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1920년의 개벽, 그리고 2017년 다시 개벽

– 『개벽연구』의 저자 최수일

1920년 6월, 『개벽』지가 창간을 했다. 그시절의 개벽은 손에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지식인임을 인증하는 잇아이템이었다. 개벽신문 7월호에서는 개벽 창간 94주년을 맞이하여 『개벽연구』(소명출판)의 저자 최수일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수 개월동안 연락을 취했고 일정을 조율하다가 극적인 만남은 성사되었다. 서로 얼굴을 알지 못했기에 바로 옆을 우연히 스쳐간 날도 있었다.
1920년대의 『개벽』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치 과거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기대가 컸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부끄러워서 자꾸만 작아지기도 하였다.

신채원 : 반갑습니다. 우선 감사의 인사를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벽신문은 1920년
에 창간한 『개벽』지의 정신을 계승하는 신문입니다. 『개벽』의 가치를 발견해주시고 연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수일 : 『개벽』에 빚이 있었는데 갚을 기회가 생긴 듯해 다행입니다.

신채원 : 선생님께서 연구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출간된 『개벽연구』 책을 보았습니다.2008년에 나온 책에 10년 간 개벽연구와 함께 하셨다고 하셨는데, 다시 10년 가까이 지났네요. 개벽을 연구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최수일 : 상허학회의 ‘개벽 읽기 모임’에 나간 것이 1999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때가 막 우리나라의 매체, 그리고 문화제도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초창기였습니다.사람들이 매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고 그때 영인해서 읽자고 한 게 개벽이었어요. 그 계기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의 미디어의 중심이자 시대의 총아였던 잡지 개벽은 한국 근대지성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신채원 : 1920년 6월에 개벽이 창간을 합니다. 그 시기는 3·1운동 직후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입니다. 시기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최수일 : 개벽은 1920년 6월에 창간되어 1926년 8월 강제 폐간되기까지 통권 72호가발행되었어요. 우리가 개벽이라는 매체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개벽사, 그리고 천도교를이야기해야 합니다. 당시 개벽이 표방한 모토가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의 사회개조론과 맞물리면서 서로 삼투하는 과정을 보여줘요. 개벽이라는 잡지는 그런 혁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사가 이렇게 나가면 안 된다는 반향이 있었고 그게 개조론이었어요. 그런 컨셉이 잡혀있는 동시에 민족적 현실을 돌파해야한다는움직임이 1919년에 분출된 바 있었지만 그 길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몰랐어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뭔가 새롭게 하는 것, 세상도 바꿔야하고 정신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었어요.

신채원 : 그 중심에 천도교와 개벽사가 큰 역할을 하죠. 당시의 웬만한 지식인들은 거의 천도교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수일 : 그렇습니다. 천도교가 모든 민중을 아우르는 존재였고 중심언론기관이 개벽사였어요. 그들이 장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포부의 아우라가 농민, 신여성,어린이 등의 잡지들, 계층별로 미디어를 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천도교라는 종교적인 의식들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어요.

신채원 : 1920년대에 꿈꿨던 개벽은 어떤 의미였을까요?최수일 : 종교적 차원에서는 천도교에서 지적분자, 천도교리를 근대화한 사람들이 있었고 정신세계로서는 천도교라는 것이 현실맥락에서 근대로 진입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개벽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그런 감각을 알았던 사람들이었어요. 후천개벽의 사상을 당위성으로 그런 감각 속에서 개벽을 창간하고 창간호의 첫 기사가 “세계를 알라”였어요. 우리가 개벽을 해야한다는 것, 구체적으로 정신개벽, 사회개벽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죠.

신채원 : 그 당시의 개벽이 시대의 요구이자 민중들을 계몽하는 수단이 되었겠네요.

최수일 : 민족적 절박함이었어요. 여전히 가슴 속에서 둥둥 북이 울리는 것이죠. 그런상태에 있는데 일개 종교라고 생각했던 당대에 가장 많은 신도를 포섭했던 천도교가 우리 마음에 꼭 드는 말을 했다는 거죠. 세계를 알고 다 바꿔나가자는 거죠. 독립도 그 과정이라고 설득했죠. 세계의 신진 기사와 사상을 알리는 거죠. 우리가 발맞춰 가고 있다고 지적분자들에게 공인을 받았던 겁니다. 아래로부터 공인받은 것 같지는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읽기 어려웠을 겁니다. 한자로 된 작품들도 많았거든요.

신채원 : 개벽의 유통망에 대한 연구를 구체적으로 하셨더군요. 개벽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구독했나요?

최수일 : 지성사에서 20년대 30년대까지는 개벽사를 빼 놓을 수 없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개벽지는 다양한 지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지식의 장으로서 지식인들이 인정했던 매체입니다. 그들이 개벽을 설파하고 널리 알려서 지명도를 계속 얻어갔어요. 물론 초기에는 천도교 본당, 교구 중심이었는데 뒤로 가면 갈수록 대중적인 친화력이 높아졌어요. 논조가 점점 강화되고 유지되었죠.일종의 문화권력을 획득한 거였어요.

신채원 : 발행부수도 꽤 많았죠?

최수일 : 당시에 발행되던 매체들의 출판부수가 1천부에서 2천부였어요. 오늘날도 2천부는 많은 부수입니다. 개벽은 평균 8천부를 찍어냈습니다. 순수하게 독자 손에 들어간 것이 6~7천부 정도였고 찍은 부수는 8천부, 기념호 같은 경우는 1만부쯤 되었어요. 한 사람이 읽고 300여 명에게 강독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최소한 8천부를 찍었으니 가산치를 두고 1만 명이라고 한다면 최소 수 만명이 개벽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또 손에 들고 다녀야 지식인 행사를 할 수 있었을 정도였어요. 아쉬운 점은 일정 정도의 궤도에 오르면 열기가 소진될 때까지 유지하는데 그러기에 개벽의 수명이 너무 짧았어요.

신채원 : 검열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습니다. 검열 도장이 찍힌 사진들을 보니 숨을 멈추고 보게 됩니다.

최수일 : 책에 실린 과거 개벽지 사진들은 제가 찍은 거에요. 사진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사진을 잘 못 찍었지만. 실제로 보면 정말 실감이 나요. 당대의 느낌과 흔적들, 검열도장들이 찍힌 흔적들을 보면 섬뜩하기도 하고 그런 가슴 아픈 역사가 피부에 와 닿죠.
당시에 개벽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했을까, 생각이 들어요. 항상 검열에 대한 불안감들을 달고 살았을 것 같아요. 연구를 하면서 검열의 주체들은 체계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생각보다 굉장히 철저했고요. 1925년 총독부 도서과의 검열 시스템이 생기고 고도화되면서 검열의 결제도장들이 찍히죠. 자료를 보면 검열을 단순히 한두 명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일제의 통치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해방이 되지 않았더라면 벗어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살 떨릴 때가 있어요.

신채원 : 그 당시의 검열 시스템이 철저했는데, 상대적으로 개벽은 자료화 되어있는 게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수일 : 개벽은 신문지법으로 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조항을 뒀어요. 신문지법은 모두 신문처럼 발행되기 때문에 기사의 제한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잡지는 정치, 사회 면이 허가가 되지 않았어요. 자료들을 살펴보면 인쇄일과 출판일에 보름정도 차이가 있어요. 검열 때문이었죠 신고는 그렇게 해 놓고 실제로는 책을 만들었어요. 이건 신문지법으로 만든 책이기 때문에 조판이 되어 있는 상태였을 거예요. 검열 넣기 전에 책을 먼저 찍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미리 풀었을 거고요. 19호인가 20호에 미리 발송해버린 일이 있어요. 그래서 인쇄소에 순사를 붙였다고 해요. 제본부터 다 감시를 했어요.점점 어려워졌죠. 그런데 기자님이 질문하신 것처럼 개벽은 본호가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보통 2천부를 찍으면 도서과 관청에 2부를 넣어야하니까 그 상태에서 아직 발행만 안했을 뿐 책은 다 만들어진 상태였을 거예요. 감시의 눈길을 피해서 그냥 몇 부 가져가는 거죠. 대량발송은 못했지만 몇 권 씩 빼돌릴 수있는 여지가 충분했다는 겁니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전문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것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검열에 걸린 판본이거나 삭제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남아 있던 부수들, 그런 걸 다 찾아낼 수 있다면 검열의 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어요. 도서과에서 독립해서 독자적인 검열 시스템에 미디어가 어떻게 대응했고 거기에 개벽사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30년대까지 가능합니다. 개벽은 그렇게 28~29호까지 가서 정상적인 신문지 법에 의해 발행이 됩니다. 이후 성격도 급격히 사회 현실에 참여하면서 사상적으로도치열해지고요. 개벽은 참 특이한 잡지입니다.

신채원 : 말씀 들으니 94년 전의 개벽을 찍어내던 사람들의 심정이 와 닿는 것 같아서 가슴이 미어져 옵니다. 이 분들이 다들 빼앗긴 나라를 위해, 민중들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이 책들을 남긴 거잖아요.

최수일 : 당시 개벽사에서 발행하던 미디어가 많습니다. 신여성, 어린이, 별건곤등이었어요. 당시 조선의 모든 민중들을 통폐합 하는 기관이 되겠다고 포부를 가졌던 개벽사였어요. 보통 자존심이 아니었어요. 물론 천도교의 엄청난 자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전체예산에 꽤 많은 비중이었어요.『천도교 청년회80년사』 책에도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사람들은 천도교 기관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철저하게 종교적인 틀에 머물지 않았던 잡지였어요.

신채원 : 개벽지의 유통망에 대해서 연구를 하셨어요. 여기에도 엄청난 배경들이 눈길을 끌던데요.

최수일 : 개벽의 출판유통에 관여했던 인물들의 명단이 있어요. 제가 그걸 찾아서 엑셀파일에 입력하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어요. 수백 명 되는 명단을 만들었는데, 개벽이 52개, 62개 지사 지국을 만들고 사람을 파견합니다, 그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는 문학도라서 독립운동사를 잘 모르는데, 사학과 사람들이 이름만 보면 아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는 거예요. 이 명단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검색을 해 보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굵직한 인물들이 막 터지는 거예요. 국내 인명사전에 그 분들의 이름들이 다 나오더군요. 정말 놀랍고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1925년 1월이 55호 발행 월인데 대일선전포고처럼 조선에 있는 모든 동지들에게 선언하듯이 일종의 격문을 발표합니다. ‘지사, 지국을 더 확대하겠다, 파견을 보낸다.’ 하고요. 당시 조선 기초조사사업이라고 각 도호를 냅니다. 각 도와 그 지역 인물을 소개하고요. 그때 특파 기자들이가서 인적 소통망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밑에서 사람 사이를 엮었고 지사, 지
국이 그런 일을 했을 겁니다. 개벽 55호에 떵떵거리듯이 그런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큰 그림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개벽사에서 굉장한 행사들을 많이 주관합니다. 공산당과 관련된 큰 조직대회도 하고 개벽사라는 미디어의 공신력을 가지고 각 지역에 있던 유지와 인사를 엮어주기도 했고요. 목숨을 걸고 자주독립을 위해서 또 민중들이 깨어나도록 온 힘을 다해 그렇게 투쟁하듯 개벽지를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신채원 : 개벽신문 6월호 맨 뒷면에 창간호 사진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이 창간호 사진이 실제로 발행된 창간호의 표지가 아니라고 하셨죠?

최수일 : 천도교 청년회 80년사에도 창간호 사진이 있더군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창간호는 당시 실제 발행했던 창간호가 아니고 개벽 1주년 기념호의 표지입니다. 13호가 되겠군요. 창간호 표지를 압수당합니다. 창간호 교합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세종대에 있습니다. 영인업자가 표지 없는 창간호에 13호에 있는 사진을 오려 붙인 거예요. 제가 직접 세종대에 가서 확인했는데 표지 제호와 서체가 다르더군요. 개벽 창간호의 표지 사진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동아일보에 나온 사진이 있고, 천도교청년회 80년사에 개벽 창간호 사진이 있었어요. 그 책을 만드신 분들께 확인했는데 그 분들도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어떻게 확인했냐면, 창간호의 개벽 글자는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개벽창간 기사와 천도교 청년회 80년사에 나온 사진과 정확히 일치하더군요. 그런데 서체와 구름의 위치를 보면 서체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창간호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없어서 영인업자가 여기저기 믹스해서 만든 거예요. 판본들이 다 달라요. 만약에 그런 것부터 다 개벽의 전모에 대한 것들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면 정말 흥미롭게 보지 않을까요?

신채원 : 할 일이 참 많아지는군요.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새로운 사실들도 확인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졌던 작품 「Trick」 전문을 찾아냈습니다.

최수일 : 개벽의 원본을 학인하는 작업들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영인되지 않은 판본들을 확인했어요. 제목만 남아 있거나 필자만 남아있거나 ‘삭제기사’들의목록들을 추적하고 퍼즐을 맞추듯이 샅샅이 자료를 찾았죠. 그렇게 63호에 실렸던 김기진의 작품 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일제의 검열로 사라졌어요. 전면삭제 되었죠. 작품의 전문을 확인했고 학계에 보고했습니다.

신채원 :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서 조선인들은 ‘야만인’이라는 표현에 전면적으로 맞서는, 그리고 일제의 동화정책의 비겁한 ‘속임수’라는 뜻의 , 그리고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전면삭제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 한다고 하셨네요.

최수일 : 그 당시 개벽에 실렸던 작품들은 한국 문학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봐도 문화제도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잡지입니다. 검열의 과정을 다 보여주는 미디어가 없거든요. 1930년대 넘어가면 이게 검열에 걸렸는지도 확인할 수 없어요.

신채원 :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이나 기자들도 굉장히 현실적인 갈등 속에서 원고를 쓰고 책을 만들었을 것 같아요.

최수일 : 문제 잡지였으니까요. 제호 ‘개벽’이라는 말은 아주 변혁적으로 쓰인 말입니다. 또 여기서 우리가 알고 가야 할 점은 여기사 글들을 보면 공통필명을 쓴 케이스도 있고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필명으로 쓴 케이스도 있었다는 겁니다. 시대적인 갈등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개벽이 문화권력이었고, 시대의 총아였을 때 분열적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천도교에서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보면 천도교에 가장 큰 힘을 줘야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신채원 : 지금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민중들, 또 지식인들에게 개벽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 것 같아요. 지금으로 치면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거잖아요.

최수일 : 그 파급효과는 지금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청년모임에서 공동 구매를 해서 윤독, 다시 말해 돌려 읽었죠. 또 문맹이 많은 곳에서는 누군가 강독을 해줬어요. 이런 미디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맥락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데 지식분자들이 세계사와 흐름하고 이 잡지를 천도교 주관지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참 중요했어요.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 거기에 공감했다는 것. 전후의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 다양한 개조론이 있었죠. 평화주의,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는 그 중에 하나였어요.

신채원 : 그렇게 한국 문화제도사 나아가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개벽지가 1926년에 폐간을 합니다. 개벽의 폐간으로 당시 미디어들은 많은 혼란과 정체를 겪었죠?

최수일 : 개벽의 마지막 호 같은 경우는 총독부에서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 정도로 개벽은 눈엣가시였어요. 개벽은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을 표방하고 신문지법으로 낸 첫 번째 잡지였어요. 이걸 통해서 자기들의 정책을 홍보해야하는데 스스로 부정하고 날린 거였어요.개벽은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거든요. 그런데 개벽이 폐간되고 회복하지 못했어요. 3.1운동의 여진이 남아있는 1920년대와 1930년대는 달라졌어요. 본격적인근대소비사회로 가는 출발이었죠. 기호들도 이전과는 다른 인간들이 출현하는
거예요. 독립이 될 줄 몰랐거든요.

신채원 :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로부터 억압된 역사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개벽지를 만들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그렇게 지키지 못한 개벽을 세월이 이만큼 흘렀지만 그 개벽이라는 그 이름을 잘 지켜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개벽을 연구하시면서 느꼈던 이후의 과제들에 대해서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수일 : 개벽지가 영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판본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전국에 많이 숨어 있을 겁니다. 1920년대의 개벽의 정신을 이어받는 개벽신문 차원에서 캠페인 같은 것을 할 것을 권합니다. 개벽이 문화사에 중요한 잡지니까 개벽박물관 정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엄청난 문화적 자산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이어 받아야 할 과제가 클 겁니다.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맥락들도 많고요. 이런 실증중심적인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을 토대로 쌓이는 강점도 있지만 이젠 저걸 넘으려면 저걸 다 봐야한다는 공포가 생기기도 합니다.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이 책이 나왔을 때 동학들이 이제 개벽은 아무도 안하려고 할 거라고 했어요. 그러나 저는 한 편으로 기대합니다. 누군가 개벽을 만들었던 사람들, 또 개벽을 전국으로 펼쳐내던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풀어 낸다면 지성사를 이끌었던 사람들의 밑그림을 다 그려낼 수 있을 겁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글쓴이의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한때 개벽신문의 제호와 관련하여 유지할 것인가, 변경할 것인가를 논의한 적이 있다. 그 어떤 이름도 그 말을 대신할 말이 있을까?나는 개벽신문에 글을 쓴다. 97년 전, 검열에 마음 졸이며 인쇄기를 돌렸을 그 시절 ‘개벽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최수일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연구교수. 저서 및 글 ‘『개벽』유통망의 현황과 담당층’, ‘『개벽』에 대한서지적 고찰’, ‘근대문학의 재생산 회로와 검열’,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 ‘한국 근대문학재생산제도 자료집’ 등이 있다.

검열 도장이 찍힌 『개벽』.
일제의 검열시스템은 점점 고도화되었고 체계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접근했
다. 신문지법은 모두 신문처럼 발행되기 때문에 기사의 제한이 없었으나 개
벽은 예외였다. 사진은 아단문고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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