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문즉설: 관옥 이현주 선생과 함께
나의 기도는 오직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을 얻어 손에 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어떤 사람으로 서 있는가를 잃지 않겠다는 선언 같은 기도입니다. 세상 어딘가에 단 한번도 스친 적 없는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그 자리에 살아주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기도하는 사람, 말을 거는 사람, 아픈 이야기를 듣는 사람, 절박한 곳으로 걷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이 진실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나의 모든 선택이 오직 사랑이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10월 8일, 생명평화활동가대화마당을 열며 관옥 이현주 선생님을 모시고 ‘즉문즉설 : 길을 묻다’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선생님의 말씀을 사랑어린배움터에서 채록하여 보내주신 내용을 옮겨, 문장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듬고 편집하였습니다.
신채원 반갑습니다 여러분, 생명평화활동가대화마당은 생명, 평화, 전환, 모색을 주제로 각자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자리입니다. 작년에는 연천에서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함께 걸으며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물줄기를 보면서 그 강의 이름을 무엇으로 붙여야 할지 몰라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습니다. 올 한 해를 살뜰히 살아내고 2019년 10월, 2019 생명평화 활동가 대화마당을 열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벗을 만나러 먼 길을 돌고 돌아 왔을 서로에게 각자가 서 있는 곳에서의 ‘길’을 묻기로 했습니다. 사회자 김용우 선생님께 이 자리를 맡겨 이현주 선생님을 모시고 즉문즉설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김용우) 첫 번째 무대 진행을 맡았는데, 사실 즉문즉설에 사회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하고 소통하는데 중간에 낀 놈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진행의 유연함을 위해 제가 이 자리에 배치가 된 것 같습니다. ‘생명 평화, 다시 길을 묻다’라고 되어있는데, 우리가 길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벽에 부딪혔거나 어쩌면 답답한 뭔가가 있기 때문에 다시 길을 묻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아니면 중차대한 과제가 있어 또 길을 묻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각자 다시 길을 묻는 이유가 뭔지 한 번 검토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관옥 이현주 선생님 이번 모임의 주제가 보니까 ‘생명평화, 다시 길을 묻다’라고 정하셨네요. 제가 언젠가 앵무산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들머리를 모르겠더라고요. 그 마을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마침 아주머니들이 그 정자에 앉아서 뭘 먹고 계시더라고요. ‘저 아주머니들에게 들머리가 어디냐고 물으면 가르쳐 주겠지.’ 생각하고 제가 한참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그 정자로 갔습니다. 가서 ‘내가 앵무산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등산로 입구가 어딘지 알려주세요.’ 그랬어요. 그랬더니 모른대요. ‘우리 이 동네 사람 아니에요.’ 그러는 거예요. 길을 아무한테나 물을 수 없잖아요.
여러분은 누구에게 길을 물으십니까? 제 경우에 저는 3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그래서 예수라는 분을 제 마음대로 저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잘 모를 때는 그분께 여쭈어보면서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꽤 오래전 이야기인데, 우리가 학생운동 한창 치열하게 할 때 학생들이 막 떨어져서 죽고 그러던 어려운 시절에 김지하 선생이 어느 신문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라는 글을 썼어요. 저는 그 글을 읽어보지 못했어요. 신문을 안 보니까요. 그 글이 발표된 뒤로 김지하 선생과 같이 민주화운동을 해오던 소위 동지분들이 그를 배반자,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글들이 신문에 막 실리기 시작했어요. 저도 잘 아는 분들이 글을 쓰셨는데, 그것을 보며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정말 아팠어요. 저는 김지하 시인하고는 인연이 안 닿아서 그냥 지나가는 것처
럼 서너 번 봤을 뿐인데, 그냥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이 아팠어요. 아,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을 그렇게 매도할 수 있나? 글 하나 쓴 것으로 인해 그렇게 돌아가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정말 사람이라면, 가까운 친구라면 신문에 그렇게 매도하는 글을 쓰기 전에 한 번 찾아가서 ‘야, 인마 너 무슨 정신으로 이런 글을 썼냐?’ 하고 한번 멱살 잡고 드잡이나 해볼 것이지, 알아보지도 않고 한 번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마치 봇물 터지듯이 매도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내 나름의 실망,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때 제가 죽변교회에 있을 때 설교하면서 만든 주보가 소문이 나서 전국에 독자들이 생겼어요. 제 기억에 한 몇백 장 나갔던 것 같아요. 거기에 내가 예수님의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 본문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잠깐 썼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인간적이지 않다, 너무 살벌하다, 난 하루아침에 동지를 변절자로 매도하는 이런 풍토 문화가 마음 아프다, 뭐 이런 내용을 썼던 것 같아요. 제가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아, 이현주 목사 그럴 줄 몰랐다, 나 사람 잘못 봤다.’ 하는 이야기를… 제가 직접 듣지는 못했고, 그리고 내가 보내는 주보 ‘보내지 마라. 난 안 보겠다.’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판단하지 않는 게 아니라 판단하지 않겠다고 글 썼다가 판단 받았죠. 그분도 왜 그런 글을 썼냐고 묻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 보냈죠. 내게 그것이 늘 숙제로 남아있었어요.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한테 소화가 잘 안 된 거예요. 예수님께 제가 여쭈어봤죠. “판단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판단 안 했는데, 판단 받지 않을 거라 하더니 오히려 판단 받았지 않았습니까, 비판하지 않을 거라 했는데 제가 비판받았습니
다. 선생님 말씀 좀 잘못하신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잘 봐라. 비판하지 마라, 비판 받지 않을 것이다. 내 그렇게 말했지.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나 그런 말 안 했다.’ 맞아요. 성경 다시 읽어봐도 비판하지 마라, 사람들이 너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 없어요. 판단하지 마라, 판단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죠. 너는 지금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만 했지 계속 판단하고 있지 않으냐. 아무개 선생이 이현주 목사 그런 줄 몰랐어, 하는 말을 들었다, 너는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냐? 너를 비판하는 말로 해석했지. 그것 봐. 네가 판단을 하니 판단 당하는 것이지.
그런 식으로 저에게 조금씩 조금씩 가르쳐 주십니다. 그저께는 산을 걷고 있는데 아주 화살 같이 가슴속에 던져주는 간단한 말씀이 있었어요.
‘누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느냐, 누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고, 너를 향해 비난하는 말을 하는 것과 그런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 이 두 가지 질문이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혹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그것과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 이 두 가지 중에 전자는 후자에 비하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 말씀이었어요.
세상이 너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그런 세상을 내가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가 너한테는 훨씬 중요한 문제다. 아까 판단하고 하는 이야기와 좀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저는 제 나름대로 선생님과 대화를 하면서 살아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동네 사람한테 길을 물어야지, 그 동네 처음 온 사람한테 길을 물으면 곤란하지. 자기도 지금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한테 길을 묻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 어디에서 어떤 질문을 해도 다 답을줄 수 있는 그런 스승을 가슴에 모시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기까지 제 말씀 마치겠습니다.
사회자 첫 말씀부터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여기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일단 여기 있는 질문보다 조금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 속에서 혹시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으시면 그 이야기부터 하는게 순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질문 1> 왜 우리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평화롭지 못한 걸까요?
얘기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얘기하는 건 쉬워요. 됐죠?(웃음) 그럼 다음 질문.
<질문 2> 스승을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어느 나라 격언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나타난다는 말, 여러분도 들어보셨죠? 참 묘한 말인 것 같아요. 전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학생이 준비되면 마치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 그 말을 둘러 말하면, 학생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옆집에 공자님이 살아도 그냥 옆집 아저씨이다. 학생이 준비된다는 게 뭔 뜻일까요? 학생은 몰라야 합니다. 자기가 모른다는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냥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시인해야 해요. 아,나는 정말 모른다.
정말 농담처럼 말할 때가 있는데 공자님하고 소크라테스가 짬뽕으로 오셔도 못 가르칠 놈이 있다, 그놈은 못 가르친대. 그게 누굴까요? 아는 사람. 아는 사람을 어떻게 가르쳐요.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배울 자격이 없어요. 일단 학생이 준비된다는 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시인하고 받아들이고,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알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지. 나는 모르지만, 알고 싶다, 저는 그게 학생의 기본자세라고 봐요. 그래서 이것을 내가 누구한테 배워야하나? 내가 스스로 아는 거라면 누구한테 물어볼 이유가 없잖아. 그러나 뭐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고 할 때는 스승이 필요한데, 스승을 찾는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스승이 이만큼 큰 존재인데 그 스승보다 작은 내가 어떻게 그분을 알아볼 수있을까요? 학생으로서의 자세를 돈독하게 가지면 스승이 반드시 나타나서 그를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3> 채식을 하고 싶은데, 치킨을 끊을 수 있을까요?
하하. 그것참, 이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웃음)
이런 건 있습니다. 음식에 중독성이 있잖아요. 저는 신학대학 들어가서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습니다. 왜 피웠냐 하면 채플 가서 예배드리고 나오는데 학생들을 운동장에 쭉 세워놓고서 주머니 검사를 하는 거예요. 왜 주머니 검사를 하냐 했더니 화장실에서 꽁초가 발견됐대요. 이 주인이 어떤 놈인가를 찾고자 주머니 검사를 갑자기 하는 거예요. 담배가 그런 거냐? 하고 피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목사가 된 뒤에도 피웠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개신교 목사들은 담배 피우면 좀 문제가 됩니다. 법으로 말하면 안 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 많은데 서는 안 피우죠. 아무도 없는데 가서 피우고 그러죠. 아, 피우면서도 쪽팔리는 거예요. 담배 하나도 맘대로 못 피우는 거예요. 한번은 어디서 담배가 하도 피우고 싶어서 물고 막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옆에서 누가 막 뛰어오더니 야인마 여기가 어딘데 여기서 담배를 피우느냐 그래요. 감리교는 일 년에 한 번씩 연회라는 것을 하는데 내가 연회를 하는 동대문 교회 마당에서 그러고 있더라고
요. 정신이 없어요. 하여튼 제가 골초였어요. 저도 마음속으로는 야 이게 뭐냐, 드러내놓고 담배를 피우면 몰라도 숨어서 이게, 야 이게 참 치사하단 말이야. 그래서 몇 번 내가 담배를 새로 산 거, 그 싱싱한 걸 변소에 버리곤 했어요. (웃음) 안 끊어집디다. 아, 이분 심정이 저는 이해가 가요.
치킨은 먹고 싶은데 그 병아리가 자꾸만 보이고… 비슷하지 않나, 술 중독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 몇 번 끊었다가 또 피고 그러다 또 피고 그러면서 저 자신이 아, 이건 나한테는 미션임파서블이구나, 담배 끊는 건 나는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했습니다. 그냥 죽을 때까지 피우자, 그때는 교회에서도 나왔으니까 아무 데서나 피워도 되니까. 담배 끊겠다는 마음을 버렸어요. 그것은 버린 게 아니라 포기예요. 왜냐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그 무렵에 식중독을 아주 심하게 앓았어요. 밤새도록 토하고 싸고 토하고 싸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두꺼비처럼 나고 아주 혼이 났어요. 그 뒤로는 고기가 들어가면 두드러기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고기를 못 먹었어요. 그 좋아하는 고기를. 그와 동시에 담배 냄새가 역겨운 거예요. 냄새가 그전에는 달콤했는데 역겨운 거예요. 두세 모금 빨아들이면 웩, 하고 구역질이 나는 거예요. 몸이 ‘이제 그만’, 이제는 못 받아들인다는 신호가 오니 담배가 끊어지데요. 내가 끊은거 아니에요. 못 피우겠어요. 그 뒤로 지금까지 담배를 안 피우고 있습니다. 만약 중독이라고 생각되신다면, 뭐에 대한 중독이든 중독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이분께는 이런 말씀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AA라는 단체를 들어보셨습니까?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입니다. 종교 모임이 아니고 순수한 알코올 중독자들끼리 만나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는, 처음에 창설하신 분이 열두 단계를 밟아서 알코올로부터 해방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지금도 아마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도 들어오지 않았나 싶은데, 어떻게 보면 21세기에 종교의 이름을 달지 않은 새로운 영성운동의 한 모델이 되지 않을까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 AA의 첫 번째 단계가, 나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야 그 모임에 들어올 수 있어요. 나 알코올 중독자다. 그리고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거다, 그걸 솔직하게 시인하는 게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뭐냐면 내 힘으로는 여기서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거예요. 내 자격으로는 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받아들이는 거예요. 두 번째 스텝에서 많은 사람이 나가요. 그렇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안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영어를 쓰니까, 영어로는 Higher Power라는 말을 씁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단계로 쭉 올라가면서 알코올에서 벗어나는 길을 걸어갑니다.
채식을 하고 싶은데 치킨이 자꾸 땡긴다, 하면 치킨하고 싸우지 마시고, 치킨 없는 데가 없잖아요. 나하고도 싸우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높은 힘이 누군지, 더 높은 힘에 도움을 요청하면 어떨까, 모든 중독이 그런 것 같아요. 도박도 마찬가지고, 어떤 중독이라는 것은 자기가 거기서 헤어나려고 하면 안 돼요. 그 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은 중독이 안 되죠. 전 그리 봅니다. Higher Power 그 사람들은 어떤 종교적 색채가 없으니까 기독교 신자들 같으면 예수, 또는 마리아를 이야기할 수 있겠고, 불교 신자라면 부처님. 하여튼 자기보다 힘센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아야겠죠.
전 소위 말하는 무식한 어머니들, 우리나라, 장독대에 샘물 떠 놓고 비는 그런 것들이 왜 없어졌나 모르겠어요. 이게 참 귀한 건데. 정성으로 비는 거죠. 좀 도와주시오,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좀 도와주시오. 간절히 바라면 천지신명께서 왜 안 도와주시겠습니까?
정말 치킨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으면 간절히 본인이 기도 못 하겠으면 옆에 기도 잘하는 사람한테 부탁하던지….
<질문 4> 사랑은 어디서 오나요?
이 질문이 참 재미있습니다. 사랑은 어디서 오나요? 적어도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은 사랑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어디서 온다고 얘기하니까. 내가 사랑한다가 아니라 사랑이 지금 어디서 오냐고 묻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은 내 것이 아닌 거예요. 지금 그런 의식을 하면서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 자체를 보면 사랑이 어디서 오냐고 물으신 건 사랑이 지금 나한테 없는데, 사랑이 나한테 있으면 사랑이 어디서 오든가 말든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나라는 영역 바깥 어딘가에 있다는 것 같은데, 저는 그 말이 맞는다고봐요.
사랑은 어느 한 사람이 사랑하고 말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숨과 같은 거다, 숨. 우리는 각자가 내가 숨 쉰다고 생각하죠. 그렇지만 내가 숨 쉬는 겁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내 맘대로 숨 쉽니까? 아니라는 거죠. 조금만 생각하면 알죠. 내가 숨을 마셨다가 토하는 게 아니고, 좀 더 양심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숨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나라는 게 생기기 전부터 숨이 있는 거잖아요. 나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게 숨이잖아요. 그런 숨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바람에 우리가 사는 거예요. 들어왔던 숨이 나갔다 다시 안 들어 와, 그러면 우리가 가는 거예요.
숨은 내가 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고 숨이 목적어가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숨을 쉰다는 착각이에요. 숨이 나를 살린다, 그게 맞는 말이죠. 안 그럴까요? 사랑도 마찬가지죠. 내가 사랑을 한다, 사랑이라고 하는 게 내가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사랑이 숨처럼 나를 통해서 흘러간다. 그게 사랑의 본질 같아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세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다. 사랑이 어디서 오나요? 라고 질문한 것만 해도 상당히 생각이 진화된 거예요. 어디서 오는지 지가 어떻게 압니까? 어디서 오는지 몰라요, 사실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래도 뭐라고 말은 해야겠고,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하느님한테서 온다고 말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나 살기 위해 너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거꾸로 뒤집은 거야. 내 죽을게 너 살아라, 그런 게 사랑이라고. 사랑은 순수한 거지만 그 사랑이 통과하는 이 인간들 때문에 사랑이 삐뚤어 지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오염되기도 하고 그런 거다. 어디서 오느냐 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냥 사랑이 오긴 와요, 그 사랑이 내 머리통에서 흘러가되 내가 가진 질병과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오염에 의해서 사랑이 굴절되고 깨지고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다면
자기를 순응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마음공부 아닐까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 가능한 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깨끗한 사랑이 깨끗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거야. 우리가 움직이고 먹고, 돌고 일하는 것 전부 그 밑에 들어가 보면 사랑이야. 일그러진 사랑도 사랑이다. 이 질문하신 분이 혹시 연애를 해보신 분이라면 처음 연애할 때 어떤 여자한테 또는 어떤 남자한테 꽂혀서 밤낮 그 인간만 생각나고 괜히 그 옆에 가서 왔다 갔다 하고, 자기가 옆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다들 그래 봤죠? 사랑이그런 거예요.
그래서 둘이 만나서 결혼했단 말이야. 아이고, 이때부터… 처음에는 그 순수한 사랑으로 끝까지 사는 줄 알았는데 착각도 이만저만이지. 다시 인간의 오염된 본성이 나타나서 아, 저 인간이 저런 인간인 줄 몰랐네, 내가 속았네, 그러면서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너도 이만큼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뭐 이런 식으로 아옹다옹 싸우고 하다가 잘되면 잘 성숙하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정말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갈 수 있다고 봐요.
예수님이 당시에 가장 부패한 세력들한테 죽었잖아요, 그래, 나 죽을 게 너 살아라. 그러니까 다 살더라, 그런 이야기죠. 전 그게 사랑이라고 봐요.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거침없이 그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맑고 순수하게 만드는 게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질문 5> 대한민국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그냥 생각하는 대로…
질문하신 분에게 제가 한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질문은 잠시 보류하시고, 내가 사는 이 대한민국에 이 현상에서 나는 오늘 하루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고민을 좀 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 것인가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한다면 그건 그 사람 생각이지. 그 생각대로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늘 당장 나에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졌어요. 현실이 있어요. 이 현실은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어요. 여기에 내가 어떻게 응할 것인가? 내가 오늘 하루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내가 반응할 것인가? 이건 고민할 만해요. 고민해야 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답이 없잖아요. 그래서 질문을 좀 바꾸자, 그런 이야기를 좀 드리고 싶어요.
<질문 6> 선생님도 누군가가 미워질 때가 있나요?
있었어요. 있었죠. 그 친구 생각만 해도 화딱지가 나고… 그러나 지금은 없습니다. 굳이 뭐라고 얘기한다면 좀 짠해요. 불쌍하다고 할까, 어떤 사람에 대해서. 저 친구 참 힘들게 사네, 저렇게 안 살아도 될 텐데 이런 마음이 있고, 아이고 그래 저 친구가 좋은 선생을 만났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선생님이 없어서 그래서 저렇게 허둥지둥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밉지는 않아요. 참 안됐어요. 가능하면 가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데, 그렇습니다. 한때는 미운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없습니다.
<질문 7> 세대 간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볼 때는 이 질문은 지구상의 마지막 갈등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동안은 우리가 인간과 인간을 차별하는 여러 가지 장벽들이 참 많았잖아요. 상놈 양반 같은 거,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사람 등등 대칭 하는 거. 인류에 그런 게 쭉 있었어요.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인류가 점점 소위 인간과 인간을 차별하는 장벽은 많이 무너져 가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것이 인류의 진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얼마 안 살았습니다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반에 푸줏간 아이가 한 명 다녔는데, 그 아이는 괜히 우리한테서 무시당했어요. 지금도 생각해보니까, 따돌리고 그랬어요. 아버지가 푸줏간을 한다는 이유로, 백정자식이라는 이유로. 그러니까 일종의 그런 식으로 인간관계를 차별하는 것은 많이 희석되어가고 있다고 보는데요. 남녀차이도 옛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고, 마지막으
로 남은 것이 세대 간의 갈등, 격차 아닌가 싶은데, 이게 극복이 될까? 저는 극복이라는 말이, 이오덕 선생이 쓰신 글에서 내가 읽었는데, 3만 년 전에 인류가 동굴에 새겨놓은 글이 있다네. 석기시대. 거기 있는 내용이 뭐냐면 ‘요즘 젊은것들은…(웃음)’ 어느 시대나 늙은이들이 볼 때, 요즘 젊은것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그런 말 들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해서 이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그것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도 단, 지금 나이 든 세대보다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발상법을 심어줄 수 있다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이 아이들이 열 수 있도록 우리가 간섭하고 우리 것을 막 넣어주지만 않는다면 난 얘들이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전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각도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그런 눈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나온다면 갈등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갈등 자체가 긍정적으로 좋게 해석되면 아주 좋은 거고, 그럴 가능성은 열린다고 봐요.제가 여러 곳에 가서 자랑하듯이 말하는데 제가 이 아이들과 교실에서 장난 비슷한 걸 한 번 했어요. 15분 동안 시간을 줄 테니 이 캠퍼스를 벗어나지 말고 가장 너희들 눈에 아름답게 물건 하나씩을 찾아와라, 아름다움을 가져와라. 아이들이 15분 뒤에 왔어요. 그중에 한 녀석이 남학생인데, 누군가 먹고 버린 감 씨하나를 가져왔어요. 너, 이게 아름답냐? 어, 그거 아름답죠, 할아버지. 얘가 땅속에 들어가면 싹이 날 거 아닙니까? 싹이 나면 나무가 되는데 그러면 꽃이 피고 열매도 달리고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다음 녀석은 삐쩍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가져왔어요. 이게 아름답대. 왜 아름답냐고 하니까, 할아버지 얘가 살았을 때는 산소동화작용을 했을거 아닙니까? 그 바람에 우리가 숨 쉬고 살았는데,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그날 하늘이 저한테 주는 하나의, 앞으로 다가올 세대에 대한 조짐, 그런 걸 나한테 보여줬다고 봐요. 깜짝 놀랐어요.
한 녀석은 고 작은 감나무 씨에서 무한히 펼쳐질 수 있는 미래를 보는 거예요. 하나는 마른 나뭇가지에서 그 아이가 거쳐 온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과거를 보는 거예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물건에서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거예요. 가르쳐준 거 아니에요. 코치하지 않았어요. 또 한 녀석은 마당에서 잡초를 캐요. 그리고 뿌리 뽑힌 풀을 가져왔어요. 그게 아름답대. 왜 아름답냐 했더니, 얘가 뭔 죄가 있어서 뽑혔어요? 사람들이 괜히 잡초라고 해서 뽑았는데, 뽑혔어요,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도 불평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게 우리 애들이에요. 우리 어른들이 간섭만 안 하면 돼요. 우리의 낡은 사고방식을 애들에게 넣어주지만 않는다면 난 된다고 봐요. 이게 21세기에요. 21세기에 들어서며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없었던 사건이 벌어진 날이 2000년 1월 1일이에요. 2000년 1월 1일, 하루 24시간을 지구를 뺑 돌면서 하루를, 모든 사람이 동시에 하루를 기념했어요. 그것은 인류가 이 땅에 사는 이래 처음으로 있었던 일이에요. 그렇잖아요. 나라마다 달력이 달라서 글쎄 여기 1월 1일이 자기네는 3월 1일이고 그래요. 그런데 1900년대 어느 때부터 전 지구가 서기로 통
일된 거예요. 그 바람에 2000년 1월 1일 하루를 인류가 같이 기원하고 기도하면서 맞이했다는 거예요. 그때 캐치프레이즈가 뭡니까? 뉴밀레니엄, 새천년이라고. 온 인류가 뭐 나라 종족 관계없이 입을 모아 새천년, 새천년 하면서 하루를 맞이한 게 그날입니다. 이것이 새천년이 밝아오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염원이에요. 난 이것이 대단한 사건이라고 보고요,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새로운 천년이 막 시작되는 초기에 있다고 봅니다. 인도의 더 마더에게 누가 묻지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세상은 뭡니까? 인간의식의 변화다, 그러한 세대가 오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물으니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이미 와 있다. 우리가 거기에 방해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조금이라도 그쪽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돕는 쪽에 설 것이냐?’ 이미 2000년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에게서 그런 싹이 보인다. 갈등은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그런 시대는 끝날 것 같다, 그렇게 보는 거죠.
사회자 지금 주어진 질문들은 다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선생님께 박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메모지나 스티커에 쓰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이야기 중에 선생님께 이 질문은 꼭 하고 싶다 하시는 분…
<청중질문> 세대 간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최근까지의 많은 질문은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애가 문제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저 나이 든 사람들이 문제다, 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이라는 거죠. 요즘 나이든 사람들은 아래위로 다 야단 듣고 있는 세대란 말이죠. 그런 속에서 우리는 마음 아픈 가운데 태극기 부대를 보는 마음이 좀 그렇거든요.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불신하는 게 더 크게 와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른들 문제 있다고 손가락질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시대에 비롯된 거예요. 전에는 못 보던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디 언감생심 어른들 이야기했을까요. 이게 벌써 놀라운 발전이에요. 아이들이 어른들말 안 들어요, 전 이게 희망이라고 봐요. 이것은 진화의 한 단계라고 봐요. 그동안 일방적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지시하고 나무라고, 여기서는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으면서 그런척하고, 우리가 그러면서 산 거예요. 용감한 놈이 대들었다가는 얻어맞고, 사회에서는 쫓겨나고.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대놓고 어른들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렇게 안 살겠다고 이야기하잖아. 아이고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진작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좋았을걸. 다만 중간에 서서 양쪽의 비난을 당하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비난하는 사람보다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웃음) 양극이 서로 대결할 때 어느 한쪽에 서는 건 쉽습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면 돼요. 우리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잘사는 거로 생각했지만, 잘 아시다시피 틱낫한 스님이 베트남 전쟁 반대하면서 미국과 월맹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잖아. 그거 왜 그럴까요? 어느 쪽도 편들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양쪽에서 공격을 받지. 그런 길을 가는 것은 대단한 신념과 용기가 속에 있어야 그럴 수 있는가 봐요. 그러니까 그런 것 감수하시고. (웃음) 그 대신 반대로 양쪽에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는 말고.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있는 게 지적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삶의 연륜이 있잖아요. 살면서 경험한 것도 있고, 소위 노인의 ‘지혜’라는 것이 있어요. 거 있잖아요. 제대로 잘 살았으면 저절로 지혜가 생기는 거예요. 그것은 젊은이들이 아직 몰라요. 경험이 없
으니까. 그런 원숙한 지혜의 경지에서 젊은이들에게 적당히 코치하고 권면하고 얘기해 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그렇게 접근하면 젊은이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지. 노인들의 자리는 앞이 아니라 뒤라고 봐요. 앞에는 젊은이들 세우고 뒤에 노인들이 따라가야지. “우리를 거름으로 살아라, 너희들이 거침없이 가거라.” 그런면에서 아이들에게 후원하고 잘한다, 잘한다고 하면서, 야 인마 그건 아니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걸 왜 아이들이 안 듣겠어요.
사회자 자, 오늘 즉문즉설은 이것으로 마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깊은 고요 안에서 스스로 맑아지는 것
조용한 혁명을 꿈꾼 적이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모순과 싸워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었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을 묻고 그 길로 가고자 했습니다. 스승을 어떻게 모시는가에 대한 질문은 길을 어떻게 찾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도 볼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학생이 준비되면 스승이 나타난다, 이 말은 길 찾는 사람에게 새 길이 나온다는 말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말은 다시 ‘깨어있음’이라는 말로 다가옵니다.
관옥 선생님은 모든 질문 앞에서 너 스스로 정의가 되고, 평화가 되라는 말로 진심이 담긴 진리의 진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청중들은 고요하게 앉아 선생님께서 꽤 오랜 시간 꼿꼿하게 앉아 말씀하시는 동안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모두가 같은 눈으로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참 맑고 따뜻한 눈들이었습니다.
채록_사랑어린배움터 연구 제공
귀가 어두우신 이현주 선생과의 소통을 위해 통역자로 자리에 선 사랑어린배움터 9학
년 리강학생을 선생이 소개하고 있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