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채원

주체를 넘어선 주인공의 시대

―원주 사람 김용우

그럴 때마다 혼자서 걸었다
무너지는 것이 두려웠던 날도 있었다
손에 쥔 모든 것을 놓쳐버린 날도 있었다
종달새도 나팔꽃도 떡갈나무도 딱정벌레도 혼자였다는 걸 알았을 때
먼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빛을 따라 오래도 걸어왔다
별 거 아니었다.
빛이 되는 것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은 계속되고 있다. 바이러스에 성공적으로 대응했다고 하는 한반도의 방역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는 뉴스 기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조금 다른 생각도 했다.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국가 체제는 어디에서 왔을까?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 자립과 자치의 협동을 꿈꿨던 사람들, 이들은 이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원주사람 김용우, 맡고 있는 직함이 많아서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몰랐다. 생명이라는 긴 호흡을 함께 들이쉬고 내쉰 시간이었다.

신채원 <개벽의 길을 걷는 사람들> 인터뷰에 모십니다. 오래전부터 모시고 싶었는데, 이제야 뵙게 되네요. 선생님을 떠올리면 몇 가지 키워드가 함께 떠오릅니다. 근대국가, 문명, 장일순 선생, 이현주 목사, 그리고 원주사람.

김용우 나야 뭐 이야기할 게 있나. 술이나 한 잔 하는 거지.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게 별 게 없어요. 누가 찾아오면 같이 밥 먹고 한 잔하며 이야기 듣고 그렇게 살아.

신채원 그러고 보니 원주, 하면 자연스럽게 ‘김용우’ 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원주에 가면 김용우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에 살아간다는 것, 지역의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 되면서 대면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잖아요. 온라인으로도 소통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같습니다.

김용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다시 문명의 전환을 생각하게 하죠. 나는 여기서 조금 인식의 틀을 확장 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기후변화 이야기부터 해 보죠. 그동안 인류 역사상 기후변화는 늘 있었어요.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변했다든지, 변화의 폭이 크거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고 느껴지는 기후변화가 문제죠. 인간이 직립보행 한 것도 기후의 변화 때문이었어요. 기후변화는 진화의 단초예요. 환경과 생명체 간의 상호작용과 적응의 문제거든요. 전염병도 마찬가지 상호작용의 문제예요. 그런 문제에서 보면 과도한 측면도 있고요

신채원 저도 그 질문을 하는 중이에요. 국가가 개인의 삶 전체를 통제하게 되면서,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했던 노력들은 아무 힘도 없이 그냥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방역 시스템은 반드시 필요하지만요.

김용우 그래요. 코로나에 대해서 냉정하게 못 보는 게 있어요. 한국은 주민등록체계와 CCTV, 핸드폰 등으로 언제든 국가가 볼 수 있는 기록체제가 있잖아요. 유럽이나 미국은 주민등록체제도 없고 국민의 동선을 국가가 파악할 수도 없어요. 국가가 함부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죠. 누가 어디서 걸렸는지, 그의 동선을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죠. 그러다 보니 지역봉쇄전략을 사용하는데, 이것도 한계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비행기를 통제하면 아무데도 못가지만, 유럽은 육로로도 국경을 넘어갈 수 있거든요. 이것이 잘 된 건지 잘못된 건지 몰라요.여전히 코로나는 진행 중이거든요.

신채원 그렇죠.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언제 어떻게 종식될지 예측도 하기 힘들어요. 생명 운동의 영역에서도 이와 관련된 어떤 입장을 내 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용우 그렇습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가 바라봐야 할 지점이 어딘가. 코비드 바이러스는 계속 갈 겁니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으면 항체가 형성될 때까지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코비드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이 바이러스에 대해 외재적 권력에 의존해야 하는 것인가를요. 과거에 수렵 채집시대에는 소규모 집단일 때 격리가 되면 그만이었어요. 전염병이 많지 않았죠. 인구도 적었고요.

신채원 지금 이 사회의 구조에서 우리는 방역이라고 한다면 국가방역 밖에 생각을 못하지 않습니까. 공동체적 방역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국가권력 없이 자치적 자율적 방역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김용우 현대사회는 바이러스와 보건의료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국가와 자본이 가지고 있어요. 민간은 갖고 있지 않지 않으니 국가권력에 의한 방역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능동적 주인이 아닌 피동적 주인이 되는 겁니다. 이 방역체계에 대해 시민사회의 입장을 단 한마디도 의견을 듣지 못했어요.

원주사람들이야기
신채원 원주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싶습니다. 원주의 큰 물줄기가 있었죠. 바로 협동운동이었습니다. 장일순이라는 큰 스승도 계셨고요.

김용우 한알마을은 마을 이름에도 드러나지만 대안 사회를 바라보고 지향합니다. 이전에는 모든 백터가 국가나 사회현실을 향해 이루어졌는데 한알마을은기존 경제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했어요. 대안학교도 세웠죠. 폐교를 빌려 세운 학교였는데 세월호 이후 붕괴 위험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갈 수가 없게 되었고, 재정적으로도 능력이 안 되었어요. 그리고 그때 학생 수가 줄어들기 시작할무렵이었어요. 꿈은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어렵게 되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문을 닫게 되었어요.

신채원 학교가 문을 닫게 된 일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알마을이 지향하는 활동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이 있고, 또 지역을 넘어 사회 전체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김용우 지역사회에 있는 분들이 한알마을은 새로운 희망을 이끌어 내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한알마을은 유형의 마을을 만든다기 보다는 무형의 네트워크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갔어요. 우리는 일체의 국가 프로젝트나 지방자치단체 일을 하지 않아요. 회비와 기부금, 후원금으로 운영합니다. 민주화운동,협동조합운동, 공동체운동 이후 미래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변혁이었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메타노이어예요. 회개.가던 길을 돌아서 전환하는 것, 자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의 핵심이 자각과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우주성(Divinity)입니다. 한알마을식구들이 봤을 때, 깨달음이 없으면 사람이 바뀌지 않더라는 겁니다. 결국 에고나 욕망에 지배당하는 겁니다. 동아시아에 내려오는 문명과 서남아시아의 문명,인디언 문명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 우주성입니다. 모든 문명이 각자의 언어로 그 우주성을 말합니다. 그것에 대한 방식만 다를 뿐입니다. 그렇게 봤을 때 앞으로 미래사회는 통합적 영성의 시대가 될 거라고 봐요. 그 통합적 영성에 적응하기 위해 각 영역의 진리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시작한 것이 고전 공부입니다. 그래서 동학을 제일 먼저 봤고요.

장일순 선생님과의 인연-한알마을이야기

신채원 큰 스승을 만나셨어요. 장일순 선생님과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김용우 장 선생님은 1928년생이에요. 그 당시로 치면 할아버지와 청년이에요. 나같이 젊은 사람이 그분을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 때만 해도 젊은 사람이 어른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요. 두려워하면서 경외하는 그런 존재였어요. 처음 만난 것은 88년, 스물 여섯 살 때였어요. 저는 87년 6월 항쟁을 여기 원주에서 보냅니다. 6월 항쟁 끝나고 지역 운동권은 뿔뿔이 흩어졌지요. 그 무렵 장일순이라는 사람이 원주 학생운동을 하는 청년들을 한번 보자고 하셨더군요. 그분은 그냥 지역에서 운동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통의 다리를 놓고 싶어하셨던 것 같아요.

신채원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인식하기는 조금 어려웠겠어요. 어른을 처음 뵈었을 때 어떻던가요?

김용우 같이 밥을 먹었어요. 선배들이 장일순 선생님께 나를 데리고 갔는데, 날 보고는, 장 선생님이 나를 옆에 앉히셨어요. 내 손을 꼭 잡고 앉아서 이야기 하시더군요. 비싼 소고기 전골을 앞에 두시고, 운동에 대한 이야기,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사실 자세한 이야기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이후에 길거리에서, 여러 번 뵈었지만 단편만 기억을 해요. 이후로 저는 생명사상에 대해 책과 선배들이 권해주는 문서를 비판적으로 봤어요. 90년대 초에 사회주의가 몰락잖아요.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20대 청년이 갖을만한 꿈이었죠.

신채원 청년 김용우의 깊은 고민과 성찰이 느껴집니다. 그럼 장일순 선생님을 스승으로 깊이 모시게 된 때는 그 이후였겠군요.

김용우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내가 걸어왔던 길에 대한 성찰이 있었고 그때 다시 장일순이 들어왔어요. 이게 맞는 건가. 사회주의는 왜 망했나, 무엇이 문제였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채원 점점 장일순 선생님의 사상을 향해 가던 시기로 접어들었겠군요. 그 과정은 전광석화처럼 다가왔다기보다는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군요.

김용우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장일순 선생님을 따라서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내가 수배 중이었고 정식으로 그 문제가 다 플린 시기가 93년 김영삼이 취임하면서예요. 92년 대선에 당선되면서 수배 학생들이 다 해제가 되었거든요. 그때 새로운 문서도 찾고 장일순 선생님을 뵙기는 했지만 사상을 묻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가끔 해 주셨지요. 생명에 근거하는 이야기가 참 어려운 거거든. 그렇게 장일순 말씀에 따라, 그 사유를 따라가 보려다 보니 고전을 해야겠더군요.

신채원 그런데 선생님이 우리 곁에 오래 계시진 못했어요. 94년에 돌아가셨죠?

김용우 마음먹고 뭘 좀 하려는데 돌아가셨지. 그렇지만 강렬했어.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세례랄까. 그 점이 차이가 있는 거지. 선생님의 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셨으니, 그런 생명 사상과 문헌, 사람을 만나게 되는 시기를 보냅니다.

신채원 뜨겁게 살았던 세월의 이야기네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의 가르침은 청년 김용우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나요?

김용우 장일순 선생님과의 인연이 그렇게 깊지는 않아요. 그러나 말씀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찾아서 봤지. 맑시즘 운동할 때는 선생님의 사상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봤어요. 91년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가 세상에 나오고 장 선생님의 제자가 저렇다니, 이런 비판도 있었죠. 제게는 사상의 질풍노도의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색하는 책을 봤고 고민이 깊은 청년이었어요.

신채원 원주 사람들에게 스승 장일순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용우 다 다르겠지만 장일순이라는 사람이 걸어온 삶의 신령성과 성실성은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는 거죠. 삶의 진정성.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신령성과 성실성을 누가 부인하겠느냐는 거죠. 이미 객관적으로, 또 각자의 경험으로 느낀 거죠. 나는 개인적으로 생명 사상이라고 하는, 내게 사상과 삶의 전환을 부여한 분이니 선생님이죠. 나는 장 선생님을 맹목적으로 추종은 하지 않아요.

신채원 장일순 선생님도 그런 방식의 추종은 원하지 않으시겠죠. 그렇게, 장일순 선생님이 살아 생전에 그분이 남기신 글이나 말씀을 토대로 공부를 하셨어요. 그리고 실존의 그분에게 다가가는 준비를 하는 과정에 돌아가셨잖아요. 맹목적인 방법이라기보다 그렇게라도 선생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김용우 맞아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더 깊은 공부를 했어요. 동양철학의 대부분 90년대 후반에 공부했으니까요. 선생님은 내 가슴 속에 있는 거지.

신채원 사람도 그렇고 사상도, 그렇고 모든 것들은 사라진 것들만이 영원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눈 앞에 있는 것은 사라지지만, 지나간 것들은 없던 사람이나 없던 일이 되지 않거든요.

김용우 장일순 선생님은 내 삶에 이름으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삶이 내 안에 차 있는 거지.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보는 거지. 장일순 선생님을 기리는 것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어요. 돌아가신 이후에 늘 생각해 본 것은 어느 순간에 사상은 구현하는 것이지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신채원 그렇겠네요. 한알마을도 그렇게 그분의 사상과 그분의 삶을 살겠다고 모인 사람이잖아요?

김용우 한알마을이 다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기보다는요, 내가 스승으로 모시고 영향을 받았으니까, 직접 받았다는 말은 극히 일부분이고 오히려 나는 만남의 기회가 많지 않았고 선생님의 흔적을 스스로 찾았어요. 그렇지만 생전에 만나 뵌 기억이 큰 도움이 되었죠. 만나지 않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겠지.

신채원 다시, 한알마을 이야기를 좀 듣겠습니다, 고전 공부를 하고 계시고 1년에 한두 차례 책을 내시죠. 마음공부도 한다고 들었어요.

김용우 그렇습니다. 거기에 치악산 공부방이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고전공부만 하면 사회적 현실에 어두워지니까 사회현실에 관련된 공부를 합니다. 이번에는 코로나 이후의 사회, 이런 강좌를 할 계획이에요.

신채원 한알마을 책들은 얇고 작아서 들고 다니면서 아무데나 펼쳐서 봐도 좋더라고요. 일상을 살다 보면 무엇을 쫓아서 가고 있나, 내가 이렇게 살고 싶었나, 이런 마음이 들 때 읽습니다. 이런 책들을 내는 것 자체가 누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해내고 있는 거잖아요.

김용우 이런 책들을 내게 된 배경은 우리가 진리를 우리끼리만 갖지 말고 나누자는 마음으로 하나의 사회활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판매하는 책이 아니고 무상으로 나누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게 한알마을의 활동입니다. 공부를 끝내면 순례를 떠나고 사람도 만나고 말씀도 듣고 그렇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되고 배움이 되는 겁니다.

신채원 어떤 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을 이 사회로 어떻게 돌릴 건가, 그분이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이 사회가 하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하는 것 같아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다 일상을 각자 살아가는 분들이겠고 그분이 살아내신 삶에 대한 답을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는 분들이 실천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요?

김용우 맞습니다. 한알마을이라는 이름은 내가 지을 때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는 말에서 따왔는데, 우리에게 스승은 해월도 있었어요. 동학, 금강경, 반야심경, 작년에는 이슬람에 대한 공부를을 했고요. 우리가 하는 마음공부는 인간 개벽, 자기개벽, 자기변혁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삶의 현장에서의 자기는 그분들의 몫이죠. 이것을 진화시키기 위해 한알마을미래위원회를 만들고 새로운 개념의 도서관을 만들 계획하고 있어요.

신채원 역시 문명의 전환은 사회가 아닌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개혁을 하는 것으로요.

김용우 문명은 인간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과 의지가 들어 있는 건데 문명이 바뀌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생명 운동의 집단적 형식이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자기 의식의 진화를 꾀해야 하는 것, 그것에 초점을 주고 하는 건데 각자 수준에 따라가는 거죠.

생명운동, 전환을 꾀하다

신채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보겠습니다. 저는 선배님들께 묻고 싶었습니다. 30년 전에 생명, 대안을 두고 길을 찾았을 때, 30년 후의 오늘을 내다보셨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위치에 와 있다고 보시는지를요.

김용우 그건 차이가 있을 텐데요, 나는 사회 운동적 측면에서 접근하다 보니 협동조합, 유기농 등 인간과 공생을 화두로 운동을 해 왔다고 볼 수 있어요. 초기의 운동은 공생과 협동이 맞았어요. 그리고 후기로 흘러오면서 성숙된 인간의 사회, 우주의 심오한 공간 속에서 인간의 역할, 이런 문제들로 확장되어왔다고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유기농 운동이나 공동체, 대안 교육 운동 지금도 멀어진 것은 아니지만 중심 포인트는 사람으로 옮겨간 측면이 있어요. 초기에는 다양한 유기농업, 협동조합, 대안 공동체를 여러 개 만드는 거였어요. 협동운동,지역사회를 생명공동체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공동체 경제가 있어야 했고 여전히 그런 운동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런 운동은 처음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어요. 쟤도 꼰대를 닮아간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운동으로 가던 시선이었죠.

신채원 이른바 원주에서 출발한 공동체 협동 운동을 말씀하시는 군요. 그런데 왜 협동운동이었나요?

김용우 원주의 생명 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나는 여기 내 역할이 한알마을의 일이라고 보는 거고요. 아, 마르크스 레닌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근대 체제라고 하는 것이 사유체제에 의해 돌아가는 경제조직이잖아요. 이것이 가진 부조리한 문제들이 인간의 사유체제와 인간의 욕망, 자원의 희소성을 이용하는 겁니다.이것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이 사회주의인데 사회주의는 국유체제거든. 사유와 국유를 이야기해 봅시다. 89~90년 소련이 망합니다. 인간의 경제나 문명은 끊임없이 변하는 건데 공산주의는 그 이전에 사회경제체제의 분배에 대한 평등의 문제만 해결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국유를 하면, 소유체계도 국유로 바꾸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될 거라고 믿었어요. 공동체적 자발성과 자율성은 소유 자체를, 이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의식에서 나옵니다. 시민적, 공동체적 소유라고 하죠. 이것이 서구의 협동조합 제도더군요. 생명 운동 진영에서 공유에 대한 공부를 했죠. 그 길목에서 하나의 형식으로써 협동조합을 채택한 거죠. 협
동조합이 능사는 아닙니다. 사회적 기업도 있을 수 있고 시민기업도 있을 수 있고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어요. 한알마을도 일종의 공유경제입니다. 공유경제는 사유와 국유를 뛰어넘는 민의 자발적 소유라는 겁니다.

신채원 사회주의가 붕괴된 지점을 함께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명 운동-협동운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30년 걸어 오셨습니다. 지금 보시면 또 어떠십니까?

김용우 조금 전 이야기를 더 이어가면, 공유경제는 무엇을 말하냐면요,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자연을 누군가 사유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자연은 인류 모두의 것이고 생명 모두의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국유도 문제입니다. 국가가 그것을 소유하니까 문제가 돼요. 오직 남는 것은 공유인데, 집단이 공유하는 건 배타적 집단이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러나 과도적으로 보면 소유의 한계선을 공유의 집단을 다양하게 만들고 그들이 네트워킹을 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 인간 의식의 진화로 ‘이 세상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라는 궁극적 자각에 이르지 않을까요.

신채원 처음에 우리가 코로나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되었는데 오늘의 이 사회 문제와도 무섭도록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 보입니다. 자율, 공유 등 사회문제가 이런 극단적 상황에서는 무엇으로도 예측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잖아요.

김용우 공유의 경제에서는 정치가 아니라 자치가 중요한 겁니다. 물론 근대 국가체제에서는 정치가 중요하죠. 하지만 정치는 사람을 피동적으로 만들고 기득권자를 양산하기 때문에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유일하게 이것을 대체하는 것은 민의 자치뿐입니다. 최근 이승준 씨가 번역한 어쌤블리라는 책을 보셨나요? 그게 민회거든요. 영어식으로 민회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럼 여기 내가 묻습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 추구했던 공동체적 민회와 서양이 추구했던 코뮨적 민회는 같은 겁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겁니다. 이 질문 안에는 어마어마한 베이스를 깔고 있는 겁니다. 예전에 주체는 없다고 했잖아요. 이제 주체는 없어요. 주인공만 있어요.

주체에서 주인공으로 – 생명 운동이 가져다 준 것들

신채원 우리에게는 주체에 대한 화두로 수십 년을 끌고 온 담론들이 있죠. 그런데 주체에서 주인공이라는 말씀은 아직 좀 낯설게 느껴집니다. 여기에 조금더 깊은 이야기를 여쭙습니다. 생명 운동이 선배 세대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던가요?

김용우 한 사람이 세상에 올 때 내 마음대로 온 게 아니잖아요. 와 보니까 나더라고.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와서 어떻게 가는 건지 이것에 대해 알고 살면 좋지 않을까, 하다보니 이 길이 된거지. 생명 운동은 나라는 주인공이 진리와 진실,이것을 찾아가는 삶이죠. 그것을 빼 놓으면 뭐가 있는가 싶은 거야.

신채원 개인 김용우에게 생명 운동이란 무엇이죠?

김용우 늘 품고 가야 하는 거겠죠. 나는 어릴 때 농촌에 살았으니까,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살았어요.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았고 밤하늘을 보는데, 은하수가 펼쳐졌어요. 그러다가 세상은 왜 불공평할까, 이런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여러 가지 사회 현실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나는 평생 약자들을 위해 살겠다고 막연한 생각을 했죠. 그런 생각이 드니까 자연히 사회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거지. 그러면서 처음에는 이념의 문제, 권력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진실과 진리의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되었어. 사회주의가 붕괴할 때쯤.

신채원 그 시기 사회적 배경들을 상상해보면 그랬을 것 같아요. 불평등한 사회에 맞서야 했던 그 시절의 청년들 몇을 압니다.

김용우 나 역시 그런 청년이었어요. 이론과 이념에 휘둘려서, 내가 깨달은 이론과 내가 정리한 현실은 무엇일까 고민했고, 그럼 내가 알고 있는 진실과 진리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청년 시절을 보냈지.

신채원 30년 전의 그 청년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고 싶으신가요?

김용우 나는 그때부터 다양한 사회와 가능성의 영역들을 자꾸 열어 놓았지 그리고 풀리지 않았던 것들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인간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어. 삶의 길이 뭔지 질문을 던지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결국 질문의 힘이 나를 이 길로 끌고 온 것이 아닐까 싶어요. 계속 질문하라는 말을 해야겠지.

신채원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운동에 대한 질문은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을 오래 생각했어요. 인간에 대한, 인류에 대한 그리고 생명에 대한 사랑이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는 거겠죠?

김용우 인간에 대한 없이 하는 운동이 있을 수 있나? 없더라는 거야. 사랑하기 때문이야. 다른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야. 어떤 운동도 사랑 없이 할 수 없는 거야. 증오하면서 운동한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신채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분노 같은 것도 있잖아요. 이를테면 군사독재시절의 수많은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 땅의 청년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을 생각하면요.

김용우 우리는 전두환과도 박근혜와도 범죄자와도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합니까. 나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아요. 범죄를 옹호하는게 아니라 사람을, 생명을 옹호하는 거예요.

신채원 장일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한알’ 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말씀 같군요. 한알 속 우주에는 오직 생명에 대한 존중이 있을 뿐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깨달음은 늘 늦어요. 조금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걸 생각할 때 있으시죠? 나이가 들면서 그런 점은 좋을 것 같아요.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요.

김용우 이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는 거죠. 이제 곧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나이가 되니까. 젊은 사람도 이해가 되고요. 환갑이라는 나이는 지천명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거든요. 인생이 뭐라는 것도 아셨을 나이였겠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아셨을 거고요. 선생님이 어느날 오셔서 막걸리 한 잔 하시고 혼잣말로 그러시더군요. “내가 없다고 세상이 안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중얼거리시더래요. 나는 그 말이 진심이었다고 봐요. 이제 비로소 그 말씀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요.

라떼는 말이야-선배세대들에게

신채원 오래 생각하게 되는 말씀이었네요. (글쓴이는 김용우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이어지는 부분은 대화의 맥락 이해를 위해 구어체를 그대로 옮긴다) 저는 선배님들과 함께 있을 때마다 그런 걸 느껴요. 형님은 형님의 형님들과 이따금 팽팽하게 맞서 싸우시잖아요. 가끔 형님의 형님들에게 맞서 싸우실 때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내가 후배인 건 참 다행이야’

김용우 후배들에게는 잘 안 그래.

신채원 선배 세대들에게 날카롭고 묵직한 물음을 던지시기도 하는데, 막상 지금은 그런 후배들도 없어요. 어디에나 그렇겠지만, 특히 이 생명 운동 진영에서는 세대 간의 갈등이 계속 깊어지는 것 같아요.

김용우 어느 시대나 세대 간의 차이는 영원한 거라고 봐. 장강의 앞 물과 뒷물 같아. 한 세대를 같이 살기 때문이지. 내가 산 삶을 네가 살 수 없고 네가 산 삶을 내가 살 수 없겠지. 그러나 공통의 점이지대가 존재하니까 세대가 존재하는겁니다. 이 문제는 인류 역사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대화가 안 되는 것은 아닐겁니다. 왜냐하면 장강의 앞물과 뒷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나도 장강의 뒷물일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죠. 후배들에게는 잘 그러지 않아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는 선배들을 참 좋아해요.

신채원 그 말씀 꼭 원고에 쓰겠습니다. 그런데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2~30년 뒤에 우리도 저렇게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어져요. 우리도 그런 시도를 하겠지만, 이 호흡을 10년은 끌고 갈 수 있을까요? 형님들 세대들은 이 호흡을 30년간 이어 왔다는 거잖아요.

김용우 다음 세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도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우리 앞 세대는 천재, 대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어요. 그런 세대들이 있었고요. 우리 세대는 보편적인 형제애 같은 문화 속에 살았어요. 다음 세대는 아마도 네트워킹 세대가 될 겁니다. 서로 다른 문화입니다. 하지만 역할은 같을 겁니다. 뒷세대를 이끄는 그런 모델이 될 거예요. 다음 세대가 우리가 될 필요는 없어요.

다음 세대를 위하여-기본소득 이야기

신채원 그렇죠. 오늘의 현장은 또 다르니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이런 이야기도 다뤄야 할 것 같아요. 최근 청년 세대들에게 큰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기본소득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요. 재난지원금이 기본소득의 출발로 볼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김용우 기본소득을 주창한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어요. 주류경제학자들의 시선은 자본주의가 수요부족에 빠질 때 공황에 치닫잖아요. 이 공황을 탈피하려면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하는데, 케인지 주의적 방식으로는 유효수요가 창출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부담도 크고요. 그래서 화폐를 찍어내어서라도 유효수요를 창출해서 시장을 살려내야한다는 거고요. 그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입장입니다. 정치경제학자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은 일종의 복지라고 말해요. 지금까지 자본의 부는 모두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위에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의 일부를 노동자들에게 주면서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복리를 늘려가는 것은 점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는 시점에서 하나의 사회복지 정책으로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기업의 재배치에도 유효하다는 입장이에요. 한쪽에서는 유효수요를,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복지 창출하는 것, 그것이 똑같다는 거예요. 이것은 모두 자본주의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거죠. 다만 이쪽은 사민주의적, 이쪽은 자유주의적 시선에서 보는 거죠.
한쪽은 세금이 원천이고, 다른 한쪽은 화폐를 찍어 내는 게 원천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자본주의의 전환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어느 쪽이든 문명 전환의 정책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아요. 다만, 문명 전환의 완충기 역할, 하나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는 사람들이 이걸 능동적으로 쟁취하는 역할을 할 겁니다.

신채원 재난소득과 기본소득을 연결해서 보려는 시도는 지나친 낭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우 특히 이번처럼 코로나 직후 정부 쪽에서 볼 때는 유효수요의 부족입니다. 그래서 보수 쪽에서도 동의하는 겁니다. 주지 않으면 국가 자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니까요. 좌우가 공히 합의된 사항입니다. 이제 균열이 생기겠죠. 당연히 이 문제가 기본소득으로 갈 건지, 코로나가 밀어붙이고 있고 백스텝을 밟긴 쉽지 않을 겁니다. 증폭을 거치면서 갈 겁니다. 본질적으로는 문명전환의 정책으로 보기 어렵겠다 싶어요. 유효수요 정책으로 볼 때, 쿠폰 방식으로 지급될 거고 복지방식으로 간다면 기본소득 계속될까요 라는 질문에 희망 섞인 발언은 좌파들이 할 거고 우파들은 이례적인, 하더라도 제한적이라고 말할 겁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클 겁니다. 경제 전체가 위기에 빠져 있고요. 역성장이 탈성장과는 다른 말입니다. 문명전환은 탈성장이고 역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질곡에 빠졌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이에 있는 정책이라는 거죠. 그러나,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탈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과도정책으로서도 그렇고요. 이 사회는 과연 좋아질까요?

신채원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이 사회는 점점 좋아졌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는데, 점점 마음이 병들어가는 사회로 가는 것 같아요. 마음은 바이러스처럼 보이지 않고요.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수행 뿐인가요

김용우 그렇다고 봐야죠. 마음을 들여다봐야지. 그러려면 문명의 전환이 이루어져야겠지. 어떤 문명인지 다 그릴 수 없지만,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법이 쓰이진 않는다는 것이고, 수행은 현실의 삶을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현실의 삶이 있기 때문에 수행인 거죠. 그 지점에서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에 의지하던 습성들이 사라지는 거잖아.

신채원 한 사람이 그가 속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면, 가정이든 주변을 밝힐 수 있다면 언젠가는 바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래요.

김용우 그럼, 그렇지. 그 한 사람이 소신을 갖고 있다면 동일한 에너지가 확장되고 전해지지. 운동이 달라지는 것은 당신의 에너지가 바뀌는 거지. 생각이 아니라. 그것이 조금 다른 점이야. 이론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바뀌는 거예요.

신채원 긴 세월이었습니다. 사실 나이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세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겉늙었다는 말 많이 들으셨죠?

김용우 그 말은 내가 20대 때부터 들었지. 그때만 해도 어른들과 함께했지만 또래들도 많았어. 젊었을 때를 돌아보면 후배들은 선배들에게 바라는 게 많고 선배들은 후배에게 기대하는 게 많고. 그런 지점들이 있었지. 잘록한 허리 같았어. 가운데는 없고 위 아래가 많았지. 어려서부터 2~30년 선배들과의 대화를 해야했지. 그분들과의 대화는 삶의 연륜이 있었기 때문에 고전이나 사회적 경험과 지식이 많으니까. 여러 가지 은유를 가진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그 언어를 이해하려다 보니 노력이 자연스럽게 따라왔지.

신채원 어른들이 참 아끼는 후배였겠어요. 스승님이 지어주신 류하라는 이름 이야기도 좀 해주시죠김용우 류하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쓰고 있는데 장 선생님이 관옥 선생님을 통해서 나에게 내려주신 이름이야. 요즘은 스스로 이름을 지어 쓰려는 게 몇 가
지 있는데 빈 꽃, 화공 이라는 이름을 쓸까 해.

신채원 비어 있는 꽃? 그럼 큰 꽃이네요. 다 안을 수 있겠군요.

김용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철학적 전환을 이뤄내야 하고 의식의 깊이를 가지고 말야. 그런 지점에서 보면 빌 공, ‘주인공’ 이라는 말. 주체의 시대를 넘어 주인공의 시대로 가야한다는 말이야. 켄 윌버식으로 말하자면 주체의 대상으로의 전환, 나를 대상화하는 거고 그 무엇인가가 나를 보는 거지. 다석의 말로는 참주인, 참나겠고 해월의 말로는 하늘이겠지.

신채원 오늘 이렇게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선배들을 너무 몰랐어요.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선배 세대들에게 원망도 많았고 미웠어요. 문득 든 생각은 우리는, 나는, 저런 후배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물음이 왔어요. 존재에 대한 사랑이 바탕에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김용우 내가 주인공이 되면, 자네도 주인공이 되는 거야. 한동안 권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성찰이 필요했지. 그런 지점에서 보면 권력을 통해 운동을 완성하려고 한 세대의 종언이지. 나는 그 점에선 생명 운동이 그 대척점에 서야 한다고 봐요. 우리의 자율과 자치와 자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이것에 기초하는 게 생명운동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생명운동의 지평을 어떻게 넓혀가고 완성해갈 거냐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선배들은 앙상한 뼈대를 물려주었죠. 살을 붙이는 몫은 후배들의 역할입니다. 이제 주체를 넘어 모두가 주인공인 이 시대에 우리는 문명에 어떤 질문을 들고 서 있는가, 이것이 남은 과제입니다.

오랫동안 나는 한 사람의 단편만 보고 있었다. 보지 못했던 뒷모습을 오래 보면서, 듣지 못한 혼잣말을 오래 들으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후배가 될 수 있을까?

김용우 _ 원주사람. 강원도 횡성 ‘매화나무 한 가지’라는 뜻의 ‘매일’이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태어났다.새벽 이슬 좀 밟아 본 청년들이라면 다 그렇듯 가슴 속에 거대담론을 품고 살아왔다. 생명, 협동, 자치라는 이 동화 속 꿈 같은 말을 이 사람처럼 냉철하게 묻고 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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