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가 이재갑이 말하는 군함도의 진실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가 오는 7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제작비 267억 원,손익분기점이 1,000만 관객인 대작이다. 국민예능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MBC 무한도전에서는 <무한도전 – 배달의 무도> 특집으로 하시마섬을 찾기도 했다.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 ‘위안부’ 날치기 합의 등으로 한일관계에 국민들의관심이 높아지면서 방송, 영화에서 ‘위안부’ 강제연행, 독도 등의 일제강점기 제국주의에 의한 인권 유린 및 학살, 노동력 착취에 대한 콘텐츠들이 생산되고 있다.
대중들의 관심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다큐 사진 작업을 해 온 작가가 있다.군대를 막 제대하고 나서 혼혈인을 만난 것이 일제강점기, 근현대사의 아픔을 담아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그는 <무한도전 – 배달의 무도>편, 영화 <군함도>를 제작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무한도전 – 배달의 무도>편에 군함도로 들어가는 컷에서 그의 사진이 등장한다. 군함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그곳은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이 끌려갔던 지옥섬이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다고 해서 지옥섬이다.
현재 군함도에 끌려갔던 조선인 강제연행 피해자 중 생존자는 단 2명이다. 평생온통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눈앞은 어둑어둑한데, 수십 년 전, 그곳에서 스러져 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둥둥 떠올랐다. 어디에서도 마주한 적 없는 기억들이 편광처럼 스쳐갔다. 사진작가 이재갑이 20년 간 다큐 사진을 찍어 온 이유였다. 셔터를 누르는 손이, 뷰파인더를 향한 눈이 거기에 묻힌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 그에게 있어서의 작업은 언제나 거기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애달픈 삶이었다. 두 눈을 깜박일 때마다 차 오른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렌즈를 통해 바라 본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았고 한 분은 시력을 잃었다. 이분들 모두 10대 때그 ‘죽음의 섬’으로 끌려갔다.
일본정부에서 영화 <군함도>에 대한 사실 관계를 들어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날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엘리트만이 그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는 없었다고 말하며, 조선인은 기뻐했다고까지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군함도에는 5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어요. 당시 노동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1925년부터1945년 까지를 기준으로 122명이에요. 사망의 원인은 두개골 함몰 및 질식사였어요. 1945년 10월에 공식적으로 재일 조선인은 철수했어요. 살아남은 생존자들모두 10대 때 끌려갔고 온 가족이 간 경우도 있었어요.
군함처럼 생겼다고 군함도라고 불린다고 하던데요. 실제로 가보면 어떤가요?
섬 전체가 콘크리트 옹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바다 위에 만든 해저 탄광 시설입니다. 초기에는 지금 현재 크기의 3분의 1이었는데 1810년에 석탄이 발견되자 미쓰비시 기업이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주변 지역을 지속적으로 매립했고, 인공 섬이 탄생한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 동원되어 지옥 같은 삶을 살았어요. 거길 가면요,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소름이 끼쳐요. 기운 자체가 싸해요. 동굴에
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이 온몸에 느껴지죠. 나가사키에는 원폭이 떨어졌죠.
거기도 원래 군사지역이에요. 나가사키 하면 군함도가 떠오를 수밖에 없어요. 대표적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이 이루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 한수산 선생의 까마귀라는 작품의 주 무대가 군함도입니다.
마루끼라는 부부 화가가 그 작업을 하면서 알려졌는데 까만 먹에 빨간 색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같은 사람인데 차별을 뒀대요. 기모노나 일본식 옷을 입고 있으면 다 치료를 해 주는데 흰 저고리를 입은 사람은 치료를 안 해 줬어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007영화에 무대 배경으로 군함도가 나오면서였어요.일본은 2015년 7월에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까지 했죠. 도대체 무엇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남기려는 거였을까요?
문화가 결국은 돈과 자본을 끌어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강제 징용되었다는 사실은 절대 인정 안 하죠. 섬 자체가 아니고 섬을 둘러싼 성곽. 그것을 문화유산으로 하겠다는 거예요. 189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문화적 가치가 있지만 강제 연행된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아요.
많은 증거들이 밝혀졌죠?
오카마사하루라는 목사님에 의해 많이 밝혀졌어요. 사망 사고에 대한 서류도 다 남아 있고요. 홀로코스트가 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지 아세요? 세계문화유산이 되려면 가치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들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밝히고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말자고 반성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일본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조선 사람 연행되고, 인권이 유린되었고, 학살되었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근대화의 밑돌이 되었다는 것으로만 업적을 남기려는 거죠.
작가님은 어떻게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고, 사진에 담기 시작하셨나요?
대구의 경산 코발트 광산이 있어요. 그곳에서도 3,500명이 집단 학살당했어요.그때 사진 촬영을 위해 굴속에 장화를 신고 들어갔는데 뭔가 밟았다는 것을 느꼈어요. 돌인가 했는데 사람의 대퇴부였어요.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한동안 너무 많이 시달렸어요.
제 작업의 모든 중심은 사람입니다. 1996년부터 시작해서 21년째 이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현장의 소리, 느낌을 사진과 함께 담았어요. 사진에 담고 싶지만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나는 일본에 가면 기차를 못 탑니다. 철도 침목하나가 조선인 한명이라는 말 아시나요? 그만큼 많은 조선 사람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겁니다. 일본 촬영을 가서 만난 배동록(강제 징용2세) 선생에게 여쭸어요. 자료에 의하면 150만 명 정도가 일본에 끌려갔다고 한다고 하니, 웃으시더군요. 당신 여기 올 때 무엇을 타고 왔냐고 물으셨어요. 그분 말씀이 기찻길 중간 중간에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이라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도저히 사진에 담겨지지 않아요.
군함도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어요. 주로 어떤 작업들을 하셨죠?
처음에 무대 뒤편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어요. 임금의 분장을 하고 라면을 먹거나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들을 통해 사람의 본성, 본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을 잡아내고 싶었어요. 그 작업이 끝나고 혼혈인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 혼혈인협회 회장이 윤수일 씨였는데, 그때 이 땅에 왜 혼혈인이 생겨났는가 생각하게 되었죠.
그리고 석사 논문을 근대 건축물에 대해 썼죠.
다양한 작업들을 하셨네요. 그런데, 근대 건축물이라는 주제는 조금 생소한데요?
여기서도 일본에서 조선을 뼛속 깊이 아주 치밀하게 지배하려고 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일본의 어느 거리를 걷는데 마치 우리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더군요.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일본을 걷는 느낌도 더욱 강렬했고요.
조선 땅에, 그리고 일본 땅에 조선인의 피와 땀이 서려있지 않은 곳이 어느 한 구석도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아픈 식민지 역사가 지금에 와서까지도 그대로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감추려는 역사, 그리고 우리가 제대로 지키지 못한 역사입니다.
군함도뿐만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일본에 끌려가서 혹사당하고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역사가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이죠.
길 위에 모든 역사가 있습니다. 혼혈인을 따라가니 한국전쟁을 만나고,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갔어요. 강제징용의 처참한 역사가 있던 현장들을 찾기 위해 후쿠오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사카, 오키나와 지역을 갔죠. 오랜 세월에 걸쳐 민족의 비극을 마주하게 되었어요. 그 길 위에 서서 쓰라린 역사를 만난 거죠. 군부대, 동굴, 댐, 탄광, 터널, 비행장 등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피를 토하며 일했던 곳이었어요.
그때 끌려간 조선인들이 인간으로서 주어진 최소한의 권리조차 빼앗긴 채 그렇게 죽음이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노동에 시달렸고, 일본에서는 그것을 침묵하고 있는 거군요.
많은 노동자들이 끌려갔어요.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죽어갔고요. 일하다가 악독한 일본인 감독에게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고,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주저앉으면 그대로 생매장시키기도 했어요. 해저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180여 명이 침수 사고로 인해 생매장되기도 했어요. 그중 조선인이 130여 명이었어요. 지금까지도 아무런 배상이 없고 유해 발굴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어요.나는 그곳에 가면 다 보여요. 석탄을 캐내고 있는 조선인이.도망칠 수도 없어요. 강을 따라 가면 바다가 나올 것이고 바다에 가면 조선으로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러다 붙잡혀서 매 맞고,고문당하고, 죽어가기도 했어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감시를 피해 묻어주고 표석으로 돌을 땅에 박아 보타이시 묘지가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그렇게 묘지에 묻힌 조선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리고 방관했던 역사적 진실을 향해 걸어오신 작가님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듣고 이제라도 가려진 진실을 찾아나가면 좋겠습니다. 평화기행도 직접 해설하고 계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현장에 가 보면 백번 말로 듣는 것보다 큰 울림이 있습니다. 제가 왜 기차를 탈 수 없는지, 바다를 그저 바다로 바라볼 수 없는지 저와 똑같이 느낄 수 있거든요. 지금 류승완 감독이나 무한도전에서 ‘군함도’를 다뤄준 것은 아주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군함도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 일본의 어느 거리를 보아도 조선인의 뼈아픈 흔적은 있습니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화,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기억할 수 있는 박물관들도 있습니다. 오카마 사하루 평화 자료관,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죠. 또 쿠레의 2단 동굴터널, 야스노 발전소, 타치소 지하터널, 야하타 제철소를 비롯해서 일본
이 산업화와 발전을 이룩한 것은 조선인 강제 연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군함도는 시작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아픈 역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갖고 표현해야 합니다. 결국은 오래 기억하는 사람만이 역사를 바로 세울수 있습니다.
이재갑 작가는 곧 새로운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군함도와 함께 조선인 강제연행의 진실된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20년 간 조선인 강제 연행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 또 그를 도왔던 일본인들은 국가적, 이념적 갈등을 넘어 오직 평화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왔다.최근 그는 ‘포피엔스’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반인들과 함께 사진을 공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역사 다큐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다. 앞으로 포피엔스를 통해 기억에서 사라진 역사를 마주하고 새로운 기억으로 되살리는 다양한 시도를 할 계획이다.
오랜 시간을 이야기했다. 지면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작가의 사진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진실만을 말하고 싶다.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청춘들이 있었다. 나라를 잃고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잃어야 했다.
이재갑 작가는 결코 혼자 걸어오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아도 그의 셔터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사진을 찍는 이유일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그렇게 빛을 움켜쥐게 되는 순간이었다.
<취재·글 : 신채원_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 사진 : 정찬웅>
이재갑_
사진가.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순수사진을 전공, 졸업. 니콘이 공식 후원하는 리더스 클럽 멤버로 활동 중이고 NGPA(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아카데미)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사진을 가르치고있다. 2002년 하남국제사진페스티발 국제청년작가전을 시작으로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으로 <눈. 밖에. 나다>, 2004년 MOMA PS 1 Contemporary Art Center 미국현대미술관 별관 <영속하는 순간들 – 한국과 오키나와 그 내부에서의 시선들>, 2007년 예술의전당, 2008년 대구사진비엔날레, 2010년 대구문화예술회관, 2011년 고은사진미술관, 2011년 인사 아트 센트,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고, 동강사진박물관, 일민미술관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15년 수림사진문화상 수상
군함도는 시작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아픈 역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갖고 표현해야 합니다.
결국은 오래 기억하는 사람만이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