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 인권운동의 시작 최창화 목사의 딸 최선혜
따뜻한 인터뷰 1 3
취재·글 신채원 / 사진 정찬웅 / 통역 박선경
우리에게 이름이 있었어요
– 재일 인권운동의 시작 최창화 목사의 딸 최선혜
새벽을 다하여 내린 눈은 소복소복 쌓여 그대와 내가 걸어 온 길을 지웠습니다.
우리가 걸어 온 길을 찾기 위해 저기 서 있는 소나무에게말을 걸어봅니다. 그대는 그
길을 잊었다 하고, 나는 그 길을 찾겠다는 약속을 지켜야겠기에.
많은 이름들이 있다.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하기 전에 우리
는 그의 이름을 선택한다. 누구의 아들, 딸, 부모, 형제, 스승. 이렇게 많은 이름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누군가를 부른다. 또 그 이름들 중 하나로 누군가에게 불린
다.
식민지 조선에서 많은 사연들을 품고 일본으로 간 사람들. 그들은 그 땅에서
어떤 이름들로 불리었을까. 재일동포의 이름을 되찾고자 했던 인권 운동가 최창
화 목사의 삶이 딸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 11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행사장에 민족대표로 초청된
최선혜씨를 만났다. 최선혜씨는 글쓴이가 지난 9월 도쿄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식에서 만났던 터라 더욱 반가웠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난 9월 도쿄 YMCA에서 9.1집회를 주최하셨는데요, 이번에 3.1운동100
주년기념사업회에 초청되어 오셨습니다. 오신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초청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며 한국말이 서
툴러 귀중한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 못한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
에서 저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독립 운동 유공자 자손을 중요시한다는 것이었습
니다.
아버님께서 재일동포들의 인권운동을 해 오셨는데, 어린 시절부터 바라본 아버님의 삶과 활동
들을 이해하고 계셨나요?
제가 두 살 때 “김희로 사건”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1968년 일본에서 일어났던
‘김희로 사건’을 TV로 접하고 현장을 직접 찾아가 차별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
은 뒤 자신이 문제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
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운동을 보면서 자랐고 주변에 많은 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저는 아버지가 하셨던 일들을 말씀드
리고 싶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
꾸지 않고 한국이름을 쓰니까 따돌림을 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일에
긍지는 있었지만 힘든 일이 많았지요.
참 어려운 일이네요. 인권운동가의 딸로 살아가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참 혹독하기도 했겠어요.
“한국에 돌아가라”는 협박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열네 살 때였는데, 그
전까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협박편지가 오다가 아버지와 함께 지문날인반대운
동에 참여한 이후 내 앞으로 협박편지가 왔어요. 또 반대로, 한국에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어로 쓴 편지도 보내왔어요. 부끄럽지만 “잔다르크”를 대하는 듯
한 내용이었어요. 그런 격려편지가 큰 힘이 되었죠. 나도 똑같이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기 위해 한 행동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격려가 많이 와서 놀라웠습니
다. 인권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신 아버지는 더 많은 협박장을 받았겠지요. 그때
나 지금이나 일본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버님을 보시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가시던 길을 따라 가신 거군요.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이어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
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하셨던 인권 운동은 재일동포의 주권을 살리기 위한 일
들이었고 독립운동과 같은 일이라고,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
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나시지 않았어요. 일본에서 독립운동가와 같은 정신이 있
었기에 평생 식민지에 대항하는 마음이 있었고, 식민지의 현실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제네바 등에 알리셨어요. 북에서 태어나 제주로 가서 일본으로 가
신 아버지는 그렇게 험난한 삶을 스스로 택하셨어요.
아버님 최창화 목사에 대해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저는 아버지가 하시는 인권운동에 참여했습니
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9.1집회를 이어받아서 진행하며 아버지의 자료
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의 운동을 한국에서 소개할 수 있도록 하
고 싶었습니다.
지금 그래서 최선혜씨께서 그 일을 이어받아서 하시는 거 군요.
아버지는 생전에 많은 일을 하셔서 그 일을 유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
다. 누구도 쉽게 이어나갈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도 힘든 운동을 했다고 생각
합니다. 재일동포의 운동은 다양화되어 오고 있으므로 그 가운데 “정말 재일동
포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버지의 메시지였으며 아버지의 인권 운동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 펼치신 인권운동을 이어나가시면서 그 때와 지금 재일 조선인의 인권에 관한 문제
는 어느 정도 해결되고 또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권리를 말합니다. 그 권리가 조금 주어진다는 것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부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인권이 보장된다고 볼
수 없으니까 옛날보다 조금 나아졌다거나 아주 나빠졌다는 표현은 재일동포 문
제 해결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얼마나 해결된다”라는 4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해결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
다. 또한 “재일동포가 왜 존재 하는가”라는 물음의 답이 시대와 정치 상황에 의
해서 바뀌거나 재일동포의 역사적 배경과 재일동포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상
황에서 “현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정확한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얼마나 긴 세월을 민족차별을 겪으며 살아왔는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
다만 최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 헤이트스피치 현상들이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
로 학살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대한 제국을 “병합”이라고 칭하고 강제 점령하
고 토지 조사 등의 명목으로 토지를 거론하며 민중의 삶의 터전을 앗아갔습니
다. 식민지 지배 속에서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대지진과 학살을 조우한 것입니
다. 일본의 국가와 민중에 의한 학살에서 94년이 경과하고 그동안 많은 연구, 운
동이 축적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지금도 국가의 책임 소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
니다. 오히려 일본 사회에서는 조선인 학살 사실을 은폐하고 정당화 하려는 듯
한 역사 수정주의의 움직임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들은 바와 같이 아버님이 시작하셨던 9.1집회를 직접 주최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시
작하게 되셨나요?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인권 회복 투쟁 전국 연합회 주최로 시작된 9.1집회는 모
임 대표인 아버지 최창화 목사가 1975년 키타 큐슈시, 76년에 후쿠오카시, 78년
에 일본 총리(총리 관저에서)등으로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참정권을 비롯한 제반
권리를 요구한 공개 질문장을 모두 9월 1일에 제출합니다. “조선인”라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했던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재일 한국인·조선인 차별의
원점으로서, 인권 회복을 호소해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 유
지를 계승하다 집회를 주최하고 있습니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아버지
가 지금 살아계셔서 선혜씨가 아버지의 인권 운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하
실까요?
별 말씀을 하실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싱글싱글 자랑스레 웃으실 것이라고 생
각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함께 집회나 심포지엄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아버지 젊고 미숙한 제 발언에 한 번도 주의를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저를
자랑하듯 소개하곤 하셨어요. 아버지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으면 아버지의 만면
의 웃음이 많이 떠오릅니다. 저를 칭찬하신 것, 제가 원할 때에 옆에 미소 짓는
아버지가 함께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아버님이 계셨기에 민족 차별을 견뎌내고 성장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극복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을 텐데,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앞에서 말씀드린 지문 날인 반대 운동을 하면서 협박 편지를 받았을 때였어요.
그 협박편지를 보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괴로운 듯, 슬픈 듯한 얼굴을 보았을 때
참 힘들었어요. 저를 죽이겠다고,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쓴 협박 편지였죠. 그래
도 우리 가족은 운동을 멈출 수 없었죠. 우리 가족은 왜 이런 결정을 해야 했을까
요?
한일 관계에서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흐름 속에서 재일동포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양국 간에
긍정적인 미래 관계 때문에 서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통일,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결국 통일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좋은 결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통일은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많은 일본인이 한반도 통일을 그들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분단된
원인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미안합니다. 일본 땅에서 우리 동포들이 지난 100년간 얼마나 아프게 살아왔는지 그동안 알지
못했어요.
재일동포들도 모릅니다. 단지 차별 받고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지요. 슬픈
일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운동가로서가 아닌, 연구자로서가 아닌, 일상을 평범하게 사는 재일 교포 한 사
람으로서 할 말을 하며 배울 일을 배우고 등대의 불빛 같은 아버지의 운동사 연
구 내용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리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삶이 남긴 자료를 정
리하는 일은 아마 내 일생을 다 써도 끝나지 않을 겁니다.
재일동포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은 저서에서 오래 전 한 젊은이와 어깨를 부
딪친 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글을 썼다. 어깨를 부딪친 청년이 돌아서며 “조센진”
이라고 말했고, 그때 밀려오던 정체를 들켜버린 듯한 느낌이었다가 나중에 차별
과 혐오와 멸시의 표현이 “조센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느꼈던 감정에 대해.
재일동포들은 아직도 차별과 혐오와 멸시의 이름일지 모르는 호명을 받고 정체
성을 찾기 위해 이름을 찾는 거부가 아닌 거부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많은
이름 중에 어떤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일까. 슬픈 민족, 슬픈 조선. 그녀는 스스로
에게 주어진 이름들 중 “최창화 목사의 딸” 이라는 가장 큰 이름을 자랑스럽게 쓰
고 있다.
최창화 목사
1930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동포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평생
을 바쳤다. 재일동포들의 참정권획득 운동과 함께 1975년 NHK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이
름재판”으로 불리는 재일동포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표기하고 민족고육음으로 발음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지문날인반대운동을 펼쳤으며 UN인권위원회에 “재일교포에 대한 인권침해 상
황”을 제출하는 등 국제사회에 재일동포들의 현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김희로(金嬉老)사건과 소수민족』·『국적과 인권』·『이름과 인권』 등이 있다.
최선혜 인권운동가
9.1집회 실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아버지 최창화 목사가 1974년에 시작한 “9.1집회”를 1995년
부터 이어받아 22년간 개최하고 있으며 9.1집회는 올해 43회째를 맞았다. 2007년 고 최 창화
목사의 대량의 자료에서 약 60매의 패널을 제작하였으며 큐슈, 도쿄 등에서 패널전을 열었다.
2010년 5월 도쿄의 “재일 한인 역사 자료관 제6회 기획전 1엔 소송-이름은 초에 챤하·인권
회복 운동과 최 창화 목사”에 협력. 패널과 자료를 제공하였다.현재 아버지 최창화 목사의 삶
과 활동에 대해 자료의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최창화 목사
1981년 1월 12일 지문날인 거부 투쟁을 벌이는 최창화 목사와 최선혜 씨따뜻한 인터뷰 2 5
태초에 한줄기의 빛이 이 땅에 내려왔을 때, 그 빛은 꿈을 가진 누군가 움켜잡는
순간 여러 갈래의 줄기로 뻗어 마침내 어둠을 걷어내고 새 세상을 열기 시작합니다.
이 땅에서 빛을 되찾기 위해 어둠과 싸우고 있었던 그 때, 우리와 같은 꿈을 꾸고 같
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사람, 한사람이 등불이 되어 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
리가 되찾은 빛은 그들이 보내 온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지난 11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한
국을 방문한 독립유공자 임천택 선생의 손자 세르히오 림 알롱소 씨를 만났다.
세르히오 림 알롱소 씨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행사 참여와 현
충원 방문 등 바쁜 일정으로 따로 시간을 갖지 못하여 개벽신문에서 서면으로 인
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글쓴이가 임천택 선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지난 7월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열린 2017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새롭게 보는 하와이 한인의 독립운동사 자
료전』 “미주 및 쿠바의 한인사회와 천도교” 학술회의를 통해서였다.
1903년 멕시코로 이주해 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머나먼 타국에
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사람들, 노예와 다름없는 고된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면
서도 끼니때마다 한숟가락 씩의 곡식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사람들.
글쓴이는 학술회의에 참여하며 그들이 그 낯선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
며,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가슴이 매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