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다

– 일본의 양심, 나카츠카 아키라 선생

12년 째 한일시민교류에 함께하고 있는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역사학자 나카츠카 아키라 선생을 만났다. 선생의 4박5일간 일정을 지켜보면서 선생이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했다. 글쓴이는 일본어를 전혀 몰랐기때문에 선생의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표정으로 마음을 읽어야 했다. 오히려 일본어를 알지 못해서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의 물결들이 출렁였다.

올해도 먼 길을 오셨습니다. 4박 5일의 촘촘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데, 건강이 어떠신지요?

그런대로 괜찮은데 내 나이가 내년에는 90세가 되기 때문에 아주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0년 넘게 한일교류를 진행하고 있고 매년 선생님께서 어렵게 이 행사에 참여하고 계시는데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와 지금은 느낌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올해도 이 행사에 참여하시는 소감과 올해 교류를 통해 기대하시는 점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12년간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다녀 온 김제, 원평 동학 전적지에서 한국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바르게 지키려고 하는가를 실감했습니다. 12년간 한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특히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가자 명예회복특별법이 성립된 것을 계기로 구체적 실천들이 전국 각지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 작년에 나라현에서 참가한 분 중에 일본의 식민지시대 치안유지법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분이 있는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답사를 통해 많은 용기를 얻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조선과의 관계를 빼놓고서는 일본의 근대를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인식 부재의 핵심이 한반도 문제인데, 한반도 근대사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해 역사학자로서의 책임감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동감을 표합니다. 현재 일본사회에서 과거 조선을 침략한 것을 이해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1945년 일본이 패전했을 때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데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1945년 이전, 일본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천황의 이름으로 한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천황의 이름으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것이 전쟁 책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연결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작년에 아베수상이 종전 70년 담화를 발표하면서 “러일전쟁은 아시아 해방 전쟁”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매스컴에서는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했지만 일본은 조선의 왕궁을 점령했고,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일본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스스로 역사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 일본 근대사의 틀을 바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은폐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에 대한 무지, 침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역사 교육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 역사 교육자 협의회 등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910년, 일본에서는 병합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 그 당시 역사학자들이 모두 찬성했다고 합니다. 원래 우리의 영토를 되찾은 것이라고요. 그 문제를 그 당시에, 그리고 1945년 패전 때 근본적으로 반성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와세다 대학의 재일동포 이성시 교수가 문제제기를 했지만 진작 그런 문제제기와 반성이 있어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야마베 겐타로, 박경식, 강덕상 등 학자분들이 열심히 연구를 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재일동포 학자들의 노력이 일본 전체 근대사에 대한 나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 전체에 역사의식을 바꾸지 못한 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동안 일본에 알려진 한국에 관련된 내용들은 나라를 빼앗겼을 때 한국 사람들이 무기력하고 무능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학농민군도 몇 백만이 봉기를 했지요. 이런 정확한 사실을 널리 지속적으로 알리는 것이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이고 역사의 틀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한일시민교류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2년 간 300명 정도 이 교류에 참여했습니다. 작다면 작은 일이었지만 한일공동동학기행을 통해 일본인에게 진실과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는 일에 어느 정도 충실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고 특히 일본인들이 한국 현지에 와서 과거 자신들의 선조들이 조선 땅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사실을 인식하는 일들이 역사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동학사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지고 동학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청일전쟁과 동학을 연구하시면서 동학의 어떤 부분이 선생님께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 궁금합니다.

12년간의 답사를 통해 동학이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존재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사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동학의 정신이 널리 확산되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며 그와 함께 동학에서 추구하려는 정신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다양한 움직임들과 함께 결합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은 단일민족이니 꼭 통일을 이뤄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예를 들어 원광대학교 원불교 사상연구원은 근대 한국종교의 공공성의 재구축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공공성이라고 하는 구체적 분야가 평화운동, 평화사상 그런 연구들이 동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시민사회가 결합하여 종교가 사회 평화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미국이 우경화되고 보수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내에서도 메이지 시대에 대한 ‘향수’와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일본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1945년 제2차 대전 이후 전쟁에 반대하는 민초들의 힘이 커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지난 해 120여 개국에서 핵전쟁을 하지 말자는 금지조약이 체결되었지요. 전세계 어떤 지도자도 무시할 수 없는 시민들의 힘이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가 이상한 대통령이긴 하지만 시민의 힘으로 선출된 대통령입니다. 민초들이 트럼프의 바보 같은 행동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염려는 됩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시민사회의 힘이 커졌기 때문에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일본사회를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이번 선거에서도 아베가 압승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의 힘을 믿고 기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1945년 이전의 일본은 천황의 전제적 지배 속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시대를 보냈습니다. 1945년 이후 전후 70년이 흘렀습니다. 그 시기는 일본인들이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권리를 인정받고 그 권리 인정 속에서 건강한 판단의 역량을 길러왔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국력을 확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전쟁을 통해나라의 국력을 확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일본 국민들 하나하나에게 부여된 권리를 통해 사회를 바꾸고, 양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주체를 길러온 것입니다. 세계전체가 그런 전쟁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아시아의 상황이 100년 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베가 정권을 잡았다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힘이 대단히컸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동학에 관심을 갖은 연구자들이 열심히 연구를 해 왔는데 1995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동학농민군의 두개골이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공동연구를 해 왔는데요, 한일 공동동학연구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군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으로 건너 와서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 연구가 1995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유골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홋카이도 대학의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님이 동학농민군 탄압 전담 부대인 후비보병 19대대 병사들의 출신지였던 4개의 현을 일일이 조사했고 그 부대 병사의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올 연말에 병사의 일기가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인문학보를 통해 전문 공개될 예정입니다. 그 일기가 전면적으로 공개되면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변화에 당장 어떤 영향을 줄지 예측할 수 없지만 대단히 영향이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본군이 중국에 가서 중국인을 학살한 기록도 있지만 그런 기록들은 단편적인 것에 비해 후비보병 19대대 병사의 일기는 작전 전체의 전모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 중에 같은 자료를 찾아 볼 수 없고요. 이 사료가 공개되는 것은 일본사 연구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아가 일본인 전체의 역사인식을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합니다.

선생님의 책에서도 읽었고, 지금 통역을 하고 계신 박맹수 선생을 통해 홋카이도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유골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었습니다. 작년 진도에서 열린 심포지엄 ‘전쟁의 바다에서 평화의 바다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일 학자들의 공동연구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성과가 나오게 된 것에 한걸음 더 들어가면 큰 역사적 변화, 결과로서 이런 성과가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면 1995년 당시, 동학농민군의 유골이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에서 발견되었는데, 만약에 동경대학 문학부에서 발견되었다면 어땠을까요? 동경대학 문학부는 제국주의 시대에 설립된 관료적인 대학입니다. 반면 홋카이도 대학은 1945년 이후에 설립되었습니다.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없었고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와 같은 양심적이고 진보적 교수를 영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일본사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성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홋카이도 대학은 아이누 해방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부락차별 철폐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배경을 든다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민주화와 관련된 한국사회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제대로 된 역사연구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학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양국 간에 그런 역사적 배경에 있던 학자들이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
주 커다란 시야에서 본다면 역사가 움직여가고 있다는 점에서 뭔가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커다란 흐름 안에서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년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연구하고 이 주제의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식 참여를 위해 도쿄에 다녀왔습니다. 최근 고이케유리코 도지사의 추도사 거부와 조선인 학살 사건을 부정하는 발언이 있었고 저는 소요가제의 반대집회를 직접 보고 왔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일본은 염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무지한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번 아소 부수상의 북한 난민들이 무기를 가지고 일본으로 흘러들어올지 모른다는 발언이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 국민을 선동해서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처럼 확산시킬 수 없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옛날과 다릅니다. 세계가 지구촌으로 되어 있고 많은 국내외 기자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설령 그런 일을 저지른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되면 일본은 전세계적으로 고립될 것입니다. 세계사적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할 겁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런 현상들은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빈곤에서 오는 것인데. 역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고 역사를 모르는 일본인들의 빈곤의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시모토 오사카도지사가 “종군위안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있던 일이다,” 등의 발언이 있었는데, 미국정부도 이 발언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말이 일본 안에서 통할지 모르겠지만, 세계적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일본은 세계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의 예를 들어 보면, 가와사키 시에서는 헤이트 스피치가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로 볼 때, 결국 진실을 대면하는 쪽으로 바뀔 겁니다.

12년간 진행한 한일시민교류가 일본과 한국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줬습니다. 이 행사가 지속될수 있는 전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체력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올해 마무리해야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년간 300명 이상이 이 기행에 함께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이 여행의 의미를 이해하고 계속되기를 염원하는 분들이 꽤 있기 때문에 그분들과 함께 후지국제여행사의 기획, 그리고 시민사회의 협력에의해 계속되지 않겠나 하는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 온다고 단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음세대 역사연구자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역사연구는 역사가 자신이 속한 사회, 나라, 국민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연구하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 역사 연구를 하면 취직이 안 된다는 문제를 넘어 스스로 한사람, 한사람이 자주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역사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바꿀 수 없다는 자각을 하는 일본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 이 기행에 참가하시는 분들 가운데 작년부터 일본 근대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본인 스스로 자주적으로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다면 일본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자각의 구체적 증거라고 봅니다. 그런 자각이 역사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자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것으로 봅니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또 하나의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이라는 책을 출간해주신 우메다 마사미 씨가『일본 내셔널리즘 역사』라는 300페이지 이상의 책 4권을 냈습니다. 일본인 스스로 자각해서 변혁하자는 내용의 책입니다. 역사 연구자는 개인의 차원이 아닌 본인이 속한 사회 전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관심과 자각은 역사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연구는 사회적 운동
의 한 차원으로 커다란 시야에서 보아야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첫눈은 언제나 첫눈,
많고 많은 첫눈을 맞이한 당신이 저기 걸어갑니다. 당신이 남긴 발자국이 그렇게사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길을 우직하게 걸어왔을지 알 것 같습니다. 때로 얼음장 위를 걷는 순간처럼 한발을 내 딛는 것조차 두려움이었다는 것도 알 것 같습니다.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봄이 된 당신은 빛이며 생명이며 사랑이었습니다. 흰 눈이 쌓인 언덕길을 넘어가는 당신, 찍힌 발자국에 가만히 발을 대 봅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선생이 기행 첫날 경복궁에서 선생의 책을 준비해 온 참가자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다 기행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카츠카 선생을 환영하기 위해 오신 채현국 선생

나카츠카 아키라
1929년생. 교토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 나라여자대학 교수(1963~1993). 현재 나라여자대학명예교수, 일본학술회의 회원, 나라현 역사교육자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청일전쟁 연구를 계기로 지금까지 근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천착해온 지한파(知韓派) 학자이자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대하여 철저히 그 책임을 추궁해온 일본의 양심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한 사람이다. 2014년 제7회 녹두대상 수상한 바 있다.
다수의 저서 중 국내 번역된 책으로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일본의 양심이 보는 현대일본의 역사인식』, 『동학농민전쟁과 일본』(공저) 등이 있다.

취재·글 | 신채원 / 통역 | 조성환 / 사진 | 정찬웅
모든 종교는 평화를 말해야 합니다
– 기타지마 기신 선생과 함께
반갑습니다. 작년에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행사에 언제부터 참여하셨나요?
올해로 세 번째 참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잘 몰랐
는데 세 번째 참가해보니까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삼례에서 여성이 그
려진 기념비를 보고 동학사상에 대해 뚜렷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정부를 맞이하고 최근 들어 동학을 시민사회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사례들
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의 시민운동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던 1894년으로부터 약 20여년 전에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
건이 일어났습니다. 정토진종이라는 카마쿠라 시대에 시작된 가장 큰 불교로,
신자들은 대부분의 농민들이었는데, 메이지정부의 신도(神道)를 축으로 한 폐불
훼석(廢佛毁釋) 정책에 반대하는 봉기(1871-73)를 일으켰습니다. 이 봉기는 2년간 지
속되었고 서일본 지역의 10개 지역에서 7만 명 이상이 참가했는데, 그 후 20년 뒤
에 동학이 일어났습니다. 이 관계가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동학은 그 뒤로도 계
속되어 최근의 촛불집회에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정토진종은 그렇지 못
했습니다. 정토진종의 농민봉기는 신도(神道)를 국교로 만들려는 정부의 움직임
은 차단했지만, 결국 진압되고 실패했습니다. 한국의 동학과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 알고 싶고 동학을 통해 일본의 농민투쟁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
이 커졌습니다.
이 운동은 신도거부운동이었는데 당시 메이지 정부에서 신도를 국교화하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발이었고 정부에서 세금을 올리는 것에도 반발이 일어
났습니다. 이 운동이 쇠퇴한 이유는 당시 일본이 제국주의로 가려는 흐름이 커
졌는데 그와 동시에 저항운동도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반비례 한 것이죠. 이
번에 답사하면서 일본의 농민봉기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어떨까, 그러면 메이지
시대 근대로부터 무엇이 보일까, 이런 마음이 커졌고, 지금의 역사, 오늘의 일본
과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정토진
종의 승려라서 연구와 삶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동학은 국가주의를 넘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한일 미래
관계에서 동학이 할 역할이 있을 것 같은데요, 종교인이기도 하신데, 이 시대 동학은 어떤 의미
가 있을까요?
동학은 제가 생각하기에 유럽식 근대화와는 다른 형태의 근대화 운동을 아시아
에서 처음으로 일으킨 운동입니다. 서구식 근대와는 다른 근대가 있을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일본이 서구식 근대를 고집한다면 아시아의 연대는 어렵
습니다. 거기에 반해 동학은 이해하기 쉽고 제가 신앙하고 있는 정토진종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문제를 동학을 중심에
두고 거울삼아 자기를 비춰본다는 의미가 있고 지금의 민주주의, 앞으로의 정치
를 생각하는데 있어 동학은 큰 힌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물을 나
누지 않고 하나로 생각하는 평등사상, 이것은 대단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교수는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말로에서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영성적
의지의 대상으로 티벳불교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동학이 이 새로운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어
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이상의 것이 동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로 보는 생각, 비폭력, 평등, 함
께 사는 상생, 서로 돕는 상부상조 등등, 이런 것들은 서양 근대의 세계관에는 결
여되어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미래를 열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연구 분야는 아프리카인데 동학과 아주 비슷합니다. 아프리카는
‘우분투’라는 전통사상에 의해 백인들과 흑인들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었는데,
동학도 그런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비폭력, 그리고 자기와 생
각이 반대인 사람과 함께 사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우분투는 사
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구체적인 형태로 전달되고 있고, 일이
잘못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동학도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만, 가해자로서의 일본은 은폐하고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로서
의 입장을 내세우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일본은 역사수정주의적 경향이 강해져서, “식민지 지배시절에 좋
은 일을 했고 원폭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은 아시아에 사죄할 필요
가 없다”라는 우익적 생각이 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점에도 이런 책이 많
습니다. 원폭의 피해자라는 측면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야
합니다. 동학이 그런 계기를 제공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해야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복잡한 문제
들이 풀릴 수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참된 인간성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
다. 제가 군산 동국사에 다녀온 소감이 「한국사상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지난달
『개벽신문』에 실렸습니다. 동국사에는 일본이 가해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참회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1944~) 욧카이치대학(四日市大學) 명예교수는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
지파(本願寺派)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서, 정토진종 다카다파(高田派) 쇼센지(正泉寺)의 주지를 지
냈다. 오사카외국어대학(大阪外國語大學)의 인도어 학과에서 힌디어를 공부하고, 오사카시립
대학(大阪市立大學) 철학과에서 포이어바흐와 러시아 철학 및 문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동대
학원에 입학하여 아프리카 문학을 연구하였다. 2012년부터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와
학술교류를 하면서 동학을 접하게 되었고, 그 후 조성환 박사와의 학문적 교류가 계기가 되
어 비서구지역에서 영성을 기반으로 일어난 ‘토착적 근대화 운동’의 이론화 작업에 몰두하
고 있다. 7
문과 사죄문이 있었고 그 옆에는 위안부 소녀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화해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넓은 의미에서 “함께 사는” 공생을 추구하는
동학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들이 어려차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의 역할도
있었나요?
부분적으로는 여러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가령 1970년대에 이시카와현(石川
県) 스즈시(珠洲市)에 원전을 설치하려고 하자, 그 지역의 정토진종 승려와 신자들
이 반(反)원전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주민 대다수가 정토진종 신자였지요. 그 결
과 2003년 11월에는 원전건설계획을 중지시켰습니다. 이것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의 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은 서구식 근대가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예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처럼 생명을 중시한 것이지요.
2001년 무렵 고이즈미 당시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그 후 3년간 계속
해서 3차례나 참배를 계속했습니다. 이에 대해 2001년 9월에 종교인을 주축으로
재일교포, 비종교인 등 211명이 소송단을 만들어 헌법 위반이라는 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그래서 2004년에는 후쿠오카지방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수상의 참배
는 헌법위반이라는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이것은 종교를 중심으로 생명을 중시
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시민운동의 사례로 볼 수 있고, 종교인들이 20세기 초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협력한 사실들을 참회한 행동으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지만 아베총리에 반대하는 움직임, 야당이 하
나로 단결하고 시민이 중심이 된 운동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
으로는 한국처럼 운동의 규모가 크지 않고 확산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민중들이 크게 하나로 뭉쳤던 3.1운동은 기독교, 불교, 천
도교의 각 종교가 하나로 움직였습니다. 종교의 일원화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종
교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이찬수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폭력을 줄여 나가는 “감폭력(減暴力)”을 하는데 있
어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3.1운동 때에 각 종교가 하
나가 됐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일본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1969년의 야스쿠니신사 국영화법안에 대해서 많은 종교교단들의 반대로 법안이
저지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서도 많은 종교 단체로부터 반대성
명서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그런 운동에 종교인들도 참여하고 있
습니다.
종교야말로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런 의미에서는 적과도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적
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서로
상생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이 점은 특별히 종
교를 갖지 않아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고 실제로 남아프리카가 이런 식으로 아
파르트헤이트를 철폐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종교의 공통점은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서
자기를 고양시키고 더 높은 경지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의 시민들이 보여준 움직임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고 그
열망은 시민들을 광장으로 이끌어 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합
니다. 과거와 현재에 동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움직임이 일본사회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까요?
아시다시피 일본은 근대 이래로 서양식 근대화를 추진했고 그로 인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화 시켰습니다. 일종의 억압하는 자의 입장이었습니다. 반
면에 한국처럼 억압받는 자 쪽이 종교적으로는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억압하
는 자는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 종교가 그것에 저항하기가 현실적으
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힘이 약해졌습니다. 지금도 이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1960년에 안보투쟁이 있었지만 국회에 모인 인원은 33만 명이었
습니다. 한국처럼 100만 명이 모이는 집회는 불가능했습니다. 한국은 동학이라
는 유산이 흐르고 있어서 이것이 역사의 중요한 대목에서 부활하고 반복되고 있
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그렇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전쟁에 대한 자기반성 정
도가 되겠지요. 그런 점에서 동학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확장시켜서 바라볼 때, 전세계적으로 종교가 우경화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요?
맞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종교가 우경화되고 있고, 일본 역시 전체적으로 그렇습
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반대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규
모는 작지만 야스쿠니 반대운동이 그 사례입니다. 종교가 현실에 대해 피하지
않을 때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입장에 서는 사람은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종교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 있을 때 강해집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아파르트헤이트가 처음에는 종교에
의해 합리화되었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힘이 그 체제를 철폐시켰고 비
슷한 사례가 이슬람과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있었습니다. 일본도 아직은 그 힘이
작지만 과거보다는 폭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 항일운동이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작품들이 많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개벽신
문』에 소개해 주신 영화도 있었는데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제가 본 「귀향」과 「명량」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일본은 악이고 한국은 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좀 더 복잡한 문제를 그리고 있었고 정신적인 문제까지 다
루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되
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귀향」이었습니다. 「귀
향」에서는 함께 사는 공생사회, 공동체적 모습, 그리고 앞으로 한국과 일본이 어
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보여 줍니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일본 병사의
모습들이 그런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이 전쟁의 현실을 알아야 하고, 단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과 아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명량」에 그려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모습은 장군들 사이에서는 이해
관계가 대립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순신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서 하늘과 민중
이 하나로 어우러져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민중의 힘이 있
습니다. 「명량」은 모두의 힘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 병사가 이순신 밑으로 들어오는데, 이것은 싸움을 하는데 있어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과의 연대, 우리 내면의 문제
가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벽신문』을 통해 만났던 기타지마 기신 선생을 기행이 끝나던 날 밤, 서울 인사
동에서 다시 만났다. 어쩌다보니 통역에 도움을 준 조성환, 이찬수 두 분과 함께 만
났다. 말하자면 『개벽신문』의 필진 4명이 한 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글쓴이와 사진작
가는 일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개벽신문』(원고마감 여부의 공유), 동학, 종교 이
야기를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쾌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물리적인 거
리가 마음의 거리를 좁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평화를 말해야 한다
는 종교인으로서의 삶이 전달된 듯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따뜻한 인터뷰1지난 10월, 올해로 12회째 맞이하는 한일시민교류에 동행취재를 다녀왔다. 나카츠카 아키라 선생은 올해로 89세를 맞이했으며 77세 때 시작된 한일시민과 함께하는 동학기행은 양국 간에 큰 성과를 남겼다. 120여 년 전 이 땅에서 우리의 조상과 그들의 조상들이 어떤 슬픈 역사를써 나갔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시는 이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않기 위해 서로 소통해 왔다. 이 교류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은 역사적 사건의 순간을 보여주는 흔적들을 마주할 때마다 “미안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한 잘못을 사죄합니다. 우리가 일본인이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모두 이 슬픈 역사를 이어 받은 가엾은 후손들이었다.취재·글 | 신채원 / 통역 | 박맹수 / 사진 | 정찬웅4

 

인터뷰의 통역을 진행해 주신 박맹수 선생과 나카츠카 아키라 선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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