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다시 만나러 갑니다

– 보은취회 20년, 박달한 시벌(施罰)의 변(辨)

소나무와 낙타
누가 당신들을 슬프다고 말하는가. 함께할 수 없음은 슬픔뿐인가. 저기 팔 벌려 서 있는 소나무 당신이 숱한 밤 별들에게 가르쳐 준 낙타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사랑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슬픈 눈 낙타여, 사막의 빛이여. 소나무 당신이 왜 거기 서있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으리. 만남 없이 어찌 이별이 있겠는가, 당신들은 아직 만나지 않았으므로 이별도 없을 터이니 슬픔은 그 후에 말할 것. 지금은 서로를 그리워할때.

새해를 맞이하여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다. 보은사람 박달한의 동범상 수상 소식이었다. 동범상은 충북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였던 고(故) 동범(東凡) 최병준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매년 한 해 동안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한 시민운동가를 발굴하여 선정한다. 지난 20년 동안 보은 땅에서 보은 동학의 정신을 지켜나가고 이 시대 동학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던 보은취회를 이끌어 오기도 한 그를 개벽신문에서 만났다. 글쓴이와는 너무 오래 알고 지냈기에 인터뷰에 앞서 그를 낯설게 하기가 우선이었다. 사실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박달한은 지금까지 인터뷰를 진행해 오면서 만난 가장 큰 산이었다.

개벽신문 신년호에서 뵙게 됩니다. 개벽신문의 기획위원이기도 하신데, 개벽신문을 어떻게 보고 계세요?개인적으로 저의 지인들 중에서 저의 기사를 가장 열심히 읽어주신 독자분이기도 합니다만

개벽신문의 인터뷰를 통해 이 시대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열정을 갖고 시대를 헤쳐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줘서 좋아요.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은,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사실만 보는데 매번 인터뷰 기사 앞에 쓰는 짧은 글들을 볼 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되는 게 좋아요. 제안하고 싶은 것은 그 짤막한 글들만 따로 묶어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용이 중요하겠지만, 예뻐도 예쁜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의미 있게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안내서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보은취회도 그렇거든요. 보은취회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 매년 한 해의 제목을 정해서 하다보니 저는 그 짧은 글들을 의미 있게 바라봤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은취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 20년간 보은취회를 해 왔으니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한 사람이 태어나 청년이 되기까지의 세월이다. 고백하자면, 글쓴이는 수년 전부터 보은취회에서 작은 역할들을 맡아서 해 왔기에 보은취회에 그 만큼의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해(2017) 보은취회는 조금 불편하게 흩어졌고 끝을 맺지 못한 채 ‘시벌순행’(시벌施罰: 벌을 주다-동학의 여러 접에서 타이르고 가르치는 바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엄하게 벌을 준다. <해월문집>, 각별하게 타일러 깨우치게 하고 무수히 오가면서 깨우치고 깨우쳐서 진리와 정도로 돌아가게 한다)을 거쳐 새로운 전환점이 되고자 했으나 기존의 추진 접주들이 행사를 이어 나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보은취회는 새로운 접주들을 모집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박달한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무엇이 우리를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새로운 보은취회는 어떻게 열어가야 할 것인지를. 그는 과거를 돌아보아야 했다. 그래서 오래 전 기억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87년 세대네요. 요즘 키워드가 1987인데, 1987년 6월에 어디에서 무얼 하셨나요?1987년 당시, 나는 서울 남영동 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어요. 밖에서 소리가
나면 명동성당에 가서 앉아 있다 오기도 했고 그즈음 시위대가 학원 주변을 지나갈 때 따라다니기도 했죠. 멋모르고, 울림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때 재수를 마치고 삼수까지 했는데, 특별한 사회인식을 갖고 있을 때는 아니었어요. 그런 교류를 하지도 못했고요. 단지 이 순간이 역사적 현장인 것 같다, 나도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럼 그 시절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청년들의 절박함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기도 했나요? 최근 많은 곳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1987이 우리에게 남긴 게 뭘까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스스로 갖고 있었던 주체의식,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었던것 같아요.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의 고민은 ‘자율학습이라고 하고 왜 타율학습을 하지?’ 이것이었어요. 제도의 틀 속에 들어가는 것, 제 기준에서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이 컸죠. 1987년 6월의 광장은 민중의 역동성을 느끼게 해 준 것 같아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저항을 했어요. 이론이 없어서 반론은 펴지 못했지만요. 아주 많은 고민들이 있었거든요. 어쩌면 고등학교 때부터 저의 꿈, 삶이 이어져 온 게 아닌가 싶어요.

역시 남다른 학생이었네요. 그때 꿈꿨던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있었을 텐데 스스로 이뤄낸 것도있을 것 같아요.

늘 시선이 가는 쪽은 약자들이었어요. 이 사회에서 소수가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자기를 성장시킬 수 있는 꺼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에는 친구들이 팝송을 많이 들었어요. 당시 라디오 국악방송이 5시 30분부터 6시까지 있었는데 나는 그 방송을 들으려고 집에 막 뛰어 가기도 했어요. 주체성을 갖고자 했던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배우고 접하는 것들에 주체성을 갖지 않고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 역사에 대해 국가, 남북 분단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지요. 나에게 남북 분단의 문제는 지도를 볼 때마다 내 허리가 잘려나가는 느낌 그 자체였어요. 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우리의 말과 정신을 지키고 싶었거든요.

서울에서 보은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문화 소통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싶었지만 문화와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청주로 가서 택견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심한다. 우리 사회가 서구화될 수밖에 없겠지만 내 몸속에서는 우리의 피가 흐르게 해야겠다고. 그에게 시대의 변화, 사회의 변화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직 머릿속에는 우리 문화를 지켜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군 제대 후 농민회에 쫓아다녔어요. 노동자는 집단을 이루고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농민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조직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농민회라는 게 있었더라고요. 저의 운동의 방향은 “생명이 자기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소외된 민중들, 모든 생명이 자기 꽃을 피웠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청주에서 풍물과 탈춤, 택견 등의 민속 문화를 배웠고, 거기서 배운 것들을 토대로 보은에서 그런 문화공동체를 만들었어요. 풍물패도 만들었고요. 이미 보은에는 그 힘은 미약했지만 작은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있었어요. 사회적으로 약화되었던 조직들에서 문화를 중심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기반이 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거군요. 고향이기는 하지만 보은이라는 문화의 불모지에 깃발을 꽂았다는 것, 참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해요.

그 용기는 내가 무식해서 나온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박달한이가 무식하니까 이 일을 했지, 하고요.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 내가 무식하게 했더군요. 알았다면 못했을 거예요.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돈을 번다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언제나 그 목적지는 문화운동이었어요. 나도 사람인데 돈을 많이 번다면 그 돈을 그렇게 내가 아닌 남을 위해 다 쓸 수 있을까. 그때 내가 가는 길이 참이다, 생각하고 보은으로 내려온 거예요. 부자로 살지 않고 거지로 살겠다고 생각하고 보은으로 내려온 거죠. 그런데 살아보니까 항상 거지로 살고 있지 않더라고요. 가진 게 많더군요. 내가 이렇게 풍요롭게 살아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요.

‘삶결두레아사달’은 96년에 창립했네요.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또 보은취회를 이어나가기 시작한 이야기를 하면 좋겠어요.

보은으로 돌아와서 지역문화를 기반으로 무엇인가 펼치고 싶어서 ‘아사달’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보은취회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보은취회는 ‘솟대 장승 굿, 하늘이 열리고 이 땅에 지킴이가 서다’라는 이름으로 98년도에 시작했죠. 물론 이 행사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동학을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동학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바가 크지 않았고요. 동학은 고등학교 때 알게 되었어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 당시 나는 우리의 것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을 때라 스스로 민족종교를 찾게 되었어요. 그곳을 찾아가니 천도교였어요.청주 사직동에 있었죠. 경전을 보니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종교였어요. 인간 중심이었고요. 피조물이 아닌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느낌이 좋아서 마음에 들어서 계속 다니게 되었죠. 그때 천도교 입교를 한 것으로 봐야죠. 주문수련도 했고, 시일식에도 매주 참여했어요. 무엇보다도 종교가 어렵지 않아서 좋았어요. 그런데 오래 다니지는 않았어요. 경전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거든요(그가 말한 구절은 동경대전의 ‘가련[可憐]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我國運數] 가련하다’ 와 ‘아동방[我東方] 구미산[龜尾山]은 소중화[小中華] 생겼구나.’ 이 두 구절이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가 소중화-중국에 비해 우리가 작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말 속에서 피주체성의 느낌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책을 덮고 나가지 않았어요. 그게 처음 동학을 만나게 된 계기였어요. 당시 접했던 경전의 그 구절 때문에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수운과 해월의 가르침, 노동의 신성성을 동학으로부터 배웠다고 볼 수 있으니 동학의 의미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어요. 이후 동학에서 배운 몇 가지를 스스로 마음에 두면서 나의 삶에서 사람에 대한 관점, 일에 대한 관점, 자연세계에 대한 관점을 동학적 시각에서 보려고 했어요.

그 차이를 어떻게 느끼셨나요? 동학적 삶과 그렇지 않은 삶에 대해서요. 최근 시민사회운동의 해답을 동학의 사상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한데 당시 운동 진영의 한계를 보신 건가요?

사람에 대한 관점을 동학에서는 한울님으로 보았는데, 운동진영에서 볼 때 사람은 무엇인가,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늘 고민했어요. 그런데 내 느낌상으로는 사람에 대한 관점이 좀 다른 것 같다는 거였어요. 동학에서는 사람을 최고의 가치로 보았는데 자꾸만 사람이 도구화된다는 느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운동진영에서조차 인권은 언제나 신 아래에서의 인권, 평등은 법 안에서의 평등이었어요. 사회가 변했지만 귀족이 있었고요. 동학은 그런 차별과 구분을 없앤 거였어요. 사람을 하늘로 대하는 것은 오직 동학에서만 찾을 수 있었어요. 그런 차이가 있음을 느꼈죠. 동학에서 “모든 물건마다 하느님 조화의 자취가 아닌 것이 없고(物物天) 모든 일마다 하느님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다(事事天)”고 말하는 것을 떠올리면 일의 신성성을 느낄 수 있는데, 운동진영의 아쉬웠던 점이 그 지점이었어요. 노동은 생산에 있어 가장 기초의 단위로만 받아들이고 있었죠. 동학에서의 사람은 생산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고 하늘이 움직이는 것의 일부분인거예요.

보은에서 태어나 자라셨는데, 도소가 설치되고, 보은취회가 있었고, 북실전투가 있었던 사실을알고 있었나요?

사실 보은취회에 보은 지역 주민의 참여가 저조하다는 것이 아쉬움이 컸어요. 보은취회는 역사에 나오니까 동학에서 보은취회가 있었다는 것만 알았어요. 내가 문화 활동을 하겠다고 보은으로 들어오면서 든 생각이 이런 저런 꺼리들이 있었지만 보은이라는 땅에 보은집회, 동학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언젠가 그것을 통해 문화 활동을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내천’ 하나였거든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웁니다. 사랑, 자비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내 삶에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런 면에서 동학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데 텍스트로 삼을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지요. 보은에 대도소가 설치될 수 있었던 것은 보은에 동학도가 많았다는 거거든요.그분들로 인해 동학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보은동학에 남겨진 과제들이 있습니다. 학술적으로, 행정적으로요. 보은 동학의 목격자가 있었을 거고. 사람들이 어떻게 이곳으로 모여들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전해오는이야기가 있을 수 있고요. 그중 최근에 발견된 북암리 이야기도 중요한 지점입니다(보은군 북암리에서 위령제를 올리다-올해 보은취회 때 그 마을 어르신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군에 쫓기던 동학군들이 묻힌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제를 올렸다). 보은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땅이에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다시 북상해서 장안으로 와 보니까 장안 마을이 모두 불타고 없어졌어요. 그 마을을 몰살시킨 겁니다. 그래서 마을이 있던 곳 앞쪽에 다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요. 거기 사는 사람들도 동학이야기를 못했던 거예요.

보은취회는 98년도에 아사달의 작은 행사로 시작되었는데, 처음부터 많이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해를 얻기도 어려웠을 것 같아요.

처음에 지역 어르신들이 모였어요. 조마조마했어요. 더욱이 보은 종곡리는 경주김씨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어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시작했죠. 행사가 시작되자 말도 많았지만 도와주시던 어르신들도 많았어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에는 극단놀이패 열림터에서 ‘북실진달래’라는 마당극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때 나는 ‘보은동학’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걸 알아보신 분들도 생겼지요. 그 이전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큰 틀은 있었으나 ‘보은동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거든요. 과거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오늘날 민주화의 동질성을 찾는 시도들도 많았지요. 다른 지역에서 농민회와 연결하여 사회운동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들은 있었지요.

제가 바라보는 보은의 동학은 해월 선생의 사상을 기반으로 가려는 것이었어요.다른 지역에서는 해월, 북접에 대한 부정이 있었어요.

100주년 때 동학과 북접, 남접에 대해 채희완 선생님이 쓰신 글에 보니 북접은 어머니, 남접은 아들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 드러나기 시작했지요. 지금은 동학의 사상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동학에 대한 종교적 부정이 강했어요. 전봉준의 혁명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컸고요.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과 하늘과 우주, 이천식천이라는 말에 대해 자연을 바라보고 싶었어요. 한울이 한울로 순환되는 것을 많이 바라보려고 했어요.

1893년에 보은에 모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집회로 평가됩니다. 여기에도 하실 말씀이 있을것 같아요. 보은집회라는 말이 더 익숙한 사람들도 많은데요.

역사서에 보은집회라고 나오는데 보은취회라는 말도 나옵니다. 과거의 기록은 보은취회라고 했거든요. 나도 고민을 했어요. 보은집회라고 할지 보은취회라고 할지를요. 현실에서 나는 이것을 문화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취회’라는 말을 그대로 썼어요. 보은취회의 민회적인 의미를 강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은취회를 통해 민중의 힘을 발견한 것이니 자신 있게 기치를 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전에는 민란이었거든요. 보은취회에 와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교류의 장이고 만남의 장이고 공심의 마당이라고 정리했어요.
나는 이 마당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문화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공론의 장으로 펼치고 싶었어요. 그때는 막연하게 시작한 거예요. 지금까지 20년이 걸려서 차차 정리된 것이고요. 나에게는 ‘사람이 하늘이니’라는이 말이 중요했어요. 지금도 그 뜻에는 변함이 없어요.

보은취회가 알려지고 그 정신이 시민사회의 동력이 되기도 했어요. 거기 오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온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아요. 무엇이 오늘날까지 보은취회를 놓치지 않고 끌고 오던가요?

그것 아니면 할 것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지난 20년간 다른 것은 놓더라도 이것은 꼭 잡고 온 것 같아요. 다른 건 다른 사람이 해도 되는데 이건 내가 꼭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풍물패를 모아서 솟대 장승굿을 하고 나서, ‘와 이걸내가 했어. 인간 박달한이 했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대견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그래, 이 안에 동학을 심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판이 어떻게 형성될지, 그림을 그리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해 놓고 보니 괜찮은 겁니다. 그래서 든 생각이 나는 뚜쟁이처럼 이사람 저사람 연결해서 일을 해 낸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내가 했다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그 생각이 이어졌어요. 내가 아닌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나간 것이죠. 행사가 끝나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깃발을 흔드는 것 같더라고요. 그저 나에게 이 역할이 주어져서 나는 그냥 이것을 하고 있더군요. 솟대장승 굿은 새로운 이념의 지표를 찾고 싶었던 것이었어요.

보은취회를 20년간 해 오면서 스스로 지키려고 했던 것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지킴이의 뜰 아사달’이 내세운 슬로건 ‘씨알, 겨레, 시골. 민족, 민중, 지역, 세계의 중심이 여기 보은이다’였어요. 여기 모인 하나하나가 다 주체가 되는 것으로요. 그때 나의 다짐은 과거 피흘림의 역사를 오늘날 놀이갯감으로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행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놀이갯감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은 참 어려웠어요.처음으로 장안에 장승을 세웠던 날이었어요. 논바닥을 보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누런 나락들과 논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핏물이었어요. 저 나락이 그 핏물을 먹고 자랐고 우리가 그것을 먹고 딛고 있는 핏물이 흥건한 땅이 보이는데 어떻게 이 행사를 쉽게 할 수 있었을까요? (눈물이 나서 잠시 인터뷰가 중단되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는 종종 논바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걸 안 봤으면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는 그걸 봤어요. 그 땅을 딛고 서 있는 나는 그 무엇도 쉽게 할 수 없어요. 과거의 보은취회는 동학농민혁명의 모태였다면 지금에 있어 혁명, 그리고 보은취회가 모태가 되어 보고자 했어요. 그래서 솟대장승굿, 보은동학굿, 동학보은취회, 그리고 보은취회 이렇게 변화해 갔어요. 자리도 잡게 되었고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120돌 보은취회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1차적으로 보은취회가 알려지게 된 것은 우리 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행사와 함께한 임오년 보은취회였죠. 그 계기로 보은취회 전국화가 되기 시작했어요. 생명민회 모임이 보은에서 열리기도 했죠. 그때 박맹수 선생님, 황선진 선생님 다 오셨어요. 그때 태풍이 영동을 지나가면서 깃발 세우는데 비가 쏟아지고 그랬지요. 그때 보은취회가 전국으로 확장되었죠. 그 다음해에 길위 김창환 형이 보은으로 오면서 판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채길순 선생님도 오셨고요. 그렇게 생명운동 쪽으로 폭이 넓어지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길위 김창환 형이 역할을 많이 했어요. 또 복실이 형(이윤복)도 있었고요. 보은취회 120주년을 처음 말한 사람이 길위 김창환 형이었어요. 나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김창환 형이 보은취회 때 들살이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조금 더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확장하려는 의지가 생겨났죠.

그렇습니다. 제가 매년 보은취회에 오신 분들을 만날 때마다 한결같이 보은취회를 통해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보은취회를 통해 꿈꿨던 것은 보은취회라는 이 시공간을 통해서 사람들이 현실의 삶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보은취회가 하나의 해방 굿판이 되어 우리가 바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잠깐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러기 위해 생명살림을 꿈꾸는 사람들이 접주로서 스스로 참여했으면 했고요. 보은취회는 만나는 마당, 나를 만나고 너를 만나고 우리를 만나는. 나를 만나며 자기를 성찰, 너를 만나며 교류하고 소통, 주고 받고 풀고 얻는 우리를 만나며 공심을 갖는 그런 만남의 마당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어요. 더 바랄게 없어요.

박달한 개인의 삶을 좀 이야기해 보죠. 다문화 센터를 운영하고 계시지요?

2006년에 다문화를 시작했어요. 다문화가정이 보은에 많으니까 누군가는 다문화에 대한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보은 지역에서는 제가 이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지요. 보은에 다문화현상이 있는데 누군가가 아사달 같은 곳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듣고 사회적 책임을 갖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아사달이 가진 사회적 책무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문화센터를 2008년부터 운영했으니 이제 10년이 넘었어요. 저 개인적으로 다문화센터 일을 하든 보은취회를 하든 밑바닥에 흐르는 개념들은 주체적인 삶, 삶의 주인이 되는 사회가 형성되길 바라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지역에서 결혼이민자들이 사회적 활동을 하는 조직들을 유도해내고 있어요. 우리 센터에서는 결혼이민자들이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역사는 변화를 통해 발전해 갑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는 다양성에 대한인정, 존중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상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않고서는 화합, 상생이 어렵습니다. 조금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 상호 협력해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겠죠. 다양성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적 인식, 사고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다문화는 긍정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다문화 현상은 우리가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 현상에 눈을 감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아요.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홍익인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문화센터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편견들이 다양성에 대한 이해로 깊어지며, 그러한 감수성을 갖게 되었죠.

취회를 보은에서만 해야하나? 보은취회를 20년을 해 오면서 매년 소중하지 않았던 해가 없었다. 늘 소중했다. 각 개인과 개인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도 했으며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했으며 연결고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글쓴이는 보은취회에서 만난 사람들 간의 소통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한다. 대구의 어느 접주가 뉴스를 통해 청주에 사는 한 어려운 이웃의 사정을 접하고 자장면 한그릇을 베풀 수 있는 소통의 창구로 보은취회를 떠올리기도 했고, 이어 홍수, 지진, 폭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접주에게 보은취회라는 거점을 통해 안부를 묻고 마음을 보탤 수 있는 연결의 끈이 되어 주기도 한 사연은 언제나 눈물겹다.

이제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죠. 보은취회 20년을 맞이하는 지금, 올해 보은취회를 내려 놓은 건가요?

그동안 저를 비롯한 추진접주들이 모두 지쳤어요. 올해 취회를 맡아서 하는 추진접주를 모집하고 있는데 제가 주체적으로 끌고가지 않아도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저는 올해 그동안의 시간들을 돌아보고 싶어요. 그동안 보은취회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을 찾아가는 저의 시벌을 할까 해요. 한동안 마음이 많이 아프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시원해요. 미안한 마음이 커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마음보다는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저도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어요. 우리 안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나는 여지없이 120년 전에 왔던 보은 땅으로 오던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합니다. 그 분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하나 둘 모여들던 그 마음들을요.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동안 박달한이라는 사람이 20년간 한결같이 보은취회를 해 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기도 했어요. 그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올해 나의 계획은 다시 나를 새롭게 하고 싶어요. 자기를 놓치지 않고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새롭게 해서 보은취회가 이어진다면 그동안 놓쳤던 부분들을 다시 붙잡고 가야겠지요. 지금까지 보은취회에서 함께한 분들을 다시 만날 겁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다시 보은취회를 시작할 겁니다.

그 첫 번째로 저를 만나러 오신 거군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그는 이틀을 꽉 채워 인터뷰를 마치고 보은으로 돌아갔다. 글쓴이는 도저히 낯설어지지 않는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를 미워하기도, 사랑하기도 했던 시간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변함없음이 그를 잡아 이끌어 온 것이므로. 함께할 수 없음은 슬프지만, 함께하고 싶은 꿈은 언제나 귀하다.

박달한
1967년 보은에서 태어나 1989년 농촌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1994년부터 풍물강습과 풍물패 조직, 1995년 단오맞이 행사를 시작으로 지역의 전통문화 활성화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1996년 삶결두레아사달을 창립하고 택견, 풍물 등으로 지역문화활동에 전념하였으며 1998년 ‘북실기세배’를 발굴하였다. 1998년 <솟대장승 굿 – 하늘이 열리고 이땅에 지킴이가 서다를>행사를 개최하며 이듬해 지역의 동학보은취회와 동학농민혁명 역사를 바탕으로 한 보은동학굿 <북실진달레-동학으로 가는길>을 시작으로 매년 1893년 보은취회를 재현하고 기리는 행사를 이끌어 오고 있다. 또한 2008년부터 보은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수탁하여 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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