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무수한 ‘나’들의 약속된 만남 “친구가 되어줄게”

― 빛이 되는 사람 미세마을 농부 김단

내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오는 길을 밝게 비추고 문을 활짝 열어 두었습니다.
노을을 함께 볼까, 눈길을 걸어볼까, 별을 세어 볼까, 바람을 만져볼까.
달이 떠 있는지는 몰라도 돼요. 나도 당신도 혼자 떠 있는 달. 그리하여 하늘과 하늘이 만나는 것은 간절하게 걸어오는 것.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 말해주세요.

우리 지금 만나

만나고 싶었다.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지난 10월 생명평화활동가대화마당에서 만난 김 단을 만나러 먼길을 달려갔다. 햇살이 좋은 가을날이었다. 이런 날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남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얽힌 관계들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으나 우리는 한 번도 만난적 없었다. 생명평화활동가활동가대화마당에서 만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그의 눈물은 글쓴이에게도 잊고 있었던 열정의 숨결을 불러일으켰다. 기차를 타고 두 번의 시외버스를 타고 그를 만나러 장흥을 향해 달렸다. 장흥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따뜻했던 햇살을 등지고 해가 떨어져 어둑해진 밤길에 나를 내려놓았고 그를 만났을 때서야 현실을 자각하고 머쓱해진 나에게 그는 손을 내밀었다. 해남 미세마을 농부 김 단과의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글쓴이는 왜 그를 만나고 싶었는지 오래 이야기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개인의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가로서 어디에선가 반짝였을 20대를 함께 보냈으리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만남이었다.

이야기의 시작, 농부 김 단

신채원 한번 뵙고 싶었어요. 이야기를 오래 나눌 기회도 없었고.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의외로 깊게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아는 사람은 많은데 그게 진짜 아는 걸까요? 생명평화활동가대화마당에서 만났습니다. 이번에 행사는 어떻게 보셨어요?

김 단 그냥 잘 들었어요. 이 행사의 의미는 이거 아닐까요? 우리가 신채원을 만났다? 저는 생명평화활동가모임에 매우 오랜만에 갔어요. 심정적으로 몇 년 전 보은취회 이후로 처음일 거예요. 보은취회도 뭔가 참여해야겠다고 갔다기보다는 가서 육개장 정도 끓여주고 오자, 이런 마음으로 간 거였어요. 우리는 그렇게 안 놀아, 이런 느낌으로 갔어요. 그 즈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선배들에게 가졌던 마음이 그랬어요.

신채원 고마운 일이죠. 함께 한 시간들 자체가요. 그런 모임을 치르고 나면 한 번 더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죠. 저도 여기 이렇게 왔잖아요. 그렇게가 아니라면 우리가 평생 만날 일이 있을까요? 여기 오면서 이렇게가 아니면 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자, 어디에 사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 단 사는 곳을 해남입니다. 여기서 한 시간 거리입니다. 함께 사는 친구들은 해남에 있어요. 배추 농사를 짓고 있어요. 이 이야기에 대해 먼저 말씀 드리자면, 농업적 관점에서 남쪽은 농지 농사를 많이 지어요. 서울에서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관심을 갖고 보면 보여요. 서울 주변은 하우스가 많아요. 청주까지. 전국 물류시스템 때문에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하우스 갯수가 줄어들고 노지 농사 비율이 높아져요. 여러 가지 요인인데, 땅값도 그렇고 물류 시스템도 그렇고 해남은 제일 남쪽이고 제주도 다음으로 따뜻한 곳이니까 겨울철 노지 채소 농사를 많이 지어요. 시금치, 봄동, 대파 이런 것들.

신채원 농사는 누구한테 배웠나요?

김 단 농사는 땅한테 배우는 거예요. 따로 배우진 않았어요. 그냥 지은 거죠. 21세긴데, 유튜브에 잘 나와 있어요. 정말 놀라운 것들은 제가 2010년에 해남에왔으니까, 초반부에 주로 집 짓는 일도 많이 하거든요.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요. 우리가 자연스럽게 만든 룰 중 하나가 1인 1실을 쓰자는 거예요. 절대 같이 자지 않는다. 그래서 방을 계속 만들고 있어요. 2000년대 초반 유튜브를 보면 특히 미국이나 유럽 쪽 방송에서 3~4년 사이에 매우 정교한 기술들을 보여줘요. 난이도가 높다는 게 아니라 디테일하게 궁금한게 생겼고 그것을 보여줬어요. 예를 들어 못을 하루에 천 개씩 박는다고 치면 그게 매우 큰 일이거든요. 사람들이 궁금해할 법한 아주 단순한 것들, 그런 정보를 올려놓기 시작하더라고요. 점점 정보들이 늘어나서 웬만한 것들은 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어요. 사실 농사는 정보량이 충분치 않지만요.

신채원 지난 활동가대화마당에서 살고 계시는 곳의 마을 이야기를 잠깐 듣기는 했어요. 해남에서 어떻게 사시고 있는지 그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단 일단, 마을은 아니고요. 우리가 마을이라고 부르게 된 거죠. 처음에는 농담처럼 부르기 시작했어요. 편지 보낼 때 주소를 ‘미세마을’이라고 썼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네비게이션에 ‘미세마을’이라는 곳으로 검색하면 나오더군요. 그리고 해남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미세마을을 알더라고요. 그렇게 미세마을이 됐죠.

신채원 ‘미세마을’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있던가요?

김 단 그건 물어보지 않았지만, 젊은것들이 거기서 뭐 한다더라, 이렇게 말씀들 하시지 않을까요?

신채원 재미있네요. 그래서 그 젊은것들은 미세마을에 몇 명이나 살고 있나요?

김 단 그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 질문에 답을 하려면 젊은 것들이 ‘왜’ 거기 있는지부터 이야기되어야 하거든요. 일단 현재는 해남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친구들은 10여 명과 그의 가족들이 있어요.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죠. 미세마을 후반부에 형성되었죠. 초기에는 평균적으로 10여 명이 있었는데, 여기 살아야겠다고 한 사람은 없었어요. 들고 나는 사람들이었죠.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사람들이 늘어난 거예요. 저는 스물 아홉, 서른 살 쯤이었어요. 해남에 터를 잡았어요.

신채원 궁금합니다. 어떤 계기로 해남까지 가서 터를 잡을 생각을 했나요?

김 단 개인적으로는 바로 그 이야기가 이번 생명평화대화마당까지 이어집니다. 먼저 개인사를 이야기해 보면, 스물세 살 때 녹색대학이라는 곳에 갔어요.나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져서 뿌리를 찾았어요. 그렇게 찾아서 내려가다 보니 동학까지 가더라고요. 굳이 말하자면 사실 저는 임락경 라인이에요. 아버지는 목회자셨어요. 그만두시고 풀무원 공동체에 들어가 살았어요. 아버지는 지금 식당을 하세요. 정농회 하시죠? 아버지가 정농회의 초기 멤버예요. 그분들이 풀무원 공동체에 살 때가 30대 초반이었을 거예요. 어릴 때 거기 같이 살았어요. 하지만 기억은 별로 없어요. 단편적 기억들, 느낌으로만 있어요.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분위기였고, 큰 식당에 모여서 같이 밥 먹고 기도하던 그런 기억들이 있죠.

신채원 독특한,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들이 성장하면서 보편적 삶을 마주할 때마다 괴리감 같은 걸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 단 중학교 때였는데, 아버지가 목회를 그만두고 해남으로 내려왔어요. 졸업할 때쯤이었어요. 권술룡(2017년 별세) 선생님께서 그때 평화의 마을 고아원 총무를 하고 계셨는데, 그 고아원에서 전국국토순례를 했어요. 때마침 평화의 마을 친구들이 남도 순례를 왔고, 우리집에서 며칠 묵었어요. 그들과 보길도를 함께 돌았고 저도 거기 딸려 갔어요. 그리고 평화의 마을에 살게 되었어요. 바로는 아니었고, 와서 졸업은 하고 가서 거기서 살았죠. 왜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소년 김단은 이때부터 공동체와 학교를 옮겨 다니며 성장한다. 순탄하게 흐르지는 않았다. 다르다는 것은 곧 틀렸다는 것으로 인식되던 환경이었다. 파란만장한 소년 김단의 성장기는 그런 저항 아닌 저항이었으며, 보편적 인식의 틀이 주는 모순과 마주하는 대안이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김 단 그러다가,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녹색대학에 들어갔어요. 녹색대학이 만들어진 배경은 87년 이후에 다양한 시민사회 영역의 활동이 생겨났고 10여 년 후에 나온 반성이었어요. 사회 각층의 사람들이 삶을 전환하기 위한 통합적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는 고민들 속에서 만들어졌는데 충분치 않았어요. 다양한 영역의 선생님들이 모여서 함께 살면서 아카데믹한 공간을 꾸려보자고 만들어졌는데, 저는 그때 군대에 있었어요. 누군가 제게 편지를 보냈어요. 녹색대학이 만들어진다는 부분을 복사해서요. 그걸 보고 말년휴가 때 면접을 보러 갔죠. 그리고 학교에 다녔어요. 거기서 굉장히 많은 공부를 했다고 생각해요. 거의 모든 삶에 필요한 행위, 태도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하지만 그 과정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집단이든 서로의 민낯을 보고 방향을 잃었을 때의 그 상실감에서 오는 상처가 있다. 녹색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너무 오래 마음을 닫았다.)
이번 대화마당에서 미안함을 표현한 거였어요, 그리고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분들과 친구가 될 때가 온 것 같아요. 저에겐 그런 의미도 있었어요. 미안한 마음과 함께, 이제 좀 건방지겠지만 ‘너의 친구가 되어 줄게’

신채원 제게도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다시 해남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해남을 선택한 이유가 뭐였나요?

김 단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쨌든 이것은 실제 삶의 현장이고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고 그 전에 우리가 점거하듯이 했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계산기를 두드려봤어요. 해남은 부모님이 계시고 계속 가난했지만 제가 20대 중반이 넘어갈 때쯤 부모님께서 돈을 벌게 됐어요. 그때 평생 없었던 땅을 좀 사 놓게 된 거예요. 나는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니, 그 땅을 어떻게 해 볼 생각도 없었겠죠. 사실 저는 다른 곳을 가려고 했어요. 해남은 일단 부모가 가진 땅은 있었지만 인프라가 없었어요. 내가 뭔가를 해 보기 쉬운 곳은 산내나 홍동이나 괴산이나 이런 곳이 훨씬 쉬웠어요. 관계 맺고 있던 사람들이 그쪽에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그 판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뛰쳐나왔던 세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럼 다른 곳에 가서 뭔가를 해 보기 위한 물리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생각을 하니 15년정도 걸리겠더라고요.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올랐고요.

신채원 그러니까, 귀농을 결심하고 기반이 되어 줄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신 해남 땅을 선택한 것이군요.

김 단 귀농의 흐름이 있어요. 서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퍼져 나갑니다. 90년대 IMF 이후부터 경기도 근교에서부터 귀농자들이 서울과 가까운 쪽부터 귀농을 시작해요. 그런데 땅값이 오르잖아요. 그래서 어디로 가냐면 봉화, 전북, 완주 이쪽으로갑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진안 무주 장수, 해남. 남쪽 벨트죠. 귀농의 흐름이 그랬어요. 땅값 상승에 따른 귀농지의 변화. 저는 절대 부모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15년 동안 내가 어디 가서 죽어라 일해서 땅 한 2천 평 사서 그때 뭔가 해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타협한 거죠.

신채원 그렇게 해남에 정착해 살면서 지금의 미세마을이 형성되기 까지의 과정도 궁금합니다.

김 단 공동체운동의 흐름에서 보면, 한참 생태공동체 붐이 일었던 때가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이었어요. 우후죽순 공동체 비슷한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대부분 녹색대학이 해체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게 해체됩니다. 생태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만 가득했어요. 저 같은 경우는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한 10년 되니까 사람들이 공동체라고 부르는 거죠. 공동체를 택하는 이유 중에 큰 것은 어른이 없어서였던 것 같아요. 우린 뭘 해 보자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그냥 각자
였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겁니다. 각자가 가진 목표들이 다르니까요. 계속 그냥 변화하는 상태가 이어졌어요.

호수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김 단 ‘나’들의 흐름이 호수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형태가, 물방울이 떨어지며 파동이 생기잖아요. 파동이 넓어지면서 사라지죠, 물방울이 넓어지면서 파동이 생기고, 또 다른 파동이 겹치며 새로운 파동이 생기며 그런 형태로 움직여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내가 해남이라는 공간에서 움직일때도 아마도 그런 느낌이 움직임의 베이스가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신채원 지금 그 공동체로 불리는 곳에서는 무엇을 하나요?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함께 하는 일들에 대해서요.

김 단 공간적 배경 안에서 각자 다른 꿈을 꿀 수도,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앞서 농사에 관해 물으셨을 때, 머뭇거렸던 이유는 저희가 농사를 지어요. 해남의 농부들이 볼 때는 허접한 소규모라고 보실 거고, 외부에서 볼 때는 큰 농사예요. 만 오천 평 가까이 지을 때도 있었거든요. 다양한 품목의 농사를요.

신채원 여기서 더 궁금합니다. 그 작업을 같이 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인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김 단 순례하는 유목민들이 있어요. 나는 다른 공동체는 안 가봤는데, 여기 오는 친구들은 전국의 가볼 만한 공동체는 한 번쯤 다 가본 친구들이 와요. 다른 공동체를 경험한 이미 그 시스템을 아는 친구들이죠. 그런 친구들이 계속 왔어요. 프로그램도 있어요. 1년 살이 등등인데 제 경험상 3개월 이상을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니까.

신채원 저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우리는 함께한 시간만큼 서로를 잘안다고 생각하죠. 서로를 안다고 하는 건 뭘까요?

김 단 그래서 지금 시도해 보려고 해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 한 사람씩 와서 며칠 잠도 같이 자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서로 알아가자는 것, 그리고 앞으로 우린 무엇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자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끝까지 모셔줄게.”

신채원 김 단씨가 지난 생명평화활동가대화마당에서 눈물 흘리며 했던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남았어요. 특히 그동안 선배 세대들에게 품었던 감정의 물결들을 느낄 수 있었어요. 선배들도 언젠가 후배였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선배가 될 것이고요.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선배 세대들도 그들의 젊은 날들을 생각했을 거예요.

김 단 만나고 싶은 거예요. 선배들뿐만이 아니라 20대 움직이는 친구들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을 못 했어요. 그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래서 기회를 만들고 싶어요.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고 싶어요. 제가 해남에 살면서 미세마을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친구들을 만났고, 미세마을은 하나의 울타리가 된 거예요. 나가서 농사꾼들을 만나는 일을 계속 했고요.

신채원 관계의 틀, 그리고 그 안과 밖에서 어떻게 이해를 확장 시키려 했는지 느껴지네요. 그런데 우리 세대가 참 그런 면에서 간극은 점점 넓어지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요. 선배 세대들과 우리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우리의 다음 세대들과도 그럴 거고요.

김 단 정말 엉망진창이거든요. 어마어마하게 싸우는데, 내가 어떤 걸 알게되었냐면요. 아,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한국 남자인가. 그걸 스스로 느끼게 된 거예요. “컵 하나도 안 씻으면서 공동체는 무슨” 이 말이 미세마을에서 처음 나온 말이에요. 미세마을 안에서 나의 삶과 여기서 한 발짝 나간 마을에서 나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차이를 보여요. 여기서는 남자한테만 어른 대접을 해 줘요. 몇 살이든 상관없이. 한살림 조직에 가면 언니들이 숟가락으로 밥까지 먹여줄 기세로 대해줘요. 그냥 그런 문화예요. 그러면서 반감이 들었죠. 그런데 몸이 머리와 다르게 움직이는 거예요. 내가 이런 문화에 굉장히 익숙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는 그래도 보통 사람들이 사는 패턴과 다르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화가 익숙한 거예요. 내 안의 이중성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겁니다.

신채원 많은 고민의 흔적들이 보여요. 과연 그것이 성평들의 문제나 세대간의 갈등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려워요. 사람이 모여 있는 공동체 집단 어디에서나 숙제로 남은 문제들이 있죠. 자본주의와 노동, 사회적 합의나 관습에 대한 문제 의식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을까요?

김 단 한 가지 더 보태자면 공유의 문제도 굉장히 오랜 기간 숙제였고요. 말씀하신 노동 자체에 대한 문제, 시골에서의 노동문제, 이것은 다시 사회적 관점에서의 농업, 노동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굉장히 오랫동안 실험적으로 생각했어요. 지금도 머릿속에 계속 정리하는 중이에요

최초의 이미지,수면 위의 파동

신채원 저는 긍정적인 관점으로 보고 싶어요. 지금은 10년 전과 다르게 뭔가 그런 흐름들이 통하는 시대가 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래서 공동체 문화나 민초들이 이루려 했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그런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김 단 해남에 내려와 10년 흐르고 나서 생각해보니 미세마을 공간에 제가 묶여 살았더라고요. 좋게 말하면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살면서 그 이전에 만났던 선생님들이나 친구들과는 외면하고 살았죠. 그런데 최근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최초의 이미지와 다른 형상으로요. 그렇게 변화되는 다른 계기를 아직 찾지는 못했어요. 분명히 내가 바라보는 세계의 이미지가 바뀌었는데 그것에 대해 정리하는 중이에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인데, 이 수면위의 파동은 2차원이잖아요.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직적인 움직임. 최근 알게 된 거죠. 내가 이 평면만 생각했구나, 헤쳐나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고 현실의 조각으로 계속 실험을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공간 자체의 한계는 없어진 것 같아요. 미세마을의 1기는 질서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어요. ‘나’들로 모인 우리들이 질서 없이 각자의 것들로 빛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그러다가 정착하게 된 사람들이 늘어났죠.

신채원 기억합니다. 2000년대 초반엔 저도 활동가였거든요. 어느 시기를 지나오면서 청년들이 모두 현장을 떠났어요. 이 지점에서 공동체를 지향했던 청년들이 많았어요. 정착을 말씀하셨는데, 정착 이전에 유목민의 삶을 먼저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아요. 청년들은 왜 공동체를 찾아 떠돌기 시작했던 걸까요?

김 단 공동체의 한계, 혼란, 상처를 안고 가는 젊은이들이 있죠. 그런 친구들 대여섯 명이 올해 초에 미세마을에 왔어요. 그런데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처음 만났는데. 한달음에 이야기를 오래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됐어요. 그런 분위기는 유목하던 친구들이 만들어 준 거예요. 전령사들이라고 하죠.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2009년 이후 생태공동체 운동이 무너지면서 상처의 시간을 거쳐 오면서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자기의 것들을 찾는 시기가 왔어요.
예전에는 당위와 철학적인 틀 속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접근했다면 그 경험 이후 나는 어떤 마음으로 여기서 살아낼 것인가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자기 색깔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전엔 모두가 이런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각자가 가진 자기 지역의 특성이나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 보고 적절하게 타협하는 길을 택한 거예요. 저는 그 지점들을 생각하게 됐어요. 서울에서 평생 살던 소비문화에 익숙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레디컬한 공동체에 들어가 정착해서 산다면 못 견디거든요.
완전히 삶의 결이 다르니까요. 그 전에는 그것을 간과했던 거예요. 그런 걸 알게되고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탐구하고 발굴해내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해요.

신채원 미세마을에서는 어떤 색깔로 자기 세계를 그려가고 있을까요? 각자의 색깔이 만났을 때 어떻게 그 빛을 발하던가요?

김 단 미세마을도 각자들은 자기 결속에서 이 모습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를 고민했죠. 색깔로 따지면 회색이라고 하더군요. 환대가 과하면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그게 우리 색깔이 된 거죠. 그런 색깔들이 곳곳에 개인으로, 조직으로 형성되고 테두리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대로 잘 갔으면 좋겠어요. 다만 아쉬운 것은 자기 색깔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른 것들을 못 보게 되는 것이에요.

신채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개인보다 조직을 지향했던 시절의 공동체와 오늘의 공동체는 의식부터가 달랐겠죠. 그것 역시 다음 세대로 넘어오면서 생기는 현상 같아요.

김 단 사실 볼 수가 없어요. 저의 경우는 해남 밖을 나가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상태로 10년을 보냈어요. 뭔가 해결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꽉 찬 느낌으로 시간이 흘러갔어요.

궁금한 이야기

신채원 한가지 궁금합니다. 공동체로 시선을 돌린 이유는 뭔가요? 삶의 방향에 있어서 공동체를 향해서 온 이유가 있나요?

김 단 저는 공동체를 향해 오지 않았어요. 그 단어가 주는 상투성을 배제하고 묻는 질문이라면 기본적으로 처음 이야기했던 내 삶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른 삶을 선택할 여지가 별로 없었어요. 제가 해남에 들어갈 때 세웠던 이미지가 수면 위의 파동, 2차원이었다면 삶의 뿌리를 거슬러 들어가 보고 경험들을 돌아 보았어요. 그 안에서의 어떤 특별한 경험은 어린 친구들을 만나며 느꼈던 것들이에요. 왜 공동체였냐고 물으신다면, 끊임없이 약자들의 삶 속에 사셨던 임락경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냥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신채원 독특한 성장 과정을 거치셨더군요. 그런 삶의 경험들을 사회로 돌리려는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김 단 나는 너무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서 저 투쟁의 현장에 있지도 못했어요. 시골교회에 있을 때 많은 장애인들이 있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일들이 온 건데 나의 삶 속에서 고민한 것은 아니고 지금 다시 되돌려 생각해보면 임락경과 그 이전의 삶을 일궜던 뿌리의 결속에서 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일 태어나는 사람이 약자라는 겁니다. 그런 시대가 된 거죠. 모든 부분에서요. 모든 조건이그래요. 단편적으로 기후가 그렇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죠.

신채원 20대~30대 때 선배들에게 받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이른바 86세대가 아직도 누리고 있는 것들이 많고 다음 세대인 우리는 아직 그들의 그늘 안에 있어요. 그런 면에서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선배들이 우리에게 주지 않았던 것들이 과연 나에게 올까? 만약에 온다면 나는 어떤 언니가 되어야 할까?

김 단 제가 새로운 곳에 가지 않고 부모와 타협할 때, 기성세대가 가진 것들을 내놓아야 할 시대가 왔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성세대가 스스로 구축했다면,다음 세대인 우리는 인생의 절반을 써야 기성세대들이 했던 걸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이룬 것들을 내 놓고 나는 그것을 받아야겠다. 그 말은 다르게 말하면, 내일 태어난 사람은 나보다 약자인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것들은 전령사의 개념처럼 나보다 훨씬 월등한 측면이 있고 그 두 부분을 잘 살려내는 것이 왜 공동체냐고 한 물음에 대한 저의 답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2차원적으로 시간이 헝클어지기 시작했어요. 물리적 공간이 존재하면서도 그 물리적 공간을 뛰어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든 저렇게든 연결되는 상태가 이미지로 떠 올랐고 그것이 시간도 어느 순간부터 거스르더라고요. 예수가 태어난 지 고작 2천 년이에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지난 인간의 역사에
서 이런 혁명적 시도를 했지만 성공한 적이 없잖아요. 당연하죠. 2천년 밖에 안되었는데.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욱 내일 태어날 사람들을 위한 것들, 그것이 어떤 한 축, 공간,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고리들이 생겨날 거다. 그 와중에 한 역할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그림들이 머릿속에 계속 그려져요.

신채원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시나요? 이야기로 풀어본다면요?

김 단 새 판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지금까지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 오는 것은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 줄게” 그것을 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품는 느낌으로 가야하는거구나. 그게 새 판이 열리는 시작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이 진심인가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눈물이 났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니 진심이었던 것 같아요. 다만 그 느낌, 감각, 감정의 상태는 매우 소중한데 또 한편으로는 냉철하게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채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성찰도 보였고, 사람을 보려고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 뒤에 있는 이야기도 궁금했어요.

김 단 고백하면 저도 한편으로는 아등바등 노력하는 중이에요. 기본적으로 나의 사고하는 방식이 최근에는 그분들하고 가까워요. 최근 친구를 통해 보고 듣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발걸음이 달 위를 걷는 것 같아요.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또 그게 가능한 시대가 온 것 같아요.

신채원 김 단씨 개인에게는 이 변화들이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김 단 요즘 ‘개벽’이라는 키워드에 굉장히 고무되어 있었어요. 생명평화운동이라고 표현한다고 치면, 그 말은 좀 무겁다고 생각하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개벽과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들어주는 일인 것 같아요. 만남에는 보수도 진보도 상관 없거든요. 우리가 조직으로 가르고 만나기 전의 생각으로 가를 때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만나고 보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만난다는 것….충분히 빛나고 있는 것들

신채원 그것이 바로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닌가싶어요.

김 단 지역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어요. 설명할 수 없는 연결의 느낌이 있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보면 풍성한 느낌들이 있어요. 그런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거리가 있어요. 자연스럽게.

신채원 만남의 장을 열고 그동안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듣겠다고 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요? 공동체, 조직, 공간 등을 끌고 오면서 면면히 담았던 고민의 흔적들이 있었어요. 이 귀한 경험들을 왜 함께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다 외로울까. 그런데 김 단씨가 와서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봐요. 직접 만나서 길을 모색하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 단 1년을 보내보고 판단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네트워크를 쪼개면서도 쪼개지지 않는 상태로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지를 시도할지를 판단하려는 시간을 보내려는 거예요. 모색이라는 말은 좀 거창하고요. 내가 외면해 왔으니까. 미안해서요. 이 과정을 거쳐서 한사람 한사람이 이 다른 흐름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면 해 보겠다는 거죠. 밀레니얼 세대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채원 삶의 결이라는 게 있잖아요. 물론 살아온 환경이나 지향하는 가치라는 게 있을 거고요. 김 단씨에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기반은 무엇인가요? 저도 비슷한 결로 흘러왔기에 쉽지 않다는 걸 알거든요.

김 단 허병석 목사님이라고 계세요. 녹색대학에서 만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렇게 저렇게 인연이 많았더라고요. 빈민운동 하시던 분이셨고. 제가 생각 하기에 가장 사람을 하늘로 잘 모시던 분이셨어요. 누구에게 무언가를 하자거나 이런 말씀을 하시기 보다 그 현장을 살아내신 분. 주장하지 않으셨고요. 저에게는 삶에 있어서 선택의 기로나 고비가 오고 그럴 때 그분이 기준이에요. .

신채원 내가 이런 일을 했을 때, 상상하는 모습이나 잘 되었을 때의 느낌이있나요?

김 단 저는 상상하지 않아요. 기대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고리’라는 거 있죠. 끊임없이 저도 한 무리, 관계들 속에서 내 빛의 기둥 같은 것을 세우려고 계속 기대하고 생각하고 노력하면서 산 거죠. 그게 생명운동이나 공동체운동이나 마을운동이라는 틀과 상관없이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젊은 친구들을 만나고 나서, 빛나고 있는 것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이 그 빛을 끌고 갈 수 있고, 자기를 키워 온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 빛을 잘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신채원 저도 그랬어요. 100년 전, 120년 전에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내 걸었던 질문들이 왔고 그 선택이 저에겐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에 남기는 것이었어요. 저의 방식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김 단 저에게 최제우와 최시형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에요. 아마도 이 사람을상상해본다면 리더로서의 역할도 있었겠지만, 수십년을 돌아다니며 한사람 한사람을 하늘처럼 모시며 듣는 일을 하시지 않았을까, 그게 고리의 역할을 하셨겠다 생각해요. 기록되고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지만 이제는 여러 사람이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거고 그 자체가 장이 된 것 같아요.

신채원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같은 듯 다른 길을 걷고 다른 듯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김 단씨의 앞으로의 발걸음을 응원합니다. 또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보태고 싶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한 곳에 앉아서 한사람을 오래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한사람이 불러낸 무수한 ‘나’들이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았을 때 안도했다. 그렇게 ‘나’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김 단은 이미 새 길을 열었다. 전남 장흥의 고택 ‘오래된 숲’이라는 공간에서, 장흥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하고 춤 추는 ‘나’들을 불렀다. 또 누구든 쉬어갈 수 있는 ‘지구시민 홈 네트워크 in 자응 <자전거가 잇는 길 우애집>이라는 프로젝트도 오픈했다. 김 단이 펼친 새 판에 ‘나’들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함께하는 방법은 한 가지. 그냥 가면 된다.

김단 _ 1980년에 태어났다.해남 ‘미세마을’에서 농사짓는 농부로 살고 있으며,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며 나누는 삶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개벽’이라는 키워드에 굉장히 고무되어 있었어요. 생명평화운동 이라고 표현한다고 치면, 그 말은 좀 무겁다고 생각하는데 달리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개벽과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요.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들어주는 일인 것 같아요. 만남에는 보수도
진보도 상관 없거든요. 우리가 조직으로 가르고 만나기 전의 생각으로 가를 때는 만날 수없는 사람이지만 만나고 보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만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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