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걸어서 별까지, 두더지가 걷는 법

―김민해, 사랑어린배움터 촌장.

당신은 지도에 없는 섬, 천년을 비껴간 별
달은 닳고 닳아 아주 없어지곤 했지
돌멩이인 줄 알았지, 신들의 발자국이었지
모래알인 줄 알았지, 살아있는 자들의 눈물이었지
그러므로 당신의 섬 어딘가에는 늘 저물지 않는 해가 산다
사랑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다 알겠다


섬 소년처럼 웃었다.
사랑어린배움터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에 있는 대안학교다. 그곳을 찾아 김민해 촌장을 만났다. 이곳 사랑어린배움터에서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는 김민해촌장과의 만남은 글쓴이에게 끝없는 책처럼 모험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알 수없는 사람이었다.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람, 김민해 촌장을 만나러 간다. 밝혀두건대, 이 이야기는 김민해 촌장이 걸어온 인생을 듣고 글쓴이가 눈을 감고 더듬어 걸어 본 길이다. 사실과 다르거나 담아내지 못한 말들에 대한 책임은 모두 글쓴이의 몫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난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이런 인터뷰는 처음이야, 앞으로도 이런 인터뷰는 거의 없을걸.

신채원 오랜 이야기를 누군가는 한 번쯤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됩니다. 참 바쁘시네요.

김민해 바쁘다기보다는 그냥 사는 거라고 봐요. 올해부터 고등과정을 열게 됐거든. 민과 관이 함께하는 실험을 해 보는 것에 의미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민과 관이 교육을 중심에 두고 건강한 교육을 실현해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위탁교육기관’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거지.

신채원 제도와 현장은 다르잖아요. 그에 대한 우려도 있었을 것 같아요.

김민해 그래서 조율을 한 거지요. 위탁교육기관이라는 제도의 옷을 입고 내용은 같이 추구해보고자 하는 교육의 내용을 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채원 제가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조금 다른 성장의 과정이었어요. 우리가 보통 성장이라고 하면 더 빨리, 더 크게, 더 높이, 이런 말들을 떠올리잖아요. 이른바 수직적 성장을 내려놓고 출발할 때 무엇을 지향점에 두고 오셨는지, 여쭙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많았을 것 같고요.

김민해 여기 온 지는 12년째예요. 이 과정들이 옳고 그르냐는 잘 모르겠고 우선 하나는 아이들이 여기에서 교육을 받고 또 어디에선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참 자랑스러워요.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구나. 다른 하나는 이른바 물질이 우선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움터 살림살이가 부족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요, 우리는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씁니다. ‘양입이위출’(量入而爲出)이라는 말이 있어요. 들어오는 돈을 헤아려서 나갈 돈을 쓰는 것. 이 자체는 자본주의 방식이 아니지. 자본주의 방식은 내가 쓸 것을 생각해서 돈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대안교육 현장도 거의 비슷해요. 이렇게 실험해보고 있는 모습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아는 사람들은 알아요. 삶을 자유롭게 하는 거죠. 자본과 물질로부터의 자유죠.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자유인데, 물질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로워져야죠. 돌이켜보니 이렇게도 살 만해요. 다른 대안교육현장에 비해 부족하지 않아요.

왜 대안교육이었나?
신채원 꿈을 이루어가는 데 그 꿈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자본이죠. 시대적인 배경을 여쭙습니다. 대안교육은 왜 생겨났을까요?
김민해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영광의 성지고등학교에서 처음 대안교육을 시작했어요. 그 시기 인류가, 한국 사회가 하나의 흐름에 있었어요. 새로운 문명, 또는 문명의 대전환이 시대적 화두였어요. 교육만이 아니고 의료계통도 마찬가지 대체의학, 생명의학, 농업도 생명농법 등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문명 전환의 큰 흐름들이 생명을 찾아서 갔죠. 운동도 마찬가지. 생명평화도 그 시기에 나온 말이에요. 그때는 인간 존엄, 이건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이런 것에 대한 자각이 있었어요. 근대, 산업사회를 통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환상에서 현실을 본 거죠.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끝을 예견한 사람이 없었다잖아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천년을 이야기했어요. 이를 의식한 사람들은 그런 저마다의 길을 인연 따라간 거죠.

신채원 당시 사회적인 흐름도 함께 보입니다. 87년 체제 이후 우리 사회가 마주해야 했던 시대적 전환이 있었죠. 물질과 문명의 전환이 요구되던 시기였어요.

김민해 한국 사회는 크게 민주화 운동의 길에 서 있다가 정치, 국가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인간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올 수 없다는 자각이 함께 있는 거예요. 그렇게 길을 찾아 자기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거죠.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없었다, 청춘이었으니까
신채원 이야기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겠군요. 80년 광주 이야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주에서 자라셨죠? 이 사회는 광주에 진 빚을 평생 갚지 못할 겁니다.

김민해 저는 그때 군대에 있었어요. 80년 5월에 군대에서 큰 사고가 났어요. 그때 군대에 있지 않았다면 나도 현장에 있었겠죠. 뻔하죠. 광주에서 자랐으니 쉽게 예측해볼 수 있는 이야기죠. 그 마음의 빚이 있고, 나는 어떤 빚을 갚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죠.

신채원 저는 다음 세대로서 가지고 있는 부채 의식이 있습니다. 광주도 그렇고 거슬러 올라가 4.19, 3.1운동, 동학. 이런 부채를 가지고 흘러오는 것 같습니다.

김민해 역사는 하나의 자산입니다. 우리가 이 지점을 잘 봤으면 좋겠어요. 잔혹한 그런 역사 위에 발을 딛고 올라 서 있는 것도 실상이고 그런 과정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꽃피워내는 한 축의 역사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부모 세대들만 해도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어요. 우리 한국 사회가 원만한 생각을 갖기 매우 어려웠고 갖는다고 해도 드러나는 모습은 한쪽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는 아픔이 있는거죠. 예를 들어, 나도 내 부모님을 이해하려면, 이분들은 교회 안에 갇혀 있어요. 나는 건강한 신앙인이 아니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에요. 부모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아름다운 유산이지만 그 유산이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그분을 탓할 수는 없는 거죠.

신채원 부모님 이야기를 하시니 좀 사적인 이야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게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궁금합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김민해 : 나는 나주에서 태어났어요. 시골이었죠. 중학교 때 광주로 유학을 갈 정도로 저에 대한 기대가 컸겠죠. 나는 나대로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어요. 지나고 생각해보면 행복한 집안에서 자랐어요. 내가 큰아들이에요. 3남 2녀 중 장남인데 같은 형제라도 내가 경험한 어린 시절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다르더라고.

신채원 지금의 나이에서 돌이켜보면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함께 한 시대를 건너온 관점에서 바라본다면요.

김민해 우리가 적어도 역사를,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넓고 풍성하고 넓은 눈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분들이 살아 온 삶의 현장에서 삶의 배움이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오직 먹고사는 문제만이 절박했고 자식을 잘 교육시키겠다는 생각 외에는 없었어요. 나에게 아버지는 한편으로 나쁜 사람이었지.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냥 아버지로서. 사람으로서. 그 시대를 겪었던 한 사내, 한 사람이야.

신채원 한 사내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했나요? 아버님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김민해 나도 나이가 마흔이 넘고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화가 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뭐 저런 인간이 있나 싶었던 모습들이 짠하게 보이는 순간이 오더라고. 지금은 거의 벗이야, 벗. 내가 목회를 하게 된 데에는 아버님 영향이 컸어. 나는 모태신앙인이야. 3대째. 나는 나처럼 족보가 있는 신앙인이 몇 안된다고 말하지. 아버님이 개화된 분이셨어요. 교회 일을 열심히 하셨던 분이시지. 마을 교회에는 목사님이 1년에 두 번인가 왔어. 목사님이 안 계시는 동안 1년 살이와 목사 대신 모든 일을 아버님이 하셨어. 나에겐 그런 기억이 나.

신채원 어떻게 보면 아버님이랑 비슷하게 살고 계시네요.

김민해 닮고 싶었던 점도 있었고 두 가지 다 있는 것 같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났지. 집에서 자랐다면 더 반항했겠다 싶은데, 또 집을 떠나면서 더 반항하기도 했었지. 싸움을 많이 했어. 유치장에도 가고. 고등학교 때는 아버님이 나를 호적에서 파낸다고 하셨을 정도니까. 이미 그때 아버님과 내 관계는 끝난 것 같아.

신채원 성장하는 과정이었겠죠. 지금 뵙는 모습과 상상이 잘 안 됩니다.

김민해 철없이 지냈지. 중학교 때 제주도로 도망가려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된 적도 있어요. 그때는 서울이나 제주도로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 친구들은 중학생이었지만 나보다도 훨씬 더 다른 세계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고 그런 꿈을 실현해보고 싶은 것이 강렬했지. 내겐 광주만 해도 굉장한 곳이었거든. 광주에 와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아이들을 만난거야. 나는 참 순진한 아이였어요. 시도 때도 없이 웃는 천진난만한 아이.

신채원 지금도 그 얼굴이 있어요. 소년 같은. 그래서 그 소년은 어떻게 성장했나요?

김민해 내 안에 있는 욕구, 욕망 그때 있을법한 그런 것들이 고등학교에 들어 가면서 힘의 세계와 인연이 되었어. 힘이 지배하는 세계 말이에요. 어떤 힘을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좋게 보였어. 어떤 선생님은 잡고 있는 권력, 힘을 우리에게 썼고 어떤 선생님은 같은 힘인데 우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을 향해 싸우는 선생님도 있었단 말이지.

신채원 닮고 싶은 어른이었겠네요?

김민해 그땐 그랬어. 그런데 크고 보니까 그것도 아니야. 사람을 돈의 힘으로 이용하는 사람들, 어려도 그건 우리가 알아요. 선생님 중에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더라는 거지. 여전히 지금도 그런 멋진 사람은 만나기 어려워. 그게 멋지게 보여서 ‘주먹세계’에도 자연스럽게 간 거지. 지나고 보니 그건 한 시대의 인연이지. 내가 몸담고 살아야 할 세계는 아니었지.

신채원 언제 한번 트럼펫 연주를 듣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회적 모순에 눈뜨게 된 것은 광주 5.18에 대한 부채였겠군요.

김민해 그때가 85년 전후였어요.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단체로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추협이 있었어요. 그 시절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에 있던 분들이 비판적 지지를 하며 나뉘는데, 나는 DJ쪽으로 인연을 맺게 돼요. 군대 제대하고 나서 87년을 맞이하게 돼요. 사회에 눈을 뜨게 된 거죠. 내 인생에 대한 질문과 맞물리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 그 중심에 예수가 있었어요. 스무 살 전후에 스스로 했던 약속이 있었는데, 예수처럼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예수도 서른쯤 뭘 했다던데, 나도 그쯤 되었을 때 그런 삶을 살겠다는 꿈을 조심스럽게 갖게 됩니다. 한 시대, 한 역사에 평범한 소시민, 그 시대를 살았던 청년으로서 모두가 거리에 나가서 경험한 것처럼 나도 그런 경험을 하고 정치운동의 길로 들어선 거죠. 그 경험이 참 중요 했어요.

신채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셨나요?

김민해 DJ쪽 캠프에 들어가서 1년 남짓 거기 있었어요. 거기서 정치의 이면을 보게 된 거죠. 나름대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몇 명 되지 않아요. 이렇게 소꿉장난처럼 국가를 운영하나 싶었죠. 또 하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 겁니다. 선거를 통해 본 정치적 욕심과 욕망들을요. 그 과정에서 20대 초에 꿈꿨던 것을 생각나게 했죠.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질문하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 거죠. 그것이 또 한편으로 교회 안에서도 나의 갈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 경험으로 인해 그러면서 질문하게 된 거죠. 내가 직접 공부해야겠다.

신채원 그러니까, 인생의 화두를 준 사람은 예수네요.

김민해 결과적으로 그렇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신학의 과정을 통해서 할수록 오리무중인 것 같아요. 예수에 대해서는요.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떠나야 한다, 정치를 떠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부적응아죠. 학교도 적응 못 했고, 음악도 그랬어요. 정치도, 종교도 그렇고요. 2~3년 전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이 길을 가기 위해 나에게 필요했던 일이었구나.

신채원 그러게요. 돌이켜보면 인생은 버릴 게 없어요.

김민해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에겐 예수도 필요했고 노자도 필요했어요. 그리고 지금 말씀드렸듯이 부모와의 만남, 청소년 시절의 경험, 이런 것도 그런 방황이라면 방황이었겠죠.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일도 많은데 그런 것들이 다 나에게는 이 길을 가기 위한 하나의 꼭 필요했던 여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가벼워졌어요. 버릴 게 없다는 말이 맞아요.

내가 무엇이 되어, 당신에게 무엇으로든
신채원 이제 청년기에 들어서게 되네요.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에요. 자, 서른이 되고 보니 어떻던가요?

김민해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때였어요. 맨몸으로 어디 가서 밥은 얻어먹고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그때 내가 고향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 생각했어. 아버지 옆.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거리가 광주였고 신학도 광주에서 했지. 그때 신학과 함께 만나게 된 게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이예요. 민주화 운동과 직접적으로 깊이 만나게 된 계기는 그때였어요.

신채원 가장 치열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저도 그 시절 한 켠으로 잠시 다녀온 것 같습니다. 새 세상으로의 열망이 가득했던 시절 목회자로서의 삶을 택하셨어요.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었나요?

김민해 그때까지만 해도 내 속에는 예수가 살아있었어. 물론 그 20대도 어린 시절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건데 그런 점에서 내가 부모님의 은혜를 잊어선 안되지. 나에게 신앙을 주신 거니까요. 기도하게 하는 힘. 인간이 기도할 때, 그만큼 인간다울 수 있을까요.

신채원 저도 그래요. 인간이 기도할 때의 절실함, 한없이 겸손해지고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이 많이들어요. 저에게는 선언이에요. 내가 이런 사람으로, 이런 상태로 있겠다는 선언. 그렇게 하니까 할 말이 많아지더라고요.

김민해 누가 나를 기억할 때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 이렇게 사람들에게 기억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인간의 존엄을 가장 극대화시키는 몸짓이라고 봐요. 동학에서도 수운이나 해월 선생님의 모습도 기도를 통해 메시지를 받으시잖아요. 그분들만이 아니고 내가 바라본 우리의 선조들이나 앞선 모습은 예외 없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어요. 기도가 그들의 삶에, 그들의 일상에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젊은 시절 신학할 때는 세상이 이런데 무슨 기도야,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기도를 치부하고 살았지. 내 질문이 구체화 되고 신학을 하게 되고 민주화의 과정에 사람들과 인연이 되며 지적 방황을 한 것 같아요. 목사의 길을 가면서도 이게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몇 년 안 되어 하게 돼요. 그리고 인연이 된 것이 교육입니다.

신채원 제가 깜짝 놀랐어요. 교육학 석사 논문을 ‘동학’으로 쓰셨더군요. 제게 동학은 잘 모르신다고 하셨잖아요. ‘동학의 인본주의 교육사상과 교육방법’(1998)이었죠?

김민해 그러게요. 참 인연이라는 게 놀라운 거죠. 성지고등학교에서 원불교라고 하는 신흥종교를 알게 됩니다. 원불교의 발상지인 그곳에서 막 발흥하는 신흥종교의 건강성과 이면성을 본 거죠. 왜 동학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그때 당시 민중교회라고 해서 종교와 교육 민중에 대한 화두가 있었거든요.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교육의 모티브를 동학에서 찾으려고 한 것 같아요.

신채원 목회자와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방향,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 걸어오신 길마다 새로운 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해 교육은 자연스럽게 기성 기독교와는 멀어지게 되는 계기였어요. 동유럽 몰락의 과정이 있었죠. 한국 사회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 몇 년 잠잠했어요. 사회운동은 힘을 잃었고, 대개 기독교 운동하는 사람들이 현장을 떠나서 교회로 다시 돌아갑니다. 기성 교회로요. 좌절이 너무 컸거든요. 이렇게 노력해도 안 되는 거구나, 하는 무력감이 있었어요. 그 사이 나는 이게 아니구나, 어떻게 하든 교회를 떠나려고 했어요.

풍경소리 이야기
신채원 이야기를 좀 돌려서, 풍경소리 이야기를 좀 여쭙고 싶습니다. 20년 넘게 풍경소리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계시더군요. 풍경소리는 발행 방식이 조금 독특하더라고요. 제가 잡지 발행에 실패했을 때 어떤 분이 풍경소리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김민해 처음에 ‘까치밥 있는 마을’이라는 교회 소식지를 냈어요. 이현주 목사님이 소식지에 글을 한 편씩 보내셨어요. 그리고 그 소식지가 종간되면서, 마지막 글의 내용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떤 일을 하다가 그만 둔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축하한다, 훌륭하다. 이것이 이렇게 중단되지만 언젠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길 바란다는 글이었어요. 그 뒤로 가끔 뵐 때면 다음 책은 언제 나오냐는 말씀을 가끔 하셔서 그 힘으로 시작하게 된 게 풍경소리예요.

신채원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우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발행을 할 수 있나 없나 위기도 있었을 테고요. 풍경소리 맨 뒤 페이지에 독자들에게 쓰는 글을 보고 20년간 발행해 온 정성과 마음을 저는 봤어요. 그 세월이 거기 다 있는 거예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제가 해 봐서 알아요.

김민해 그 이야기를 하시는 분은 처음 봐요. 이렇게 20년 넘게 이런 모습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전적인 힘은 관옥 목사님 힘이지. 물론 처음 약속한 것이 있었어요. 세 가지인데, 발행할 수 있는 돈이 들어오지 않거나, 글이 들어오지 않거나, 발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사라지거나. 이 중 어느 것도 충족되지 않으면 하늘이 그만두라는 신호로 알고 그만두자고요. 지금까지 한 번도 발행을 멈춘 적이없습니다. 글과 발행비는 늘 발행할 수 있을 만큼 들어왔고 물론 그 안에 어려움이 왜 없었겠어요. 발행비보다 남아있을 때가 많았지만 부족할 때도 있었어요. 글도 마찬가지였죠. 상당한 세월 글이 채워질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죠. 글을 요청하지 않는 것, 누구에게 손을 벌려 발행비를 내게 하거나 글을 청하지 말자는 것도 전제였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신채원 그야말로 하늘이 허락하면 발행이 되는 거였군요. 지금 사랑어린 배움터의 운영 방식도 그런 경험에서 오늘 걸 테고요.

사랑어린배움터, 아이들이 자라는 곳, 사랑어린 사람들
신채원 다시 배움터 이야기입니다. 배움터에 함께 계시는 분들을 만나면서, 이분들이 어떻게 지내시는지를 보게 되었어요. 보면서 느낀 것은 아, 이곳은 수행공동체구나. 우리는 사랑어린사람, 이런 끊임없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을 봤어요. 매일 아침 명상과 몸풀기, 산책은 강력한 기도와 선언의 한 방법으로 봅니다.
김민해 누군가가 의식하든 안 하든 지향하고 있는 거죠. 내 인생도 그랬어요. 그땐 어떤 일이 왜 일어나는지, 왜 이런 경험을 하는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아, 이런 거였구나. 알게 될 거라고 봐요. 그런 힘과 에너지가 여기 깃들어 있다고는 봅니다. 그런 기운들을 누구나 와서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느끼셨다니, 이곳의 에너지와 소통한 것으로 볼 수 있겠고요.

신채원 학교 이야기를 오래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바삐 보여요. 그 이야기를 소개해주세요. 어떤 변화들이 있는지. 또 이 변화들은 어떻게 맞이하고 계시는지를요. 작은 변화, 큰 변화를 거쳐왔겠죠.

김민해 이 변화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했을 뿐 처음부터 예견된 변화였어요. 처음 시작될 때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전후 문명의 대전환, 새로운 천년은 시적 화두가 되어 있었죠. 이 배움터를 보면서 시대적 흐름과 같이 봐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신채원 이 공간 자체가 주는 기운도 저는 굉장하다고 생각했어요. 공간을 가꾸고 다듬는 사랑과 정성이 놀라웠어요. 손 닿지 않은 곳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작은 것들에도 시선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간절함이 보였습니다.

김민해 간단합니다. 우리가 실력은 없다, 실력이 없으니 정성이라도 쏟자. 정말 그래요. 살아보니 실력보다 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눈 떠가고 있는거예요.

신채원 최근 눈에 띄는 변화가 많은데 저는 지금 감지할 수가 없어요. 소개해주시면 좋겠어요

김민해 : 우리가 내건 것은 새로운 천년, 새로운 교육, 새로운 사람. 이것이었어요. 그렇게 사랑어린마을을 꿈꾼 것입니다. 지금 공사하고 있는 공간은 사랑어린배움터와 관옥나무도서관의 별관으로 활용될 것입니다.

신채원 아이를 키우려면 온마을이 필요하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김민해 두 가지로 봅니다. 그 메시지와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이런 메시지가 중심이 되었다고 봐요. 그렇게 진화해 온 거죠. 아이를 바르게 키우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성숙시켜내는 데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거죠. 우리는 공공도서관이라는 걸 지향하면서 시작했어요. 도서관을 세운 일이 학교의 큰 변화였고 그 사이 과정에 순천수도원이 있죠. 함께 기도하는지 삼천일 정도 됐어요.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 그런 것들이 수도원의 꿈을 꿔 보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요.

신채원 보이는 사람은 보겠죠.

김민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세월이었어요. 허허벌판에서 10여 년을 보낸 거죠. 그러다가 세월이 또 한 번 변했어요. 내부적으로 변화가 가져왔어요. 선택의 여지가 몇 가지 없어지던지, 처음의 마음을 버리고 변질되거나 놓치지 않고 한 걸음씩 가는 길이겠죠.

이름은 하나인데

신채원 민해, 일부, 두더지 이 이름들로 불리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스스로 지은 이름 ‘민해’는 민중 해방의 민해라고 하셨어요. 이제 별명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일부, 두더지로 불립니다. 어떻게 만난 별명인가요?

김민해 예수에 대한 질문, 가난에 대한 질문을 갖고 신학을 했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 이름이에요. 민해. 그리고 일부는 관옥 선생님께서 산책 하시는데 나에게 일부라는 이름이 떠오르셨대요. 한 사내라는 뜻인데 그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가 나에게 숙제지. 스스로 지은 민해라는 이름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봐요. 관옥 선생님을 뵌 지 얼마 안 됐을 때 해불양수라는 글씨를 주셨어요. 해불양수란, 바다는 어떤 물도 거부하지 않는다. 라는 뜻인데, 그렇게 잘 사는 사람은 일부라고 불리겠죠.

신채원 관옥 선생님은 스스로 당신은 예수에게 길을 물어가며 사셨다고 하셨어요. 정말 큰 이름을 주셨네요

김민해 내가 아니더라도 누가 됐든 많은 사람들이 한 시대를 살다 가는데 그런 역할을 하고 가면 좋겠지. 우리가 해월을 이야기하는 것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 아닐까요. 그분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을 우리가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거지.

신채원 두더지라고 불리게 된 이야기도 있죠. 개인적으로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책에 나오는 ‘두더지’를 저도 좋아합니다. ‘두더지’처럼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김민해 이곳과 인연이 되어 내려온 지 2~3일쯤 됐을 거야. 몇 년 만에 전화를 해 온 후배가 형은 참 두더지처럼 살아. 왜에? 하고 물으니 아무것도 안 하는것 같아도 뭔가 하고 살더라는 거야. 그래? 괜찮은 말이네. 하고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그때 학교 다니는 아이가 아저씨 누구예요? 하더라고. 나? 두더지! 그러니까 아이가 깔깔 웃으면서 두더지? 두더지! 하면서 좋아하더라고. 이 한마디 오고 가는데 아이와의 관계가 무장해제가 된듯한 느낌을 받은 거야. 자연스럽게 두더지다 그게 순식간에 아이들에게 인식되더라고. 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불만도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걱정과 우려는 의미가 없었어. 아이들이 결코 상대를 무시하거나 버릇없어지지 않더라는 거야. 훨씬 더 사람을 신뢰하게 되고 관계도 깊어지고. 쉽게 대화를 하게 되는거야.

신채원 수평적 관계로 갈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호칭이네요.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관계에서도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을 부르는 과정에서 쌓이는 신뢰 그런 것들이 아이들 자존감과도 연결될 것 같아요

김민해 두더지 이야기를 좀 하면, 광주에서 책방을 할 때 마르코스와 안토니오할아버지라는 책을 재미있게 봤어요. 거기 등장하는 두더지라는 존재도 새롭게 다가왔어요. 자기를 들여다보는 존재, 그렇게 강해지는 존재. 그 이야기의 핵심은 자기를 볼 수 있는 힘이라고 하잖아요. 그건 신의 영역에 있다는 건데. ‘두더지는 강하다네’ 이건 내 인생에 있어서도 평생의 화두지. 그동안 난폭하고 천방지축인 삶을 살아 온 것도 그런 힘이 없어서, 약해서 그랬구나, 하는 것도 그것 때문에 알게 되었어.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은 결코 누구를 함부로 대하거나 난폭 해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어. 문제해결을 하는 출발선도 자기를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말고 없더라고. 좋은 이름이야. 두더지.

신채원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두더지 씨는, 말 못 할 슬픔도 아픔도 많은 분 같아서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또 그런 큰 그림자들이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삶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나요?

김민해 한때는 참 부지런히도 성실하게 기도를 했던 적은 있지요. 지금 가진 큰 바람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행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 그런 기도지. 나에게 스스로는 내가 누구인지는 알았으니까. 그렇게 존재하면 좋겠다. 지구별에 몸을 빌어서 이곳에 온 것은 그것 하나 알고 배우고 가는 것이야.

마을인생학교
신채원 다시 처음에 말씀하신 마을인생학교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민해 마을인생살이는 청소년을 위한 전환학교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인 17세가 되는 아이들에게 1년간 쉼을 주는 거죠. 도교육청과 같이 하는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아이
들 중 원하는 아이들에게 1년을 학교 공교육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올해는 15명을 실험해보려고 합니다. 병들어가고 죽어가는 이 현실에서 그저 외면할 수 없으니까 하나의 몸짓이에요.

신채원 인상 깊게 봤던 게 부모를 부모로만 인식했지 부모도 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못했거든요. 이곳 사랑어린배움터에서의 부모교육, 부모들과의 연결고리들을 자세히 봤습니다.

김민해 같은 선상에서 나온 모습입니다. 학생배움보다도 부모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가 있는 가정이 함께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어렵다는 생각이었어요.

신채원 저는 그렇게 봤어요. 부모를 한 인간으로 저 사람도 언제든지 약해질 수 있는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구나. 직접 학부모님들을 만나니 그분들은 아이를 여기에 ‘맡긴다’로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스스로 이곳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김민해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부모들도 함께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아서 함께 키운다는 것이고 그런 부모들이 많아지면 좋은 거죠. 마을 인생학교는 일반적으로 회자 되는 평생교육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 것을 조금 더 현실화시키고 구체화시켰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런 꿈을 그리고 있는 거고, 교육청과 함께 실현해보는 장입니다.

신채원 리을리을, 사랑어린배움터를 상징하는 무늬를 이렇게들 부르는데요, 안상수 선생께서 만들어주셨다고 들었어요.

김민해 고민을 했대요. 사랑이라는 말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를요. 동학에서 말하는 ‘궁궁’, 거기서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일종의 유토피아지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발상지를 의미하기도 하고요. 해월이 찾았던 궁궁처처럼, 여기가 리을리을마당, 리을리을배곳, 리을리을배움터라고요.

신채원 여기 와서 느껴지는 새로운 흐름의 변화가 마을인생학교 관옥나무 도서관 별관인데, 공연과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들었습니다.

김민해 ‘순천판’이라고 부릅니다. 극장이라는 말도 되고 마당이라는 말도 되고 그런 의미의 순수한 말이죠. 마을로 가는 다리 역할도 하고 같이 무엇인가 도모해보고 꿈꾸는 장이지. 거기에 조그만 호혜의 시장도 열리고 공간 안에서 공연과 전시, 영화도 보고 밖에서는 마을의 농산물과 우리의 가지고 있는 것들을 서로 나누는, 이런 장이 펼쳐질 겁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곳,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같이 마을을 꿈꾸고 이야기해보는 곳입니다. 똥본위 화폐를 사용하려고 해요. 지역화폐와는 조금 다른 의미예요. 물물교환의 화폐. 똥은 누구나 누고 살잖아요.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지급해 주고 순천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실험해보는 거죠. 꿈꿀 수 있는 거고요.

신채원 꿈이라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이곳에서는, 또 두더지 씨와 함께라면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닌 것 같아서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꿈이 무엇인지를 여쭸을 때, 두더지 씨는 말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산다고 했다. 말 할 수 없는 꿈, 더는 묻지 못했다.
아침이 밝았다. 명상을 마치고 손을 모아 외치는 사랑어린사람들의 기도와 선언은 이러했다.
한 걸음씩 걷는다 사랑어린 사람들, 야호!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장 따뜻했던 순간이 있었다. 봄은 오고 있었다.
인생의 가장 따뜻했던 봄날은 언제였나요?
내 인생이 참 힘들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어. 그때 당시 어려움이 봄눈 녹듯이 녹았어. 그 장면이 힘들 때마다 나타났어. 부모님과 친척들과 손을 잡고 예배당으로 걸어가는 장면이었어. 아, 내 어린 시절에 이랬었지. 이런 때가 있었구나. 관옥 선생님 만나기 전까지 그 장면이 나를 살아있게 하고, 지탱해주었던 거지. 사람마다 그런 게 있다네.

김민해 _ 기도하는 사람,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이 여러 개라서 많은 사람들의 무엇으로 살고 있다. 순천 사랑어린배움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늙지 않는 섬 소년 두더지는 자기를 들여다보며 가끔 달을 본다.

리을리을무늬.자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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