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한국 사람입니다

– 33년째 조선인 대학살의 뿌리를 찾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 오충공3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여름에 피는 꽃이라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됩니다. 여긴 비가 오는데 거긴 아직이라고요? 여기서부터 지나가는 비였거나 거기서부터 지나온 비였거나 잎사귀마다 맺히는 이슬은 딱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만큼 방울방울 맺히는데, 기쁨도 슬픔도 그와 같아서 한없이 쏟아져내리는 듯하여도 결국은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무게로만 내려앉지요.

신채원 : 반갑습니다. 보은취회 때 오셔서 행사 내내 카메라 앞에 계시던데요, 한국에는 어떻게오셨는지, 또 주로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충공 : 32년 전(1983)에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1986년도에 다시 한 편을 만들었습니다. <감춰진 손톱 자국 –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과 <마을 사람들에게 불하된 조선인 – 관동대진재와 나라시노수용소>입니다. 1923년 관동대진재 조선인 대학살 사건을 기록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일본군경과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자경단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단 일주일 사이에 간단히 죽일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유언비어 때문이었어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동학혁명, 청일전쟁 때 조선 민중을 학살한 일본 군대가 관동대지진 때 또다시 앞장서서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임신한 여성의 배 속 아기까지 무차별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렇다면 동학혁명은 어떤 것인가 궁금했습니다.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의 유전자, 그 뿌리가 어디 있는가, 혹시 동학혁명 당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그 장면을 영화에 담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멈추지 않고 어떻게 관동대진재 학살까지 왔는가를 알고 싶었습니다.

신채원 : 굉장히 오래전 이야기를 담아내고 계신데, 자료 조사도 쉽지 않았겠어요. 동학의 역사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오충공 : 돌아가신 조선인 희생자들의 조사와 유골을 찾는 데 참 힘들었어요. 1923년 당시 일본에 있는 한국 YMCA의 간사로 있던 최승만 선생과 천도교인 박사직 선생, 그리고 일본에 남은 유학생들과 천도교인들이 관동대진재의 역사를 밝히는 데 큰 힘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 정부에서 조사 허가를 안 해 주니까 이재동포위문반 명분으로 허가를 받아 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채원 : 다큐멘터리를 1983년, 1986년에 두 작품을 제작하셨는데, 제작 배경이 궁금합니다.오충공 : 1983년의 첫 번째 작품은 제가 영화전문대학에 다닐 때의 졸업작품으
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일반대학을 중퇴하고 스물일곱 살에 대학에 다시 들어 갔습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요. 영화전문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 감독의 다큐멘터리 조감독으로 일했어요. 영화 제목이 우리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라는 작품이었는데, 재일조선인 원자폭탄 피폭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였어요.조감독으로 참여하고 이후에 영화를 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서 영화전문대학을 갔죠. 이마무라 쇼헤이라는 감독이 만든 학교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각 지방에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을 존경하는 학생들이 많이들 그 학교에 왔어요. 졸업작품으로 그 작품을 만들었어요. 제가 제안한 것은 아니고 함께 졸업 작품을 제작하던 일본인 학생이 관동대지진 학살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해요. 요시무라 아키라 작가가 쓴 책이었어요. 뭔가 구체적으로 제작 계획서를 낸 건 아니었고 기획단처럼 만들어져서 작품을 만들기로 했어요.
그때 저는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어요. 저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지켜보는 쪽이었거든요. 열일곱, 열여덟 살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한참 졸업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신문에서 관동대진재 학살지를 발굴한다는 뉴스 보도가 나왔죠. 그래서 거길 가 보자고 했어요. 학교에서 졸업
작품으로 정식 승인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장비를 빌려서 5~6명이 달려갔죠. 그중 저 혼자만 재일교포였고, 나머지 학생들은 일본인이었어요. 거길 가 보니 길이 낯이 익더군요. 내가 소학교, 중학교를 조선인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때 일본인학교를 다니다가 조선인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민족차별이 심했거든요. 먼 거리를 전차를 타고 다녔죠. 그 조선인학교 근처였어요. 그곳에서 발굴 작업을 3일간 하더군요. 카메라가 많이 왔죠. 그 장면을 찍으려고요.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이 발굴 작업하는 것을 보러 왔어요. TV 방송을 보고요. 노인분들이 많이 오셨죠. ‘내가 이런 걸 봤다’하는 증언을 하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몹시 흥분해서요. 근데 발굴 작업에서 유골이 안 나왔어요. 유골이 안 나오니 영화도 중단되었죠. 하지만 그때 오신 분들 녹취도 하고 취재한 파일이 있었어요. 어른들을 찾아가서 취재를 했어요. 한 동네에 살던 주민들이었겠죠.
당시 상황을 알고 있던 일본인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유골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어요. 그만큼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자자했어요. 동네에 소학교가 있었는데 사회과 담당 교사가 그 동네에 물이 많이 빠져서 하천공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시민사회단체에서 관동대진재 때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그 중심에는 소학교 여교사가 있었습니다. 관동대진재 이전의 지역 역사를 가르치는 키느타유키에 씨가 조사를 하면서 아라카와 방수로 공사에 많은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안 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노인들로부터 듣고 발굴 운동에 용감히 나선 것입니다. 그분이 역사를 가르치셨는데, 교재 연구를 위해 동네 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증언을 모았다고 해요. “관동대지진 때 조선 사람이 학살되었다. 조선인도 있었고 중국인도 있었다. 군대가 죽였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서 며칠간 냄새가 났다.”고 일관된 이야기였어요. 헌데 증언만 있을 뿐 유골이 하나도 안 나왔어요. 나중에 그 당시의 경찰들이 그 유골을 트럭에 실어 갔다는 옛 신문기사가 발견되었어요.

신채원 : 그때 학살된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나요?

오충공 : 관동대지진이 일어날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노동자들이 많았죠. 조선인이 일본으로 가는 허가를 받기가 어려웠는데 그 당시에 일본인 노동자가 부족해서 조선총독부에서 그때만 허가를 완화했어요.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은 토지조사로 인해 땅을 빼앗기고,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많았어요. 일본어도 모르고 노동하러 온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무자비로 학살되었죠. 9월 1일 밤부터 학살을 시작했어요. 6,600명을 학살하는 데 일주일도 안 걸렸어요. 그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신채원 : 말씀을 듣고 보니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 끔찍해서 상상조차 힘듭니다. 그 몇 해 전에 3·1운동이 있었죠. 조선인들의 조직적 민중의 힘이 일본인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려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을 학살했다. 이것이 관동대진재의 배경으로 알고 있는데요.

오충공 : 맞습니다. 관동대지진의 직접적 원인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방화를 했다’, ‘도둑질을 한다’는 유언비어를 가지고 군대와 경찰이 하나가 돼서 학살을 감행한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언비어 때문에 6,600명을 죽일 수 있을까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13년 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있었고, 1919년 3·1운동이 있었죠. 4년 후에 관동대지진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동학이나 독립운동이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것처럼 그 당시 독립투사도 많았고, 일본 안에서 그런 투쟁 의지에 큰 위협을 받은 거죠.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인을 학살했던 군인들이 관동대지진이 일어날 무렵에 군경과 내무성의 간부가되고 그랬어요. 그런 유언비어가 돌면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유언비어를 확산시켰죠. 그 당시 일본 안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했거든요. 그 안에 조선인들도 있었고요. 일본 지배층들은 싫어했겠죠.

신채원 : 동학을 일본이 저지른 조선인 학살의 뿌리로 보시는 이유는 뭔가요?

오충공 :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관동대지진 학살이 마무리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조사를 합니다. 일본에 남았던 유학생들, 기독교인, 천도교인 20여 명이 조사를 합니다. 일본 경찰은 그 사실들을 은폐했죠.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고 조선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짓밟은 거죠. 어쩔 수 없이 20여 명이 조사의 목적이 아니고 유족들을 방문하겠다고 총독부에 허가를 받고 사실은 은밀히 조사를 합니다. 그때 중심 역할을 하신 분이 한국 YMCA 간사로 계시던 최승만 선생이셨어요. 선생께서는 후에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일하셨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할아버지의 일장기를 뺀 사진을 보도했던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죠. 또 천도교의 박사직 선생이라는 분이 조사하면서 눈물 흘리며 유골을 모았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어요. 또 동학이나 관동대진재나 조선 민중을 학살했다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학살의, 가해자의 뿌리가 있는 것 같아서, 말하자면 학살의 유전자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이 동학의 뿌리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채원 :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졸업작품은 어떻게 되었나요? 물론 제작이 되었으니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거겠지만요. 이후에 계속 이어져 온 작업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오충공 : 발굴 작업에서 유골을 찾지 못했던 것도 그렇고 졸업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죠. 졸업작품 제작 기간이 고작 몇 달이잖아요. 학교와 문제가 됐죠. 일단 졸업작품이니 필름으로 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학교와 싸웠죠.
1년 반이 걸려 제작했습니다. 결국은 이마무라 선생님도 잘 만들었다고 평론까지 써 주셨습니다.

신채원 : 그럼 감독님의 작품은 모두 졸업작품 이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33년전에 만들었던 작품과 지금 진행 중인 작품은 작업 방향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오충공 : 관동대지진 때 돌아가신 유가족들이 계세요. 세 번째 작품은 유가족 중심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유가족이 90년 만에 발견되었어요. 그중 한 분이 제주도 분이신데, 그동안 확보한 자료에 한 군데가 아니고 두 군데, 세 군데서 이름이 나와서 그분이라는 걸 알았어요. 2년 전에 만난 분인데 아쉽게도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일본으로 모셔가기로 약속했었거든요. 희생자의 아들이 작년에 돌아가시고 그 아들이니 희생자의 손자가 되겠군요. 할아버지의 산소에 가고 싶다고해서 곧 일본으로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신채원 : 세월이 많이 흘러서 자료 조사도 쉽지 않고 또 증언을 해 주실 분들도 거의 다 돌아가셨을 텐데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 일본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증거를 은폐하려고만 하던데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충공 : 관동대진재는 그냥 조선인 학살이 아니고 ‘조선인 대학살’이라고 합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그 시기에는 일본 경찰들이 재일조선인이 어디에 살고있는지, 이름이 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특별히 감시하고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다 예비구속을 당했어요.

신채원 :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확인하려고 어려운 발음의 일본어를 말하게 해서 그 발음을 잘하지 못하면 죽였다고 하죠? 참 치밀하고 계획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부분이네요.

오충공 : 총독부에 경찰이 가지고 있는 문서가 있어요. 조선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인데, 어떤 특정한 발음을 못 한다든가, 여자들이 앉는 습관 등이 기록되어 있어요. 일본 말의 된소리를 발음하게 한다든가 예컨대 ‘50전 55엔’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조선인들은 발음이 잘 안 되거든요. 긴장하면 말을 잘 못할 수도 있지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인들도 더러 죽였을 겁니다. 조선인을 죽이는 데 가장 큰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오인살인이라고 하죠? 잘못 죽인 거죠. 목격담이나 글이 많이 나와 있어요. 오인살인을 하고 “조선인으로 착각했다”라고 했다는 말에 우리는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 사람은 죽여도 괜찮다는 겁니까?

신채원 : 감독님,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그 오랜 세월을 이렇게 단 하나의 이야기만 하셨을 것 같은데, 또다시 이 이야기로 작품을 제작하신다니 너무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기 전에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오충공 :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유가족을 찾았습니다.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을 제작 중인데 기자님 말씀처럼 일본 정부에서는 모든 사실과 그 증거를 은폐하려고만 합니다. 아시다시피 2013년 6월에 일본의 한국대사관이 신축 공사를 하는 바람에 명부가 발견되었어요. 거기서 3·1운동 피살자 명부, 강제징용자 명부, 그리고 처음으로 관동대진재 피살자 명부가 나왔어요. 한국 정부가 조사를 해야 하는데 한국정부 안에 관동대진재 피살자를 조사하는 기관이 없어요. 3·1운동 같은 경우 국
가보훈처에서 조사하고, 강제징용자는 진상규명회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12월에해산되었어요. 그래서 독립기념관이나 학계로 인계되었는데 조사가 안 되었죠. 강제동원진상위원회에서 명부를 받아 조사를 통해 유가족 40명의 기록을 찾았고, 제가 그분들을 찾아다녔어요. 일본에서는 목격담, 재일교포 피해자를 중심으로 조사했고요. 한국의 유가족이 90년 만에 나온 겁니다.일본에서는 재일동포 학자, 민간 시민단체가 추도 모임을 40년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요. 작은 민간단체에서 현지 조사를 오기도 했는데, 국가 차원에서 한 번도 조사를 안 한 겁니다.

신채원 : 발견된 자료는 언제 만들어진 거죠? 그 기록이 있다는 것도 참 놀랍습니다.

오충공 : 1953년 이승만 정권에서 만든 거예요. 6·25 전쟁 중에요. 그 이후에 한국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간단히 생각해도 한국에서 조사하고 대사관에 보낸 것이 창고에서 우연히 나왔다는 것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국가기록원에 가서 다 찍어 왔어요. 그 안에 이름도, 나이도 다른 사람이 많지만 일치하는 사람도 있어요. 각 지방에서 신고를 받았다고 해요. 동사무소에서 받아 적어서요. 지금의 한국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답답할 따름이지요. 일본 정부에서는 그 사람들이 아예 기록에 없다는 겁니다.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신채원 : 그런다고 없었던 일이 아니잖아요?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감독님께서 만드는 세 번째 작품에서는 살아남은 유가족들의 시선에서부터 출발하시는 거군요? 유가족들이 그 분들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명백한 증거니까?

오충공 : 한마디로 말하자면 민족의 비극입니다. 유대인이 학살당한 것과 비슷한 사건입니다. 간단한 사건이 아니고 재일동포만의 비극도 아닙니다. 한민족의 비극입니다. 이름도 없고 시신도 없고 유골도 없습니다. 유가족의 시선에 힘을 싣는 이유는 희생자가 이렇게 희생되었다는 것, 그들에게 이름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고향이 있었다는 것, 희생자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자라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보여주는 가족의 역사를 그려야만 희생자들의 존재를 말할 수 있을겁니다. 희생자 수가 무려 6,600명입니다. 우리 정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영상으로 그리긴 어렵습니다. 93년이 넘었으니까요. 가해자의 얼굴, 피해자의 얼굴. 두 얼굴이 나와야 할 겁니다.

신채원 : 감독님, 이쯤에서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사셨그들에게 이름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고향이 있었다는 것 ,누구와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보여주는 가족의 역사를 그려야만 그들의 존재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다고 하셨는데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산다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으셨지요?

오충공 : 아버지가 조그만 공장을 하고 계셨어요. 비닐, 철과 같은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한국식으로 보자면 고물상 같은. 형편이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어요. 저는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일본인 학교를 다녔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다 알더군요.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는 차별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조선놈’이라는 이유로 학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돌 던지고 그러니까 제가 조선 사람인 걸 그때 알았어요. 차별을 받고 조선 사람인 것을 인지한 것이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학교 선생님께 자문을 구했어요. 학교 선생님께서 조선인 학교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선생님이 일본 공산당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민족 차별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었어요. 소학교 4학년 때 조선 학교로 전학 갔으니 한국말을 몰라서 고생을 했죠.

신채원 : 부모님께서는 한국 분이신데 한국어를 안 가르쳐 주셨나 봐요?

오충공 :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한국말을 안 가르치셨어요.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 봐 한국어를 안 가르치셨던 것 같아요. 그 당시는 조선 학교를 다녀도 말이 자유롭지 않았어요. 모든 문화가 일본인 중심이었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한 것도 없었거든요. 그러나 해방이 되어도 일본에 있는 동포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어요. 저는 자라면서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이 차별을 받아야 하는 부끄러운 민족인가 알고 싶었
어요. 지금도 잃어버린 역사를 찾고 스스로 완전한 조선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조선 학교를 다녔어도 우리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해요.

신채원 : 한국에서 감독님의 작품을 상영한 적이 있나요?

오충공 : 몇 차례 있었습니다. 1998년에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해외 코리안 작품 초대작으로 ‘숨겨진 손톱자국’을 상영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지난 2014년에 8·15 광복절 기념 특별전시회 <열도속의 아리랑>이라는 전시를 했어요. 재일동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였죠. 그때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강덕상 관장님의 강연과 함께 제가 찍은 영화 두 편 <숨겨진 손톱자국>과 <버려진 조선인>(당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한 영화제목. 현재는 <감춰진 손톱 자국>, <불하된 조선인>으로 표기하고 있다.)을 상영했습니다. 그 외에도 ‘영화가 말하는 재일동포’라는 주제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작은오빠>, 오쿠리 코헤이 감독의 <진흙강>, 재일동포 김수진 감독의 <밤을 걸고>,이즈츠 가즈유키 감독의 <박치기>, 박철수 감독의 <가족시네마>, 김명준 감독의<우리 학교>를 같이 상영했습니다.
다른 영화를 제작하고 싶지만 이 영화를 만드느라 한평생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저도 상업영화 만들고 싶죠. 밝은 영화도 한번 찍어보고 싶고요.

신채원 : 이번 달에 작품 제작 발표회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추도 모임도 결성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오충공 : 그렇습니다. 영화는 아직 찍고 싶은 컷이 남아서 정식 발표는 내년 3월에 하려고 합니다. 이번 8월에는 예고편을 상영하려고 합니다. 추도 모임의 공식명칭은 ‘1923년 학살당한 재일한인 추도 모임’입니다. 추도 행사와 예고편 제작 발표회를 같이 마련했습니다. 8월 19일과 20일 이틀간 서울시청 시민청과 광화문광장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서울시청 시민청 이벤트홀과 바스락홀에서는 이틀간 상영회와 예비 행사를 하고 20일 오후 추도식 행사를 광화문광장에서 하는 것입니다.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분들이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관련 기사 43쪽 참조).

신채원 : 감독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겠죠? 가슴 아픈 역사 앞에서도우리는 꿋꿋이 일어섰듯이 앞으로도 우리는 일어서야겠죠? 끝으로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오충공 : 기자님은 헤이트스피치라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일본인들이 재일교포들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모욕적으로 공격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재일조선인들은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미 일부 사람 들은 일본 국적으로 바꾸기도 했고요. 그럴수록 저 같은 사람도 생겨나겠죠.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희망을 갖고 살아야하는데 올바른 역사 인식을 못하고 있어요. 해방 전후 유학생회, 조선인연맹등 이른바 ‘접’처럼 뭉쳐 독립 해방을 믿고 살아온 재일조선인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한국에 와서 보은취회를 보고 동학의 ‘접’ 개념을 통해 많이 배웠어요. 그런 개념이 재일동포 안에 있으면 좋겠어요. 재일동포들은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단지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알게 되고, 어려울 때 서로 나눔을 실천했던 동학의 유무상자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접’의 형태로 뭉쳤던 민중의 조직된 힘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동학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 동학농민혁명 이후 100년이 지나서야 특별법이 생기고 명예가 회복되었더군요. 관동대진재는 90년이 좀 넘었잖습니까. 조금 희망적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세 번째 다큐멘터리의 타이틀은 <1923년 제노사이드, 93년간의 침묵>입니다. 곧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오충공 감독이 메시지를 보내왔다.오충공 : 민초는 오랜 역사와 전통 생활에서 가꿔 온 아름다운 말입니다. 넋이 어리고 맑은 정신이 흐르는 동학의 유전자라고 생각합니다.

신채원 : 동학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백성들의 희망이었습니다. 120년이 흐른지금 이 시대에, 또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도 희망은 피어나겠죠. 감독님께서 말씀하시는 맑은 정신의 유전자로요^^

오충공 : 일본에서 살다가 귀중한 동학의 유전자를 찾는데 너무 늦었음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보은에서 받은 씨알과 불씨를 자기 육체에 심고 남은 인생을 이름 없는 풀로, 맑은 물을 먹고 사는 민초로 살고 싶습니다.

신채원 : 이 시대의 동학은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출발합니다. 감독님과의 만남에서도 깊은 성찰과 함께 이 시대의 동학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뵐 기회가 되면 다큐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오충공 : 독립영화 만세!

3.1혁명기념준공 관동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
후나바시시가 무료로 제공한 시립마고메영원에 세워져 있다.
거창군 출신의 조권승 희생자의 친족 조병택씨.
역시 92년만에 재적동본과 족보 그리고 공문기록에서 확인되었다.
의성군에서 92년만에 찾은 희생자의 손자 박성균씨.

 

1963년 재일본조선인총련 치바현 서부지부 동포들이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유골을 뿌린 장소를 찾아내어 발굴하고 추도비 아래에 묻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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