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사춘기를 겪어야 어른이 된다” 스스로 깨닫는 삶이 주는 용기

– 행동하는 지성, 철학박사 유초하

여기 한 소년이 있다. 태양이 쏟아내는 무수한 빛줄기들을 바라보며 ‘그래, 어디한번 해 보자, 스스로 다 태워버릴지라도 눈감아 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분노와 슬픔과 연민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왔다. 누군가는 그를 싸워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 눈앞에 적이 있어야만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외로움이 때로 가장 가까운 위로가 되기도 했다.

신채원 : 반갑습니다. 지난 1월에 뵈었을 때보다 다리가 더 불편해지신 것 같은데, 건강은어떠신지요?

유초하 : 다리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를 받고 있어요. 다른 덴 괜찮아요. 걷기가 불편해서 지팡이에 의지해서 다니는데 영 불편하긴 합니다. 술이나 담배를 좀 덜하면 조금 더 빨리 회복이 되기야 하겠지만, 찾아보니 술과 담배가 직접 원인이 되는 질병은 없다고 해요. 그냥 체험이나 추측이 아니라 많은 조사와 연구를 거친 결론이랍니다. 유명 과학저널에도 실렸다네요. 요즘 들어서는 술 담배가 몸에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인정하긴 합니다만 오랜 습관을 갑자기 버리기는 어색해서 그냥 마시고 피우기는 합니다. 막걸리나 소주는 한 번에 한 병 정도로, 담배는 하루 한 갑 정도로 줄어들었지요.

신채원 :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영상 강의를 꽤 많이 하셨던데요, ‘왜 사는’와
같은 시리즈 강의들을 유투브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유초하 : 오랜 세월 강의를 했지요. 최근 연속되는 시리즈로 강의를 주로 합니다. 책도 쓰고 있어요. 사실 제가 책을 많이 쓰지는 않았어요. 현재 <한국사상사 산책> 저작물을 집필중이고 우리 시대 언어 바로 쓰기를 주제로 한책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채원 : 말씀해 주신 것처럼 오랜 세월 강의를 해 오셨으니 그 세월만큼 세대가 변화해 가는 모습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셨을 것 같습니다. 학생들을 보시면 그 시대의 특성에 따라 학생들의 가치관이나 문화들도 다를 것 같은데요.

유초하 : 묘하게 다르죠.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떤 깨우침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 실행하면 많은 개체가 비슷한 시기에 그걸 각득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말하는 것은 거대한 진실의 덩어리는 아니고 수많은 개체의 자기 인격성이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의 세대별 즐기기 방식이라든가 공통된 논리 등이 소셜네트워크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알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 사회에서 같은 나이를 가진 사람들이 따라가게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번별로 문화가 다른 겁니다. 다 다를 수는 없겠지만요. 대충 2~30년 단위로 공통의 정신이 있더군요. 그 특성이 분명히 있고요. 33년간 몸담아 온 대학 사회의 세대별 문화는 해마다 달랐습니다. 도드라지던 학번도 있었고요. 나이가 아니라 그 시대 문화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령, 세대를 형성할 정도로 왕성하게 주도하던 학번이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0년대 들어와서는 그런 두드러진 특징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신채원 : 제가 바로 그 2000년대 이후 학번 세대입니다. 기억하기로 이른바 운동권 학생이 사라진 세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대들에게는 조금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 그 시절을 건너온 세대들에게는 추억이 될 만한 이야기도 많을 것 같습니다.

유초하 : 우리 시대에는 학생운동을 하지 않는 학생이 없었고, 내가 교수로 있던 80년대에는 극좌교수였던 나를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어요. 물론 그 안에서도 삼성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던 학생들마저도 어쨌든 울부짖지 않고는 대학을 다닐 수 없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어요. 그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세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채원 :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을 결성하시게 된 시기였겠네요.

유초하 : 그렇습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87년 6월에 민교협이 출범했어요. 초기에 결성할 때부터 뜻을 함께했지요. 민교협 결성의 과정을 1986년부터 본다면 주로 한신대 경영학과 교수 김상곤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유초하, 이렇게 두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민교협 창설의 과정은 1985년 정도로까지 좀 더 거슬러 올라가지요. 우리 두 사람이 만나고 상의한 선배 교수들도 적지 않습니다. 1970년대부터 학문-교육 운동으로 치열하게 살아간 원로에서 1980년대에 함께 활동한 선배들까지 얼핏 기억나는 분들만 해도 이효재, 성래운, 리영희, 장을병, 김진균, 송기숙, 강돈구, 이수인, 김수행, 정운영등 많은 분들이 있지요. 그중에서도 리영희 선생과 김진균 선생은 직접 만나고 논의한 대표적인 분들이지요. 김상곤과 유초하가 민교협 창설의 주역에 들게 된 것은 학부 시절 1960년대 학생운동에서 1980년대 정치교육운동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면식이 넓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창립 이후 곧바로 실제 조직운동에서는 빠지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내년이면 창립 30주년이 되는데,아직까지도 이런저런 일에 조금씩 함께합니다.

신채원 : 어린 시절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지네요.

유초하 : 그냥 개구쟁이였어요. 촌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잠자리나 메뚜기를 잡고 놀았고, 강아지와 함께 밥을 먹었고, 병아리 몇 마리를 방에서 키웠는데 애들마다 ‘복실이’니 ‘새침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지요. 어린 시절에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많이 받은 정도가 아니죠. 다섯 살 때까지 엄마 젖을 먹었어요. 여동생도 있었는데 말이죠. 어떻게 보면 핑계지만 내가 아주 잘난 사람으로 알고 살게 된 이유, 그 주범은 내 어머니예요.

신채원 : 칠십이 다 되신 선생님께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시니 들뜨시는 듯하네요. 어머니 이야기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유초하 : 내 어머니는 여든아홉에 돌아가셨어요. 그때 내가 쉰넷이었고요. 나에게 형이 셋 있었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신화를 통해 환상을 심어줬어요. 아들 넷중에 넷째인 나에게 스스로 환상을 가지셨던 거죠. 신화를 통해 주입을 했겠죠. 그 환상에 대해 내가 소화한 결과는 ‘너는 큰 인물이 된다’ 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경복고와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스스로 좀 갈라지긴 했어요. 서울대에서 반장 안 해 보고 1등 안 해 본 아이가 몇이나 됐겠어요. 내 어머니는 그게 죽을 때까지 바뀌질 않았어요. 아들이 그때만 해도 20년 정도 교수 생활 했을 때지만 시장바닥에서 볼 땐 별거아니잖아요. 그보다 삼성의 과장이 낫지. 어머니는 여든이 넘어서까지도 당신 아들이 잘난 줄 아셨던 거예요. 나와 2년을 살면서 내가 성심성의껏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어머니, 아들 잘나지 않았어요. 내 친구들 다 어머니 아들보다 잘났어요.” 그랬거든요. 아들이 그렇게 간곡하게 이야기 하니까, “그래, 알았어.” 그러시더라고요. 좀 알아들으셨나 했는데, 돌아서시더니 혼잣말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래도,내 아들이 잘났는데….” 하시는 겁니다. 막내로 자란 데다가 어머니가 심어준 신화적 환상이 지워지질 않는 겁니다. 턱없는 환상을 가지고 살았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더욱 그러셨을 겁니다.

신채원 :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많은 형제들을 어머니 혼자서 키우느라 힘드셨겠어요.

유초하 : 아버지는 부자였다가 크게 내려앉아서 가난하게 살았어요. 형들은 부자인 아버지와 살다가 가난한 아버지와 살았겠지만 나는 늘 가난한 아버지와 살았던 것이죠. 형들은 좌절을 많이 했을 거고 불행감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게 없었어요. 비참함도 없었고요. 물론 가난했지만요. 아마도 막내여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들은 대학을 각자 벌어서 갔어요. 형들끼리 동생은 그렇게 자라게 하지 말자고 했다는 거죠.

신채원 : 그 어렵던 시절에 가난했지만 마음은 늘 넉넉하게 자라셨을 것 같아요.

유초하 : 나는 누구에게도 야단맞은 적이 없어요. 딱 한 번 학교에서 맞은 적이 있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죠. 언제나 나를 잘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바라봐 준덕에 그런 경험들이 나를 낙관적으로 살게 했어요. 나의 경우 낙관이나 자신감이 일종의 자부심, 의무감, 책무감까지 동반하게 되더군요. 가령 돌아가신 어머니가 너는 잘났다, 잘생겼다 하는 말이 지금도 들린단 말이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식을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했어요. 40대 과부가 노점상을 하면서 자식들 대학 보내고 집도 샀어요. 그걸 버는 과정을 기억해 보면 시장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는데 그 군고구마 통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거워요. 그걸 항상 밀고 들고 끌고 들어와요. 그게 넘어지고 그러면 그 통을 다시 마련해야하지 않습니까. 자갈이 든, 연탄이 든 군고구마 통을 머리에 이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좀 유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생전에 쓰신 글도 있고요.

신채원 :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어머니는 선생님께 평생 품고 살아갈 긍정의 에너지를  주신것 같아요.

유초하 : 내가 사회 비판의 감성이나 태도를 가졌다면 그건 대체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내면화해 온 결과물일 겁니다.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건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였어요. 젖먹이 때 가장 먼저 익힌 건 누구나 그랬겠지만 성과 이름과 고향(本貫)이었어요.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던 시절 내가 주로 들은 건 5백 년 전 선조(서애 유성룡)의 삶과 우리 민족의 역사였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 변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비교적 오랜 사춘기의 암흑 속에서 모든 걸 버리거나 상실했다고 여겼는데, 그 긴 터널을 지나고 난 이후에도 그 전에 겪고 쌓아온 기억과 행동의 토막들이 여전히 내 몸과 마음속에 녹아 있는 겁니다.

신채원 :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년이 되어 특별히 철학을 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그 시절에도 철학은 지금처럼 눈앞에 빵을 가져다주진 않았을 텐데요. 선생님의 젊은 날에 비추어 볼때 요즘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보이시나요?

유초하 : 불쌍하지요. 그 불쌍한 아이들이 자기 삶의 사색을 주제로 삼을 일이 있겠어요? 사춘기도 못 겪고 마흔을 맞이하는 아이들 아닙니까.

신채원 :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는 주제, ‘왜 사는가’ 시리즈를 누군가 찾아서 본다는 것은 그것의 답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이 있기는 하다는 거잖아요.

유초하 : 그래요. 고프니까, 고픔은 있지요. 내가 모르는 게 뭔지 모르니까요. 그건 사춘기를 못 겪어서 그래요. 사람은 열댓 살부터 서른까지 집중적으로 근원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만들게 되어 있고 그에 대한 답을 열심히 찾아 나서게 되어 있어요. 거기서 여러 가지 시론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업신여겨 보기도 하고, 착하고 얼빠진 사람들은 그중 하나 뭔가를 숭배하기도 하지요.

신채원 : 2000년대 이후 학번이 30대 중반을 넘어섰는데요, 그 세대들이 40대, 50대가 되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과연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만 우려하는 시선들이 더 많습니다.
유초하 : 답답합니다. ‘내가 왜 사느냐’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사춘기입니다. 생을 제대로 살고 안정된 걸음으로 죽을 때까지 살려면 사춘기의 고민을 거쳐야 해요. 그걸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신채원 :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 정해 놓은 답을 따라가야 하는 것, 그것이 정답이라고말할 때 그 사이에서의 갈등은 어느 세대나 있던 담론 아닌가요?

유초하 : 그렇지 않아요. 지금 20대처럼 스스로에 대한 고민 없이 살지 않았어요. 우리 세대 같으면 취직 걱정은 안 하고 살았어요. 내가 정치학과와 철학과를 나와 취직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 말은 달라요. 지금 그게 없어요. 왜냐? 사춘기가 없기 때문이에요. 자기 삶이 뭔지 고뇌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요. 내 인생을 고뇌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남의 삶에 개입을 합니까?

신채원 : 맞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취업 걱정을 하고 어떻게든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말고는 고민의 여지가 없습니다.

유초하 : 사춘기의 고뇌를 하라고 말하는 것이 내 강의의 기본 주제입니다. 19세기 같으면 “20대에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40대가 되어서도 사회주이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다.”고 말했어요. 그런 말이 통하는 세대가 있었다는 말이죠.
존재와 가치에 대해 말하는 법, 행복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지 행복이 뭔지 배우지 않았어요. 물론 강연을 통해 그런 답을 주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는 척하고 답했어요.

신채원 : 그렇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사춘기를 겪지 않고 40대, 50대를 맞이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조금 힌트를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나요?

유초하 : 자, 내 말을 들어 보세요. 내가 예수처럼 뭘 해라, 뭘 해라 말하면 안 되죠. 예수보다 2천년이나 나중에 태어났는데 공자나 맹자도 지켰던 말하는 법이 있어요. ‘이것이 우리 인류가 나갈 진정한 메시지요.’라고 말하면 안 될 거 아닙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걸 ‘이것’이라고말하면 아닌 게 돼요. 이미 무엇이 답인지는 다 나와 있어요. 그것이 유일한 답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고요. 존재하는 모든 세계는 무엇이든 다 차 있어요.

신채원 : 어렵습니다. 이미 선생님께선 말씀을 다 하셨는데, 그걸 찾는 데 청춘을 다 보내는 것 역시 사춘기를 겪는 것이라고 봐도 될까요?

유초하 : 행복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어 왔을 때 전혀 답이 없어요. 철학이란 행복을 다뤄선 안 된다고 선언한 지가 거의 100년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동양의 것을 가지고 가서 다시 실질적으로 말해요. ‘우린 인생이 뭔지 몰라, 덕을 쌓는 거야.’라고요. 그런데 다시 그걸 동양에서 서양에서 나온 것인 줄 알고 또 베껴요. 그게 세상이에요. 그 공간 안에 진실이 있어요. 그걸 찾는 게 아니고 깨닫는 거죠.
답은 있고 깨닫는 거예요. 이걸 다시 말하면 깨닫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구성하는 겁니다. 조립하는 거죠. 진실은 그겁니다. 행복론도 거기 있어요. 가치고 행복이고 매우 단순해서 다 느끼는 것입니다.

신채원 : 무엇보다도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유초하 : 그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가령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나 혼자 잘사는 것보다 더불어 사는 것이 좋겠죠. 그걸 말로 아는것이 아니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건 다른 겁니다. 말로 된 표현을 이해하는 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감성과 의지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누구나 어울려 하나가 되고 차별이 없어지고 함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계. 이게 다르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뭡니까?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구분하고 경쟁하는 것, 내가 너를 배제하는 것, 배제하는 심성의 지성은 필요 없다고,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로 무장한 사람은 천국
에 갈 수 없다고 예수가 말합니다.
‘사랑이 소중하다’ 느낌에서 오는 것이지 말로 의미가 없어요. 사랑은 삶이고, 세상이고, 그냥 존재입니다.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삶이 있어야 하고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삶이, 인생이 어떻다고 직접 말하면 안 됩니다.

신채원 : 삶의 방향을 결국은 스스로 택하고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을 오래 공부하셨고,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는 그럼 어떤 선택과 깨달음으로 현실을 마주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유초하 : 나는 그런 질문을 좋아하지 않아요.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현실을 비판하게 됐다기보다는 그냥 살다 보니까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말로, 행동으로 힘 닿는 만큼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덜 건강하고, 특히 정권과 금권을 틀어쥔 집단이 심하게 부패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걸 보게 되니까 그에 대해 비판하는 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존재와 가치를 해명하는 작업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각자의 몫이지 누군가 정답을 내놓고 우리 이 세상에 살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시간이 뭐고 공간이 뭡니까? 이런 질문들이 철학
의 주제인데 그걸 알아듣게 설명은 할 수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자기 속에서 용해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철학에서 남들의 말은 참고입니다. 내가 어릴 때 신문이 조간과 석간 두 차례 나왔는데 그때 새벽마다 저녁마다 신문을 사 와서 형제들이 봤어요. 그 신문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분노,의지 그런 것들이 생겨난 것 같아요. 어쩌면 어릴 때 그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평등하다거나 연대를 이룬다거나 그런 막연한 꿈을 키우지 않았을까 싶어요.

신채원 : 젊은이들이나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못한 어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신데, 조금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요?

유초하 : 예를 들어 사르트르는 실천적인 철학자였어요. 프랑스인답지 않게 실천적인 사람이었죠. 프랑스 지성은 역사가 말해 줍니다. 반짝이기만 하고 뒷감당은 못했어요. 역시 우리 사회를 보며 비탄을 금치 못하지만 한국인들은 20대, 30대가 제정신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로 채워져 살지만, 그러나 그 기질은 아직도 있습니다. 이 문화 유전자는 몇 만 년씩 지속되는데 몇 세대 가볍게 살았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내가 잘 쓰는 말이기도 하고 필명이기도 한데,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하는 것이 인생의 필수입니다.

신채원 :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잊고 살거나 누군가에게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해주신 ‘문화유전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초하 : 유럽에서 자국어로 학적 작품을 쓰기 시작한 첫 번째 사람은 칸트입니다. 18세기에 태어난 칸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봅시다. 16세기, 17세기쯤 되면 한국어로 된 문학 작품이 나옵니다. 
정리해 봅시다. 조선은 위대한 나라입니다. 모든 국가 건설의 신화는 종교의 성격을 띠는데 대표적인 것이 귀신의 자국을 대표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초기 국가 건설의 신화, 그것이 단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비통한 역사로 말해 봅시다. 조선의 멸망을 객관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의 양대 본성이 팽창과 착취인데, 그것을 저변에 깔지 않은 자본주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자본주의가 일정 단계로 가게 되면 제국주의화 될 수밖에 없는데 한국이 그 단계에 와 있어요. 제국주의화되었다는 것은 곧 해외 식민지를 지배하고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구상에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마지막 땅이 동아시아일 건데 대표적으로 졸개 제국주의 일본이 가장 위대한 족속인 조선을 잡아 버린 겁니다.스페인도 포르투갈도 네덜란드도 영국도 아니었어요. 그들은 적어도 나름대로의 제국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30년밖에 안 된 일본이라는 치사한 제국이
가장 위대한 문명사를 간직한 조선을 가졌어요. 일본의 조선 점령은 미국과 일본의 합작품이지 일본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국가 건설 초기에는 다 신화가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중국 볼까요? 신화가 있지만 매우 빈약합니다. 중국 신화의 대표로는 천황, 지황, 인황이라고 하는 3대 표본인간(삼황)이 있어요. 그러나 여기 보면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 뱀, 말 이렇습니다. 개와 돼지와 귀신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게 인간의 신화란 거죠. 각각 10만 8천 년씩 다스렸다고 하죠. 그들이 말하는 위대함이라는 게 귀신과 짐승을 결합시켰어요.
그러나 단군은 하늘과 지상 세계의 부족들과 이어지는 계단이었어요. 온 세상의 총체적 지배자인 존재의 아들이 내려와 스스로 씨를 퍼트린 것이 우리입니다. 엄격히 다릅니다. 하늘의 정통을 이어받은 위대한 존재가 조선이라는 겁니다. 조선이 이렇게 위대한 나라라는 겁니다. 역사를 놓고 볼 때 우리 조상들은 위대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정신이 많았어요. 자기 몫을 성실하게 했고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예수보다 더한 예수들이 많았을 겁니다. 지금도 많은 도인들이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깨달음은 말로 해 버리면 날아가고 없어요. 그러니 그 노력을 하는 것과 실천의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채원 :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는 어떤 민족보다도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는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남겨 준 옛 성현들의 가르침 중에 선생님께 영향을 준 사상이나 시론이 있나요?

유초하 : 인간에게는 변하지 않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자연이 준 종의 특성이란것도 있겠고, 사회적 삶의 누적을 통해 틀이나 무늬나 패턴 비슷한 걸 이루게 된 후천적 요소들도 있지요. 선천 형질만이 아니라 획득 형질도 유전할 수 있다는 거지요. 앞서 이야기했던 문화 유전자가 계승된다는 건데, 사회집단마다 가진 문화 패턴 같은 게 있지요. 나는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철인들이나 성인들이 설파한 다양한 표현의 인간 본성 가운데 나는 맹자의 사단에 주목합니다.사람이란 남들의 불행에 내가 놀라고 아파하며 남들의 행복에 스스로가 기뻐하는 공통의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나의 잘못된 행동에 부끄러워하고 남들의 잘못된 행실에 화나고 싫어하며, 내가 가진 것을 남들에게 주고 남들이 가진 것을 준다고 다 받지 않으며, 세상 일몰에 대해 맞고 바른 것과 잘못된 것들을 가려내고 그에 따라 행동
하는 것, 이 모든 행동 방식이 누구나의 마음속에 갖춰져 있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는 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가 사회와 역사의 성장과 퇴보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리라 봅니다. 개인들이 지닌 착함과 덜 착함의 정도 같은 것도 이에 비추어판단할 수 있겠지요. 이런 걸 잘 드러내는 게 바로 성인들의 삶이 아닐까요? 성현들 말씀이라는게 다 갑남을녀들의 일상에 절절히 와 닿는 거 아닌가요?

신채원 :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또 이야기가 와 닿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서 사춘기를 겪지 않고는 어른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적 요인이나 갈등이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무게가 되어 견디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유초하 : 어른을 찾아 거울을 삼는다고 어른이 되나요? 이 시대 어른이 있기를 바라지 말고 어른이 되어야죠.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나의 일상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자원을 내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과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진짜 스스로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답을 자신이 갖지 않고 누군가 말하는 삶은 자기의 삶이 아니겠지요. 위대한 족적을 남긴 성인들의 삶은 그냥 참조물이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이나 나의 세상, 인간의 역사, 궁극, 포괄, 이런 의미를 담는 것들을 주제로 스스로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걸 거치지 않는 한 내 삶이 아닐 겁니다. 존경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내 뜻이 아닐 거니까요. 인간이 개미와 다른 학습을 얼마나 합니까. 인간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위대하다? 개미가 하는 만큼도 일하지 않고나의 삶을 살고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체인 나를 바깥으로 내놓고 본다든지 여기에 나를 두고 바깥에서 바라본다든지 그 정도에 걸맞는 삶에서의 태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왜 사느냐,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실제로 뾰족한 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어요. 물론 간단히 말할 수 있어요. 아무런 설명 없이도 말할 수 있어요. “사랑, 그것이 삶의 이유다.” 근데 그것이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자건 예수건 그 답을 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제대로 성숙한 성인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가치관이 정립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신채원 : 무엇이라도 명확하게 정의해 주지 않으시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유초하 : 내가 답하기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 답을 하면 답이 아닌 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랜 고뇌를 거쳐 새롭게 생산해내는 것이라고 해도 삶의 이유는 공자와 맹자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답은 없습니다.선생을 만난 첫날, 이야기는 늦은 오후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이어졌다. 15시간 동안 선생은 단 한순간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필자의 어리석은 질문보다도 더멀리 돌고 돌아온 대답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춘기를 겪지 않고 어른이 되는 법이 없다는 선생의 말씀도 돌고 돌아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요즘 말을 뛰어넘어 ‘아파야만 청춘’이라고 써 본다. 날카로운 눈빛과 거침없는 표현들은 첫 번째 만남에 이어 두 번째 만남에서 완벽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느꼈고, 세 번째 만남을 준비하며 눈싸움에서 완벽히 이기는
방법을 연마해야겠다.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현실을 비판하게 됐다기보다는
그냥 살다 보니까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말로, 행동으로 힘닿는 만큼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5

유초하
1948년에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문학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충북대 철학과에서 강의하였고, 현재 명예교수이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공동의장을 지냈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고문으로 있다. 현재 파주에서 <한국사상사산책>을
저술 중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