를 극복하는 시가 좋은 시죠.시 ‘가난한 사랑노래’는 가난한 연인을 보고 쓰신 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일화가 참 유명합니다.

직접 주례까지 서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이 동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유쾌합니다. 한 청년이 한 여인을 사랑했어요. 가난한 청년이었죠. 이 동네 이야기를 하면, 그때 이 동네는 살기가 어려웠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파트도 들어서고 교통편도많고 훨씬 나아진 것이죠. 옛날에는 여기까지 버스도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팔순이 넘으셨는데, 가깝게 지내시던 분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뜨시는 경우가 많아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가슴에 남으시겠어요. 그립기도 하실 테고요.

참 오래 살았다 싶어요. 그립지는 않아요.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거니까요. 험한 세상을 살았고, 많은 것을 겪었죠. 그러나 어쩌겠어요. 그래도 옛날에 비해서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많은 사람이 절망하지만, 오늘의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내가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측면도 있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낙관하게 돼요. 나는 요즘 노인들과 조금 다른것 같아요. 나이를 먹으면 할 말을 더 해야 하고 생각도 바르게 해야 하고, 오늘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인들이 무조건 권력에 순응하면 세상이 어떻게 좋아지겠어요. 종종 노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이야기해 달라고 할 때가 있는데, 나는 가서 말합니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말해 주고 바로잡아 주고, 한 발짝씩나아가야 한다고요.
우리가 뒤를 이어 사는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어 주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러면 ‘저 노인네 이상하네’ 하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선생님 금수저와 흙수저 아세요?

그럼요. 나는 평생을 흙수저로 살아왔는데, 지금도 분개하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고쳐가야 한다는 생각도 크고요. 그 노력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죠.조선 시대에는 과거라는 제도도 있었고 그 시대가 더 평등했다고 하는 말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옛날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옛날엔 똑똑하면 출세할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길조차 없는 것 같아요.내 어릴 적 친구 중에 글을 아주 잘 쓰던 친구가 있어요. 산지기 아들이었는데 그야말로 흙수저 중에 흙수저였어요. 나와 도내 백일장 대회를 같이 나갔는데 우리 학교에서 장원이 나왔다고 하는 소식에 당연히 나일 줄 알았는데, 그 친구였어요.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었죠.
그런 사람도 기회가 주어졌으면 글을 잘 썼을 겁니다. 꾸준히 썼거든요. 발표할기회가 없었죠.
나는 사범학교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급사를 했어요. 그땐 급사라는 게 있었어요. 중학교는 못 갔지만 작가를 꿈꿨던 친구예요. 그러나 작가는커녕 평생을 꿈만 꾸다가 이루지는 못했죠.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았겠어요.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사회가 보여줘야 하는데 말이죠.
이 사회는 대기업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삶만이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는데, 누군가는 생선을 팔아야 하고 누군가는 트럭을 몰아야 합니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불평등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아파트에서 경비를 서는 사람도, 넥타이 매고 대기업에 출근하는 사람도 똑같이 대우받고 살아가는 세상, 평등한 세상이 와야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똑같습니다. 우리의 불만은 평등의 문제입니다. 금수저들의 삶은 참 놀랍더군요. 돈 많은게 제일인 삶, 그럼 금수저들에게 사회가 지나친 혜택을 주고 있으니 말이죠. 나는 적어도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밤늦도록 운전하는 분들, 몸으로 일하는 노동자들도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와야겠지요.

그런 사회에서 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좋은 시를 쓸 수밖에 없죠. 시인도 사회인이니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시만 쓰고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시인들이 시만 쓸 것이 아니라 다른 일도 해야 합니다. 시는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해요.시 자체는 일하면서 나오지, 방에서 시만 생각한다고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들이 실제로 자기들이 사회를 위해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시만 쓰면서 살 수 없다고 말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척박한 출판 시장에서 더욱 더 척박한 분야가 ‘시집’입니다. 그 안에서도 잘 팔리는 시집과 안 팔리는 시집이 있는데 꾸준히 선생님의 시는 잘 팔리고, 서점에 가 보면 맨 앞에 비치되어 있던데요. 선생님께서 처음 시집을 내셨던 젊은 날에도 시집이 잘 팔렸던 것은 아니지요?

그럼요. 젊은 날에는 내 시를 거들떠도 안 봤어요. 요즘 말로 잘 못 나갔어요. 나는 모범생이 아니에요. 시 쓰는 일에만 성실했어요.
내가 『농무』를 낼 무렵에 어느 출판사에서 육영수 여사의 돈을 받아서 상도 주고시집을 내 줬어요. 그 상을 받으면 유명해지기도 했으니 그 상을 받는 시인들을 부러워들 했어요.
첫 시집을 내 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어서 내 돈을 들여 자비출판을 했어요. 그때 최소 500부는 찍어야 한다더군요. 그걸 처리하는 데 혼났어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거든요. 안타까운 일인데, 시가 인정받기까지의 세월은 어쩔 수 없어요. 좋은 시는 언젠가 알려지거든요. 좋은 시인이 묻혀 있는 경우는 못 봤어요. 언젠가는 발굴되고 결국은 알려집니다.

시를 쓰는 젊은이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좋은 현상이죠. 조금 우려되는 것은 시를 쓰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긴 했지만 시가 어려워졌다는 겁니다. 최근 어느 지역문학상 신인상 심사를 했는데 어려운시, 읽히지 않는 시가 많더군요. 그런 시가 퍼져서 걱정스럽습니다. 아무리 지금이 시를 안 읽는 시대지만 읽히는 시를 써야 합니다. 독자가 좋아하는 시를 쓰기보다 그것을 포기하고 어렵게 쓰는 것은 옳지 않아요. 말하자면, 시인들에게도 엘리트주의라는 게 있어요. 시인끼리만 읽는 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시, 쉽게 읽히는 시는 가벼운 시로 치부되기도 하고 난해한 시가 좋은 시로 오해받는 현상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좋은 독자가 좋아하는, ‘좋은 시’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어요. 어려운 시는 엘리트주의의 소산입니다.

최근 신춘문예를 목표로 사관학교처럼 가르치는 사설기관도 있고,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보면 선생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엘리트주의가 남아 있는데요….

그것 참 문제예요. 시를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도 대학에서 시를가르쳤지만 시를 가르치는 것이 문제예요. 한국문학의 전통, 한국문학을 이끌어갈 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문제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청년들에게 시를 가르친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우선 오늘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시를 쓰는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라는 명제에 굴복당하지 말고 극복하는 길을 찾아야죠. 그렇다고 반 서정시를 쓰는 것은 지는 것 아닙니까. 정말 좋은 시를 포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부탁을 하고 싶어요.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자. 두 번째로 남들이하지 않은 말을 찾아내는 능력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밝은 눈을 가져야 할 겁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좋은 시는 끝에 가서 따뜻하더라는 겁니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시를 썼으면 좋겠어요.

저는 늘 궁금합니다. 지금 김소월을, 한용운을 읽는 것처럼 앞으로 100년 뒤에 민중들에게 읽힐 시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시가 남아서 읽히는 거죠. 100년 뒤에 가 봐야 알 수있죠. 장담 못하지만 시 한 편 한 편이 인생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니 며칠 전 본 전시가 생각나는군요.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술전이었는데, 변월룡이라는 화가의 작품전이었죠. 작가가 러시아에서 태어난 고려인인데, 그 작품을 보면서 이런 그림이 오래도록 남겠구나 싶었어요.
투쟁의 그림이 아닌데, 세계사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그걸 보면 우리나라 역사가 보이더군요. 제가 제일 감동받은 그림은 ‘포로교환’이라는 그림이에요.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작품이더군요.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시에도 이런 모습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께서 시를 쓸 수 있었던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이었나요?

민주화, 그리고 통일이었죠. 그때는 뭐, 민주화만 되면 다 좋겠다 싶었어요. 내가삼사십대에는 말도 자유롭게 못했거든요. 그 시기가 지나서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여권이 육십이 넘어서야 나왔어요. 젊은 날에 어딜 못 가서 억울해요. 늙어서 외국을 처음 나갔거든요.

선생님의 시가 불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의 정서와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 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도 외국시를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지않습니까. 언어의 장벽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나도 일본어로 된 책을 읽기는 합니다만 시는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영시도 그렇고요. 언어의 장벽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정서와 역사를 어떻게 넘나들겠습니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지요.

오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민초들의 삶에 대한 진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찾지 말고 만들어야죠. 문제를 덮어 놓지 말고 드러내고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하는 방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말이죠.
옛날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고, 절망적이라고 하지만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봐야겠지요.
나는 아직도 믿어요. 안 살아 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극복하고 살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얼마나 좋은 시절입니까.

사실은 마지막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죄송스럽고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만약에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면 그때 우리는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자리에서 어떤 시를 읽을까요?
에이, 듣기 싫어서 벌떡 일어날 거요.
거 참, 차나 마시게.
작정하고 선생을 만나 작정하고 무례한 질문들을 던졌지만, 선생께서는 작정하고 그 무례한 질문들을 술술 넘어가셨다.
필자는 그날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선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던 비는 인터뷰가 끝난 오후 거짓말처럼 그쳤다.
맑게 갠 하늘은 푸르렀고 봄 햇살은 따뜻했다.
선생은 지금 봄길을 걷고 계실까.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많은 사람이 절망하지만,오늘의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라는 명제에 굴복당하지 말고 극복하는 길을 찾아야죠.”
“나는 아직도 믿어요. 안 살아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우리는 많은 것을 극복하고 살지 않았습니까.지금은 얼마나 좋은 시절입니까.”
신경림 시인이 직접 쓴 정릉도서관 현판4

따뜻한 인터뷰
정리 : 신채원(미디어세림 대표, 본지 편집위원) / 사진 : 정찬웅 / 영상촬영 : 김선구
장소 협찬 : 정릉도서관
시인 신경림
1935년 충북 충주.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등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
첫 시집 『농무』 이래 민중의 삶에 밀착한 리얼리즘과 뛰어난 서정성, 민요의 가락을 살린 시로
한국현대시의 흐름을 바꾸고 민중시의 시대를 열었다.
시집으로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
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장시집 『남한강』, 산문집 『민요기행』1·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1·2, 『바람의 풍경』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공초문학상, 호암예술상 등
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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