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순의 동학 열정가, 김성순 선생과 이야기 나누다
“내 나이가 곧 구십인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꼭 할 이야기들이 있어요. 내가 몇사람 불렀는데 기자님이 여기 김천에 와서 그 이야기들을 좀 정리해 주었으면 해요.”
조성환 : 제가 학교 다닐 때 늘 화두가 되었던 개념이 ‘근대’였는데, 그때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근대화에 늦어서 식민지를 당했고, 그래서 차라리 조선이 빨리망하는 게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사람들이, 특히 학자나 지식인들이 서구적인 근대, 그리고 그것을 미리 선취한 일본의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주 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콤플렉스가 심해지면 정신병까지 되잖아요. 그럼 사람은 마음이 꼬일 수도있고 사태를 제대로 못 볼 수도 있고요.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고쳐야 할 질병이라고 할수 있는데, 동학부터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에 이르는 이른바 개벽종교를 공부해 보니까 하나의 치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인들은 일본처럼 서양적 근대화에는 늦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자생적인 근대화를 나름대로 추구하고있었다고 보여서요. 여기서 ‘근대’란 “조선과는 다른 질서를 모색했다”는 의미에서의 근대를 말합니다. 그래서 비록 힘의 차원에서는 서구적인 근대를 성취한 일본에 졌지만, 동학부터 원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과 평화, 그리고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일적 세계관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근대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줘야 하는 근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을 키워서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면 그것이 아무리 근대라고 해도 권장할 사항은 아니 잖아요. 도둑이 들면 도둑을 먼저 탓해야 하는데, 왜 힘을 못 길렀는지만 자책하는 식으로 역사를 쓴다면, 그건 잘못된 역사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역사는 누가 강요한 것이아니라 한국인이 스스로 쓴 거예요. 그래서 친일 청산처럼 누굴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이 개화했던 것처럼 조선 후기에도 개화의 흐름이 있었다는 식으로, 가령 실학사관과 같은 식으로 역사를 서술하지 말고, 우리에게는 다른 식의 근대를 준비한 흐름도 있었다는 것을 당당하게 소개해 주어야 한국인들에게도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고, 근대화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지난 촛불혁명을 보면 우리가 추구한 자생적 근대화의 씨앗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생각이 드니까요. 그것이 150년 전에 동학으로 시작된 한국적 민주주의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동학부터 원불교에 이르는 개벽종교 또는 개벽파가 추구한 민중적 근대 또는 자생적 근대를, 지금처럼 단순한 신종교의 탄생이나 일제의 저항운동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하나의 사상운동이자 우리 역사의 큰 조류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 주고 정체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일하고 있는 원광대학교 이외의 대학에서는 이런 사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것 같습니다.
다행히 지난 8월에 원광대학교에서 ‘한국의 개벽종교와 자생적 근대화’라는 주제로 한일 공동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미숙한 점도 있었지만 청중도 많았고 반응도 좋았습니다. 아마도 우리 역사를 외국에서 수입한 이론이 아닌 우리 자신의 시각에서 보려는 시도에 대해 좋게 평가해 주신 것 같습니다. 특히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대학원생에 이르는 젊은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그분들에게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를 설명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아직 사고가 유연해서 그런지 쉽게 공감해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저는 평생을 이 ‘한국적 근대화론’을 체계화하고 세계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전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동아시아나 유럽이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서, 인도나 아프리카, 남미와 같은 이른바 ‘제3세계’의 근대성과 비교하면서요.
김성순 : 나는 1929년 의성군 단밀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님은 34년여를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셨습니다. 내가 대구사범학교 3학년 때 8·15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10·1사건 등으로 혼란한 가운데 1949년 6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돌아가시는 사건후 나는 단독정부 반대전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대구형무소 미결감에서 6·25를 맞이하였습니다. 8,100명 재소자 중 3,700명이 거창,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학살되는 가운데서 나는 간신히 생존하였고 그 후 공군과 육군에서 7년여의 사병 생활 끝에 1958년 나이 서른이 되어 제대하였지요. 천신만고 끝에 4년생 포도 재배 수입으로 그때 돈 30만원, 쌀 100가마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어 가족의 식량을 해결하고 허공을 헤매던 두 발이 대지를 밟게 됨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유신체제 하에서 <씨의 소리>를 읽고 크리스천 아카데미(농촌9기)를 거쳐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함평 고구마 사건, 영양 오원춘 사건으로 단식 하기도 하고, 구류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후 정농회 유기농업과 생명평화운동을 해 오다가 2007년 6월 2일 해월 선생 추모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동학을 접하며 ‘인류는 한 그루 큰 나무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배종렬 : 조성환 교수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무안에서 기독교 농민회를 창립하여 10년 동안 일했습니다. 기장 장로를 30년 했는데 역사를 공부하면서 기독교로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해서 중학교를 못가고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동양 사상, 단학, 대종교를 공부하다가 장로님 소개로 경주 용담정을 찾아가서 천도교를 받아들이고 동학의 주문 수련으로 아픔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련원이 제대로 된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봉황각에 몇 번 연락했는데, 갈 때마다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여기 원불교 2세 교주가 나신 성주 소성리에서 수련하고 있습니다. 개벽사상을 추구한 원불교나 대순진리, 동학 모두 그 자체가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불교 교무님들하고 매일 100배를 같이 하는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는 체험을 말해도 접근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동학, 원불교, 대순진리, 천도교가 적어도 기독교를 극복할 수 있는가. 개벽신문도 계속 보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옛날부터 현재까지 그 중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학이 일어나고 많이죽고, 일제 탄압으로 종파가 갈라지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거기서 이신환성, 몸으로서 이 몸이 성령을 변화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동양에서 성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성환 교수님께 성리학과 천도교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조성환 : 성(性)은 다 쓰는 말인데요, 그 성이 같은 성인지는 좀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유학자들이 쓰는 성과 동학에서 쓰는 성이 같은지는 늘 논란이 되거든요. 오히려 동학이나 천도교는 유학과는 다른 성을 써서 순교, 처형당한 것이 아닌가, 조선 정부나 유학자들한테. 사람마다 견해는 다른 것 같습니다. 유학하시는 분들은 동학의 성과 유학의 성을 비슷한 것이라고 보려고 하고, 동학과 유학의 단절을 중시하는 분들은 다르게 보고있으니 견해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김성순 : 「탄도유심급」 가운데 ‘남의 작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하지 말고 나의 작은 지혜를 이웃에 베풀라’라는 말씀이 요즘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교훈입니다. 누구든지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각이 형성되는데,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집중해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의암 선생의 말씀 중에 불교나 성리학적인 요소들이 있는 줄 압니다만 「성령출세설」 가운데 “① 우주는 원래 영의 표현이다.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영의 적극적 표현과 소극적 표현이 다를 뿐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② 사람의 성령은 이 우주의 영성을 타고난 것이며 선조 대대의 영성이 이 세상의 사회적 정신이 되었고 진화한다. ③ 조상의 정령(정신과 영혼)은 자손의 정영과 융합하여 영원히 세상에 나타나서 활동한다.”는 대목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해월 선생 「향아설위」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킨 이 말씀은 오늘날 물질문명의 중압에서 탈출하는 영성의 폭발, 촛불 혁명의 근본 원리를 해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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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기둥이 굳건해야 도의 맛을 안다.(固我心柱 乃知道味)「탄도유심급」 첫머리에 나오는 말입니다. 원효스님이 도를 통한 후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누가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내가 다듬어 보겠는데….’ 했다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천막을 받치는 기둥처럼 하늘을 의식하고 생활하고 있습니까? 윤동주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다짐했습니다. 올해 8월 한 달 동안 폭염 속에서 마치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89세 늙음의 무게를 체험 하면서 그의 ‘서시’를 되풀이해 읊었습니다. GNP 3만불 시대에 사는 우리의 실상을 살펴볼 때 하늘과 자연과의 깊은 호흡은 거의 단절되고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란 말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아버지를한 번만 보여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답하셨는데 제자들이 이 말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나 예수님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5장)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때 “내 아버지는 그 농부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신학을 배운 바 없는 일개 농사꾼이지만 예수님이 오신다면 참 포도나무와 농부를 왜 분리시켰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한참 전 일본의 선철학자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란 사람이, “구약성경 창세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였는데, 그 것을 본 것은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수천 년 전, 우리 민족의 고전 천부경을 읽고 참전계경을 펼쳐 보는데, “하성(下誠)은 의천(疑天)하고 중성(中誠)은 신천(信天)하고 대성(大誠)은 시천(恃天)한다.”는 글이 나옵니다. 그간 시골 교회 장로가 되어 30년 교회에 다녔는데, 때때로 의심하고, 잘해야 ‘믿어야지’ 다짐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여기 시천(恃天)은 하늘을 믿고 의지한 다는 것인데 동학의 시천(侍天)은 하느님을 부모님과 같이 내가 모시는 것입니다. 이 설명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멀리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 ‘하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아는데 있다.’ (해월)
나는 4·19가 나던 ‘1960년 봄 하천부지 모래 땅에 켐벨어리 묘목 300여 주를 심고 오늘까지 58년간 포도농사를 지어 왔습니다. 1980년 한국포도회를 창립하여, 일본 포도 농가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품종과 재배기술을 도입하고, 지금은 주산지마다 영농조합을 만들어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여 해외 수출의 경험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봉 품종은 화진 현상이 심하여 안정된 생산이 어려웠는데, 영양주기 이론을 공부하여 오랜 실험 끝에 안정적인 재배가 가능해졌습니다.
맹아 개화 착색 수확 낙엽휴면 휴면
(1) 영양생장기N P K, Ca, Mg
(2) 교대기
(3) 축적생장기1. 봄에 순이 터서 5월 하순경 개화기까지(영양생장기)
2. 신초가 왕성하게 신장해야 하나, 개화기부터는 영양소가 꽃으로 집중되어야 수정이 잘 된다. (교대기)
3. 착색기 이후 모든 잎에서 만든 탄수화물(C)이 송이로 집중되게 관리해야 좋은 포도 생산이 가능하다.(축적생장기)
요약하면, 성장에서 성숙기로 전환되는 교대기의 관리가 성공의 관건이며 후기에는 모든 영양소가 성숙(과실)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포도와 같습니다. 청년기 까지에 몸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그 후는 정신적으로 철이 들어야 사회인으로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 발달에 있어서도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 빈부격차, 약육강식 같은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이 개벽되어야 한다.(원불교) 안으로 신령하고(敬天), 자연과 하나되고(敬地), 모두 각자 한 그루 나무가 되자(敬人)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류문명의 목표이다 김천YMCA 봉계아동센터 어린이들의 아동극 ‘너와 나 아닌 우리’를 소개한다. 인류의 문명 그리고 미래의 동학이 꿈꾸는 모습을 그려본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 냇물을 만난 토끼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거북이가 등에 태우고 건너갑니다. 건너가서는 반대로 토끼가 거북이를 등에 태우고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동학 아리랑’을 함께 부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방방곡곡 걷고 걸어 내 고향 산천을 살펴보자. (후렴) 소나무 잣나무 저마다 푸르고 수많은 잎과 가지 만만 마디라. (후렴) 늙은학 새끼 쳐서 천하에 펼치니 이리저리 날면서 모앙하네.<화결시> (후렴)
김천 덕천 포도원 앞에서 왼쪽부터 조성환, 신채원. 김성순, 이미애, 박길수
포도의 당도를 측정하는김성순 선생[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8월 31일, 김천의 김성순 선생의 초대로 조성환(원광대), 배종렬(부안), 고희림(성주), 이미애(한울연대), 박길수(본지 주간) 등 몇몇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한 글이다. 본지 기자가 전화로, 팩스로, 우편으로 원고를 몇 차례 수정하였고, 마지막으로 한 차례 김천을 방문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선생의 나이구십,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개벽신문을 통해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선생은 이 이야기를 토대로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