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진 백일학교 교장
신채원 :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두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선생님 처음 뵌 지 몇 해 되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선생님 두 눈을 보았거든요.
황선진 :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신채원 : 그야말로 서슬 퍼런 시기를 건너오셨더군요. ‘어제의 용사’였던 선생님의 20대에는 두 눈이 더 반짝였을 것 같은데요.
황선진 : 열심히 쫓아다닌 시기였지요. 나 같은 젊은이들은 모두 세상을 바꾸자고, 혁명을 하자는 운동을 했었어요.
신채원 : 따뜻한 인터뷰에 꼭 모시고 싶었습니다. 지난 여름 보은취회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중심임을 깨달은 사람을 칸이라고 합니다. 너도 칸, 나도 칸, 우리 모두 칸! 스스로 살리고 서로 살립시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황선진 : ‘살린다’는 말을 화두로 운동을 전환하게 된 계기가 있었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려놓고 불교적 가치관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바꾸자’에서 ‘살리자’로 운동의 방향이 바뀌었죠. 과거에 모두가 세상을 바꾸자고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각 방향에서 모든 것을 걸고 열정으로 뛰어다닌 시절을 건너왔어요. 나야 그런 분들에 비하면 뒤따라 다니는 정도에 불과했어요. 그때는 낭만적인 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신채원 : 선생님께서 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황선진 : 정신대를 알고 나서 참을 수 없었어요. 그 역사를 알고 나서 참을 수가 없어서 뛰어들었죠. 그러나 그 시절엔 이론이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레닌을 공부하고 그 이론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해 왔다고 볼 수있어요.
신채원 : 긴급조치 9호로 옥고도 치르셨지요?
황선진 : 1975년 5월 22일이었어요. 김상진이라는 서울대 농대 학생이 할복자살을 하죠. 그의 장례식을 치러드렸어요. 운동의 중심에 있던 열사들, 120년 전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잖아요.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돌아가신 분들. 그런 분들을 대신해서 세상에 외침을 하고 싶었어요. 물론 제가 열정이 모자라기도 하고 철저하지 못해서, 자신 있게 말하기는 부끄럽습니다.
신채원 : ‘세상을 살리자’는 말 안에는 그분들의 못다 이룬 꿈을 살려내자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살림이라는 말은 그 이후 운동의 키워드가 되었죠?
황선진 :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그 구호가 지금까지 저를 이끈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걸 생명운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생명에 무슨 운동이냐 싶고요. 그 안에 있기도 하고 거리를 두기도 하면서 가는 거겠죠.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불편하게 만드는 때여서 그 이후로 80년대 중반에 나타난 것 같아요. 공해추방운동. 환경운동… 그 흐름 속에서 같이 따라간 것 같아요. 이후에 불교 수행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조금 구체적인 운동의 방향이 흐름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90년대 중반쯤 되었을 거예요.
신채원 : 그쯤이면 40대 중반을 막 넘겼을 때였겠네요. 한때 선생님도 활동가 시절을
거치셨을 텐데, 어떤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겠네요.
황선진 :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일은 제가 안국사라는 절에서 수새 하늘이 열렸습니다. 어제의 하늘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오늘은 꼭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갈대숲에서 불어오던 바람을 기억합니다. 그대와 손잡고 걷던 돌담길을 뒤로 한 채, 갈대숲의 바람처럼 들풀로, 등불로 일어서 또다시 그대의 차가운 손을 맞잡습니다.
우리는 모두 촛불이며 바람이었으므로 갑오년 사람이 하늘인 세상, 기미년 자주독립의 꿈이 80년 5월처럼, 87년 6월처럼 타오를 터이니, 우리는 지금을 기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대와 내가 숲이 되어, 바람이 되어, 여기 서 있었으므로. 눈빛이 맑아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생의 두 눈에는 밤바다에 춤추는 별들이 있었고, 노을 진 하늘에 쓴, 부치지 못한 편지 한 장이 있었고, 어머니의 긴 한 숨과 수의(囚衣)를 입은 젊은 아들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생의 한 가운데에서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그렇게 맑은 두 눈에 쓰여 있었다. 행을 하고 와서는 마음에서 깨달음이 우러나왔었는지 동네 청소를 혼자 다 했어요. 환희심이 일어나서요.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요. 수행은 저에게 운동을 지속 가능하게 해 주었죠.
신채원 :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의 과정이었는지, 또 운동의 방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요.
황선진 : 제가 수련했던 ‘간화선’은 스님에게 화두를 듣고 깨치고 타파하면 자기의 본래 성품을 알게 된다고 하는,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에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운동의 방식이 무엇인가 타도하는 것에 발길이 뜸해졌어요. 무엇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 자신의 음성은 갖지 않고 하는 것은 모두 껍데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구체적으로 그 이후의 제 삶의 방향도 달라졌어요. ‘생명축제’를 만들거나 또 그 이후에 마리학교를 세운 일까지요.
신채원 : 대항에서 대안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되었겠네요. 대안교육을 꿈꾸신 이유가 있었나요?
황선진 : 솔직히 이야기하면 할 일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다른 사회운동 조직에가서 하는 것은 내 마인드가 달라졌기 때문에 불가능했고요. 그러다가 지역사회의 권유에 의해서 마리서당 훈장 노릇을 좀 하게 되었죠. 그때 대안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신채원 : 교육을 통해 꿈꿨던 희망이 있었건 거죠? 이후에 계속 학교를 세우셨던데요.
황선진 : 해마다 입학생은 달랐어요. 한 학년에 20여 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였지요. 그 연장선으로 백일학교까지 열게 되었어요. 학생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깨우쳐 주고 싶었어요.
신채원 : 학교의 교육 목표와 운영방식도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황선진 : 학교의 성격은 유목학교였어요.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고 움직이면서 배우면서 지식과목뿐만이 아니라 작업장학교라고 해서 이 사회에서 재능을 깨닫고 작업을 배우는 학교는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백두대간 종주도 했고 러시아 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해주로 이동해서 수업도 했고요.
신채원 : 아이들이 잘 따라와 주던가요?
황선진 : 그럴 리가요. 잘 안 따라오죠. 그런데 놀라운 일은 중2 아이들을 간화선 수행에 보내기도 했는데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더라는 거예요. 말썽꾸러기 학생들이 자기 인생에 가장 의미 있었다 하기도 하고요.
신채원 : 흔히 교육은 아이와 함께 어른이 끊임없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들 합니다. 대안교육이 선생님 개인의 삶에 남긴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황선진 :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죠. 사실 제대로 된 대안교육은 교사가 핵심이 되어 정성을 기울이고 자기가 곧 하늘이고 부처임을 깨달아야 하는데 선생님들도 그게 곧 몸에 붙지 않거든요. 대표적으로 저 역시 그렇고요. 그래서 훌륭한 교육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다만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생각이들죠. 아직 꿈꾸고 있어요. 학교는 잠시 휴교 중이고 백일학교나 단기 교육프로그램만 열고 있어요. 백일학교와 성년식 프로그램입니다.
신채원 : 백일학교는 100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인가요? 그 시스템이 가능한가요?
황선진 : 백일학교의 모티브는 짐작하시겠지만 단군신화의 곰이 사람이 되는100일에 있어요. 청소년 백일과 청년 백일의 과정이 있습니다. 백일이라는 구조가 어렵긴 합니다만 계속 유지할 계획입니다. 단기 교육 프로그램으로요. 몇 가지 소개하자면 발효음식 만들기, 생태주택 만들기, 유기자연농법, 풍물탈춤교실, 본국검, 신성탐구, 사주, 주역 등등 다양한 교육과정이 있죠.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육체적 성장을 완성한 이후 영적 어른이 되는 교육인데,성년식 프로그램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나의 가족과 세상을 위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을내릴 수 있을 때 성년이 되는 거라고 보는데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성년이 못 됩니다.
신채원 : 백일학교에 다녀오면 정말 새사람이 될 것 같은데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 스스로 설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아닐까요?
황선진 : 거기서 시작되죠. 우리말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모든 진리가 들어 있어요. ‘나’라는 말 있죠.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라’에서 온 말이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중심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인류의 철학을 단순화시켜 보면 첫째, 나뿐이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투쟁의 대상이다. 약육강식, 작자생존의 논리라고 하죠. 둘째, 나와 신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보는, 인간 사회에서도 역시 벽이 있다, 절대자인 왕이 지배를 하며 귀족과 평민 사이에도 벽이 있으며 인간과 다른 생명 사이에도 벽이 있다. 세 번째, 내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중심이며 너도 그렇다. 모든 사람이 모든 생물이 모든 무생물이 그렇다. 모든 존재 사이에는 오직 다리만 있을 뿐이다. 이 세 번째의 철학이 바로 동이족의 철학이며 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채원 : 이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나 자신’으로 사는 것, 모든 생명이 스스로 중심이 되는 철학이 동이족의 사상에서 왔다고 하셨죠?
황선진 : 그런 가치관에 따라 자기 삶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구조를 형성하고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삼국시대 중반 이후 무너졌어요. 한족과 싸우고 대항하면서 국가 중심 체계로 변경되면서 그 흔적이 전해지며 다시 한 번 꽃피웠던 것이 동학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동이족의 철학과 문화가 내려오다가 한 번씩 분출된 것이 동학이었어요. 다시 사람이 하늘이 되는꿈을 꾸는 것으로요. 동학은 늘 실패했지만 늘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었어요.
신채원 :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반가운데요, 지금 시국을 바라보면 한탄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세상을 바꿔보자고, 살려보자고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바라보시며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황선진 : 저는 밝은 나라를 꿈꿉니다. 나라는 국가와는 다르죠. 제가 생각하는 나라는 영토가 없습니다. 따라서 강제적인 헌법도 없고 오직 철학에 따라 함께하는 사람들이 상생하고 서로 돕는 시스템입니다. 나라는 우리 삶의 모든 내용이 담길 수 있는 그릇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민족의 대부분은 그런 철학이었을 겁니다. 여러 부족이 합쳐져서 나라를 이루기도 했잖아요.동이족의 철학에 입각해 구조를 갖추면 동학의 어른들이 꿈꿨던 세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채원 : ‘밝은 나라’를 꿈꾼다는 말씀에 가슴이 설레기까지 합니다. 조금 비현실적이긴 하지만요. 요즘 같은 시기에 민중들이 그런 꿈 하나쯤은 다 가지고 광장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일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도 바라보셨을 텐데요, 이 현상들과 함께 바라본다면 선생님께서 그리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황선진 : 지금까지 집권해 왔던 수구세력을 물리치고 그보다는 조금 나은 세력이 집권하도록 목소리를 내야겠죠. 지금은 밝은 나라,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을 만드는 아주 중요한 계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신채원 : 한편으로 또 겁이 납니다. 이렇게 힘들게 얻어낸 민중의 힘으로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해서요. 과거에도 우리는 같은 선택을 했기 때문에 오늘과 마주하고 있는 것인데, 자꾸만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가진 선택지가 없어서일까요?
황선진 :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우리는 아직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자유롭지않아요. 아직 우리는 식민지가 끝나지 않았어요. 깨어있지 않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죠. 정확하게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많이 깨어났고 다시는 이런 세력에게 정권을 주지 말자고 목소리를 내잖아요. 썩어서 부패하도록 두지 말고 거름으로 만들어야죠.
신채원 : 말씀 듣고 보니 그래도 요즘만큼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시절이 또 있었나 싶습니다. 광장에 모인 민중들을 보면요.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하는 거겠죠.
황선진 : 절망이라는 말은 희망을 끊는다는 뜻입니다. 다들 절망까지는 아닐 겁니다.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은 절망의 끝으로 가는 방법뿐입니다. 그 끝으로 가면 딛고 일어서게 되어 있어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예요. 앞선 선지자들에 따르면 지금 지구가 처한 상황이 가장 어려운 때라고 해요. 이제부터는 감정이 무너지는 시기라고 하더군요. 사람 같지 않은 존재들이 생기는 거예요. 지금껏 보지못했던 존재들이 생겨서 더욱더 끝으로 가는 거죠. 그걸 겪어야 개벽이 오겠죠.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닐 것이고 우리는 예감하고, 준비하고 이 시기를 살아내야하겠죠. 동학의 가르침에 ‘이신환성’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유사시에 언제든 그 구조가 만들어지면 진짜로 나라를 세우는 겁니다.
신채원 : 선생님은 굉장히 긍정적인 분 같아요. 절망을 이겨내는, 기쁨을 기억하는 선생님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황선진 : 저는 좀 무딘 사람이라서, ‘끙’ 하고 버티는 편입니다. 외로울 때도 있고 그렇지만 금방 넘어갑니다. 버티는 힘이죠.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을 넘고보니 이제는 진짜로 귀가 순해져서 어떤 말에도 연연하지 않아요.
신채원 : 선생님으로부터 전해지는 기운이 늘 긍정적이라서 화가 나시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해지는데요, 주로 어떨 때 화가 나시나요?
황선진 :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내가 남에게 했을 때 자책이 들죠. 또 그 일을 내가 당했을 때, 무엇을 빼앗겼을 때 나도 화가 나겠죠. 그런데 앞서서 깨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부처와 같은 마음을 쓰고 하늘과 같은 마음을 쓰고 살아라.그걸 익혀가는 중입니다. 잘 둘러보면 그렇게 살아 온 사람들이 많아요. 이미 그런 삶을 살아 온 사람들이.
신채원 :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셨어요? 또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나요?
황선진 : 우리 학교의 인간상은 밝은 사람이에요. 선비라는 말 아시죠? 그 말은 ‘현비’라는 말에서 왔어요. 밝은 사람, 밝게 이끄는 사람이 선비의 뜻입니다.
신채원 : 밝게 자라라, 밝은 사람이 되어라.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자란다면 스스로 행복한 삶을 택할 것 같아요.
황선진 : 그건 누구나 될 수 있잖아요. 밝은 사람이 되는 것. 아쉬운 것은 아이들 세대에게 그 밝은 삶은 유지시켜 주려면 어른들이 그런 땅을, 그런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걸 해 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죠.
신채원 :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밝은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산다면 스스로 등불이 되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젊은 날에 꿈꿨던 세상을 누가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지는 않으셨잖아요.
황선진 : 나는 다른 삶을 몰랐어요. 그래서 제도권 안에서 견디기가 참 힘들었어요.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래도 그 안에서 길을 바꾸는 사람도 많이 생기더군요. 심지어 싸움의 반대편으로 투항해서 한 자리 하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그러나 저는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사람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봐야 합니다. 언제 또 그 사람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 인생을 사는 거니까요.
신채원 : 최근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지난 11월에 선생님께서 진행하셨던 화백회의와 천제를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화백회의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천제는 경건해지기까지했습니다.
황선진 : 천제는 당대 가장 핵심적인 의제를 가지고 화백회의를 거쳐 올리게 되어 있었어요. 고구려 이전 고조선에서도 그랬죠. 각자 자기 고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나누는 시장을 열기도 했어요. 제가 대학 때 탈패를 했어요. 훗날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도 하게 되지요. 문화운동을 1985년까지 했는데, 제가 해마다 천제를 지내는 것은 문화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못했을 일입니다. 그런 방식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옛날에 우리 민족이 해마다 한 번씩 큰 나라적인 집회를했어요. 나라가 크건 작건 우리 민족이 고구려를, 신라를 구성하기도 했잖아요.
신채원 : 만장일치의 의사결정을 이루는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함께 해 주신 여러 토론자 간 의사소통 과정은 한마디도 빼 놓을 수 없을 만큼 이상적이었고요. 열려있는 공동체와 어울림의 마당이 와 닿았습니다. 화백회의가 공동체 민주주의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라고 하셨는데요.
황선진 : 고대로부터 인류는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실험해 왔는데, 그중 동북방 아시아 종족들에게 공통적으로 발전된 공동체민주주의가 바로 화백회의입니다. 신라의 회의제도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신라가 가장 늦게까지 원형을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사회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신채원 : 설명서를 보니 ‘언제든지 자기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자기 권리를 양도하지 않으며 말하고 생각하는 자신을 관조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접 참여해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많은 의제를 가지고 토론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황선진 : 그동안 운동이 너무 강력한 탄압자를 맞아 비판하는 데 정력을 다 썼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우리가 중심을 세우는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 어떨까요?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려 나가야겠죠. 그것을 공유하면 나머지 자잘한 차이들은 하나둘 없어지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을 어떻게 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대화하고 논의하는 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중심에 놓았으면 합니다.
신채원 : 새로운 꿈이 펼쳐지는 대화마당이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개벽신문에서도 그런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새처럼 지저귀고 나무처럼 듣겠습니다. 끝으로 선생님께서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황선진 : 내가 나에게 주는 지혜라고 표현하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꿈에 걸맞는지혜를 갖춰야 한다. 저는 나라를 세우려는 꿈을 갖고 그 길을 가고 있는 셈인데 아직 그만한 지혜를 못 갖췄어요. 이제 나라를 세우겠다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 있으면 힘을 보태고 싶어요. 하늘과 땅에 통달해야 하고 그 사람이 되거나그런 사람이 곁에 있어야겠죠. 이 세상에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죠.
신채원 : 재정일치를 꿈꾸시나요? 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기도 하는?
황선진 : 요즘 말로 하면 그런 지혜를 갖춘 사람이겠죠. 큰 흐름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파랑새가 뭔지 알아요? 가슴에 싹이 자라나서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사람들을 파랑새라고 하더군요. 동학으로 말하자면 가슴에 한울님이 자라나서 세상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을 파랑새라고 볼 수 있어요.
오프 더 레코드 며칠 전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사람 마음이 왜 다 내 마음 같지 않죠? 힘들어 죽겠어요.”돌아온 답은“‘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하고 주문을 외워 봐요.”그날 처음으로 웃었다.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동안 차마 옮겨 적을 수 없었던 말들이 오프 더 레코드에 남았다. 쓰지 않겠다는 약속은 없었으나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재작년에 갑자기 아내를 잃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일상의 모습들이 어제 일처럼 마음에 남았다. 넋을 달래는 의식도, 천도제도 지내지 않았다. 불꽃처럼 한평생을 불태우고 살았다. 그 슬픔이 극복이 되기도 하는지 물었을 때, 바로 여기 앉아 있는 것 같다는 대답이 모든 것을 말해줬다. 뜻을 둔 일은 반드시 이뤄야했기에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아내의 빈자리는 조금도 비워지지 않았다.
“이 다음에 내 손자로 온다고 하고 갔어.”…
글쓴이에게 물으셨던 선생의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간다.
“채원 씨는 윤회를 믿어요?”
황선진 약력
1952년 강화 출생
서울대학교 인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애오개소극장 극장장,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대의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집행국장, 민중문
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생명축제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 인천환경운
동연합 공동대표, 마리서당 훈장, 마리학교 설립, 교장, 현재 백일학교 교장, 사단법인 밝은마을 이사장, 지리산생태영성학교 운영위원
“저는 좀 무딘 사람이라서, ‘끙’ 하고 버티는 편입니다. 외로울 때도 있고 그렇지만 금방 넘어갑니다. 버티는 힘이죠.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을 넘고 보니 이제는 진짜로 귀가순해져서 어떤 말에도 연연하지 않아요.”
“과거에 모두가 세상을 바꾸자고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각 방향에서 모든 것을 걸고 열정으로 뛰어다닌 시절을 건너왔어요. 나야 그런 분들에 비하면 뒤따라 다니는 정도에불과했어요. 그때는 낭만적인 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