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꾼 임진택이 할 일
걸으면 다 길이었다
저 사람, 맨 앞에 서 있는 저 사람
사람들은 그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뒤따라 걸었다. 한판 어깨춤을 출 때면 멈춰서서 넋을 놓고 바라보곤 하였다.
그는 마침내 닿을 곳이 어딘지를 알고 가는 사람이었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어느 물줄기를 따라 산맥을 넘어 셀 수 없는 풀들을 밟고 길을 만들었을 때,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 저사람,
뒤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따라 제자리에서 돌아선다. 그러자 맨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맨 앞이 되고, 맨 뒤에 서 있는 그는 말없이 그저 웃었다.
만남-봄이 오려고
소리꾼 임진택 선생을 만났다. 선생과의 첫 만남은 언제였을까. 글쓴이에게 선명했던 기억은 어느 무대에서의 강렬한 눈빛이었다. 고수와 추임새를 주고 받으며 살가운 농담을 친절하게도 풀어내던 선생이 부패한 권력을 향해 꾸짖는 듯한 손짓과 ‘어디에’, ‘누구를’ 향하여 외치던 그 눈빛 말이다.인사동의 창작판소리연구에서 만났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봄은 아직이었던 어느 날, 오후의 햇살이 곱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이야기는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생의 안부를 여쭙다가 글쓴이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신채원 선생님, 저는 곧 인터뷰 연재가 끝이 나요. 개벽이 곧 잡지의 형태로 전환하면서 이 매체는 종간하기로 했거든요.
임진택 그래? 그럼 내가 마지막에 나가지. 그것도 의미는 있을 거야. 마지막호에 나를 인터뷰 해.
봄은 오고 있었다. 봄은 오려고 그렇게 사람들은 서로를 찾았나보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마지막 호 인터뷰를 마주하게 되었다.
만남-여름이 오려고
신채원 선생님 약속하신 인터뷰를 위해 찾아뵙습니다. 선생님께 시간을 내어주십사 부탁드렸습니다만, 이 시간이 쉽게 온 것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꼭 뵙고 싶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특히 예술가들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임진택 나는 코로나와 아무 상관 없어요. 덕분에 4개월간 글을 썼어. 그런 사람들 꽤 있어요. 공연이 없었으니까 소리 수련도 못 하게 되니 글 쓰는 데 집중했죠.
신채원 연재하고 계시는 글 잘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찾아뵙고 여쭙고 싶은 이야기도 그 이야기입니다. ‘애국가’ 프로젝트를 시작하셨어요. “아리랑 애국가”라고 불러야 하나요? 8월에 공연도 앞두고 계시더군요.
임진택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8월 14일부터 15일까지 경기아트센터에서 ‘동고동락’이라는 이름으로 콘서트 공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애국찬가 페스티벌”입니다. 사회 원로이신 이부영, 함세웅, 신낙균, 김도현, 김원웅 선생등과 함께 새로운 애국가 국민운동을 작년에 시작했어요. 몇 가지 일을 꾸미고 있는데, 그중 하나로 8월 14~15일 경기도 문예진흥사업으로 수용되어 경기아트센터(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애국찬가 페스티발을 열게 되었어요. 지금 준비중이에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준비 기간은 오히려 충분했어요. 원래 3월 1일에 하려고 했거든요. 그땐 예산도 확정되지 않았고 코로나도 확산되었고요.
신채원 선생님은 늘 준비되어 계신 분 아닙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장기화되니까 특히 공연예술 쪽 사업들이 내일을 약속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행사를 준비하시면서도 그에 대한 걱정이 크실 것 같은데요.
임진택 코로나가 더 장기화되면, 불가피한 경우 무관중 공연으로 만들어서 영상으로 방송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그렇게 까지는 안 갈 것 같고, 좌석을 반 만 채우는 방식으로 갈 것 같아요. 그리고 바라는 바는 코로나가 잘 풀려서, 경기아트센터가 코로나를 완전히 물리친 기념으로 이 공연을 하면 좋겠어요. 관객이 가득 찬 공연장에서요. 특히 이 페스티벌의 방식은 들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청중이 모두 노래하는 방식이니까,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목표로 만들었거든요. 전석을 다 채워 모두 함께 부르는 애국찬가 페스티벌이 되면 좋겠어요.
왜 ‘애국가’였나
신채원 듣고 싶은 이야기가 굉장히 많지만, 저는 오늘 ‘애국가’ 이야기를 여쭙고 싶어요. 선생님께서 ‘애국가 바로잡기’를 위해 또 길을 만들어 내고 계신데요,일단 말씀을 좀 듣겠습니다. 이 애국가, 왜, 무엇이 문제인가요? 사실 오래 전부터 문제제기가 있었죠.
임진택 우리가 불러온 애국가의 작곡자는 안익태입니다. 안익태가 어떤 사람입니까?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였어요. 게다가 이 노래는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했다는 주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고요.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어야죠.
신채원 이 일은 ‘임진택’이 해야 한다, 이런 어떤 사명이 왔던 거군요. 아리랑에 맞춰 부르자, 이렇게 제안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임진택 그렇습니다. 작년부터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었어요.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를 제안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여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어요.
신채원 여기서 궁금합니다. 우리에겐 공동체적 신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연희적 요소들이 많죠. 문화 안에요. 이것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임진택 우리 노는 방식이 그렇죠. 이것은 고대 제천의식에서부터 왔죠.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등등 3일 밤낮을 먹고 마시고 놀았던 전통이 이어지는 거죠. 나는 45년 전부터 마당극 운동을 했잖아요. 마당이라는 개념이 그 열린 시공간이에요. 45년 전 젊은 시절부터 열린 연극을 내세웠고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콘서트도 열린 방식으로 하자는 겁니다. 사실은 애국가 제창도 열린 방식으로 해야 옳지요. 어떻든 이를 통해서 애국가 바로잡는 운동이 국민운동이 되었으면 해요. ‘새로운 애국가 국민운동’으로 할지, ‘애국가 바로잡기 국민운동’,이렇게 붙일지 생각중입니다.
새로운 애국가 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안익태 곡조는 이제 그만”, 이런 뜻이에요. 안익태가 친나치행각을 벌였다는 것이 폭로되었고 이것이 “빼박팩트”인데, 그런데도 이 노래를 애국가로 부를 수 있나요?
신채원 그 고민이 이번 공연에 고스란히 담겨 있겠군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임진택 나는 두 가지를 준비했어요. 하나는 “대한민국 애국찬가 페스티벌”,그 중 열린콘서트를 하려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애국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국민들이 알아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알려지지 않고 있어요. 언론만 해도, 정규매체에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론을 못 당해요. 가짜뉴스를 감당 못 하잖아요. 애국가를 바꾸자는 운동, 이 엄청난 핵폭탄이 한번 터져야 하는데, 그냥 매일매일 일상 속에 잠재해 있거든요. 나이 먹은 사람은 애국가 부를 일이 없으니까 “귀찮아” 이러는 거고, 애국가를 매일 불러야 하는 학생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라요. 그걸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은 가르치려니까 거북하고요. 이 일을 꾸려나갈 주체, 국민운동으로 꾸려나갈 주체가 불분명한 겁니다. 반대로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조직, 세력이있고요. 안익태가 친나치 행각을 했다, 이런 문제제기가 올라왔을 때, 안익태를기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기념해 온 안익태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걸 밝히고 사죄해야지, 조직적으로 감추려는 거야. 더 나빠요.
신채원 다들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누군가 나서서 바꾸려는 시도, 또 그런 시도에 연대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참 아직도 우리는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임진택 더이상 감추고 변명할 일이 아니에요. 그의 친나치 행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우리나라에 친일 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만 친나치는 안익태 딱 한 사람이에요.
안익태의 또 다른 얼굴, ‘에키타이 안’
임진택 이완용에서 윤치호까지 친일한 사람들 수없이 많죠. 백주대낮에 친일 행각을 했지요. 그러나 안익태는 아무도 모르게 친나치 행각을 한 단 한사람이에요. 그 수준도 서열을 매기면 안익태 친나치 행각은 이완용이나 윤치호보다 덜하지 않아요. 거의 국치 수준이에요. 그것을 비호한 것이 히틀러의 문화담당이었던 괴벨스 산하의 일독협회예요. 그걸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것을 도와준 것이 주독일, 베를린의 일본 영사관, 만주국 공사관이었어요. 일본 영사관이 설계한 공연에 안익태가 지휘를 한 겁니다.
신채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70년간 안익태의 애국가를 온 국민이 불러오면서 아무도 몰랐다니요.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안익태의 행적은 놀랍도록 빛나는 여정이더군요. 식민지 조선에서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주목받은 청년이 또 있었을까 싶어요.
임진택 ‘아무도 몰랐다’, 그 사건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은 속았다. 이렇게 말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김구 주석이 30년대 초까지는 일본 천황이나 일본군을 암살하고 그런 투쟁 활동을 하다가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을 창설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전쟁을 한다는 뜻이에요. 전면적으로 전쟁을 이어 나간 시기에,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는 유럽에 가서 친일, 친나치 활동을 한 겁니다. 그때, 그러니까 1935년 겨울에 애국가를 작곡했고, 그것을 부르고 보급한 사람들은 재미동포들이었어요. 재미동포들이 1940년 안익태가 유럽으로 간 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소식을 보냅니다. 한국의 안익태라는 청년이 애국가를 작곡하였으니 앞으로 미주에서 우리가 올드랭 사인에 부르던 애국가를 안익태가 작곡한 음악으로 부르도록 허가해달라고 합니다. 충칭 국무회의에서 그것을 의결했고, 임시정부에서도 부르기 시작하고 광복군에게 가르치고 그러면서 보급을 하죠. 한때“서로 다르게 불러서 웃었다”, 이런 기록도 있어요. 올드랭사인으로 부르고 있었으니까. 임시정부에서 누군가 일본 영사관 도움으로 지휘하고 있다고 했다면,1942년은 광복군이 연합군과 힘을 합쳐 싸우고 있을 때예요. 그런데 독일, 이탈리아, 항가리는 연합국과 전쟁하는 나라 아닙니까? 추축국이라고 하죠. 안익태는 그 시기에 추축국을 순회하며 전쟁 프로파간다에 부역을 한 겁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으로 작곡해 헌정한 ‘일본축전곡’, 일본의 괴로국인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으로 안익태가 직접 작곡한 ‘만주환상곡’을 지휘하면서 유명을 떨친 사람이 안익태입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에하라고이치입니다. 그는 주 베를린 만주국 공사관의 참사관입니다. 에하라 고이치는 만주국 참사관으로 오기 전, 하얼빈 부시장이었어요.
신채원 안익태와 아주 관계가 깊은 인물이죠?
임진택 에하라 고이치는 미국 OSS(CIA의 전신) 기밀문서에 의하면, 주독일 일본 정보 총책입니다. 그가 단순 스파이였을까, 하는 의문이 지금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해 연구되고 있어요.여러 사료들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그는 틀림없이 731부대와 독일의 홀로코스트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거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아직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의심의 여지가 있는 사실이죠.
신채원 선생님께서 쓰신 글에서 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 안익태가 함께 살았다죠? 그러고 보면요, 1942년 이후로는 조선이 독립이 될 거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하잖아요.
임진택 그랬다지. 윤치호만 봐도 그렇잖아요. 그는 이미 일본인이 되어 있어요. 하여간, 안익태가 2년 반을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살고 있었고 그의 배려로 파리도 갔을 거고요. 같은 시기에 미주에서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동포들 사이에 보급했고, 광복군이나 중국에선 올드랭 사인과 섞여서 불렸고요. 우리나라 국내에서는 1945년 전까지 안익태의 곡조는 들어온 적이 없어요. 1946년에 처음으로 소개됩니다. 임시정부에서, 미주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안익태 곡조를 처음 소개하게 되는 거죠.
애국가 작사는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임진택 1948년 동아일보에 박은용이라는 음악평론가의 칼럼이 등장합니다. 10월 6일, 7일, 8일 3일에 걸쳐서요. 1948년 9월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막 통과해요. 정부수립되고 바로 제일 먼저 한 일이에요. 그때 이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을 주장하는 칼럼이 나온 겁니다. 윤치호는 1945년 12월에 죽었지요. 1948년 10월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던 박은용의 글 ‘애국가攷’는 작가 이광수가 집필한 『도산 안창호』 전기에서 ‘애국가는 원래 도산의 작’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데 대한 반론으로서 ‘윤치호 작사설’을 본격 주장한 최초의 칼럼입니다. 박은용은 대통령 이승만과 시인 서정주의 말을 빌려와 ‘애국가는 독립협회 시절(즉 1896~1899년 전후) 윤치호가 작사한 것이다’라는 전제하에 논의를 전개했어요.
신채원 우리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이 이렇게 촘촘하게 드러나 있는 바로 눈 앞에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임진택 자, 그럼 이것이 왜 오류인지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죠. 임시정부에서 1945년 10월에 낸 책자가 있는데, 김구 선생이 한국애국가의 유래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김구 주석은 애국가의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자료를 보면 여기 써 있어요. “이 애국가가 창작된 것은 50년 전 어느 한국 애국지사 한 분의 손에 의해 쓰인 것이나, 그 이름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김구 주석은 여기에 일명(佚名)이라고 써요. 일명(佚名)이란 ‘이름을 숨긴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숨긴다(佚)’는 것은 그립고 애틋해서 사모(思慕)하는 마음으로 감싸주기 위해 ‘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채원 김구 선생이 안창호 선생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몰랐고요. 또 몰라야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임진택 보세요, ‘50년 전 어느 한국 애국지사 한 분의 손에 의해 쓰였다’는 말은 1896~97년경 최초로 무궁화노래가 나온 시점을 가리킨 겁니다. 김구 주석은 우리의 <애국가>가 청년 안창호의 무궁화노래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애국가>가 국가(國歌)를 대행함에 안창호가 이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귀국했을 때, 이념 분쟁이 심한 당시 혹시 발생할 분열을 우려하여, 도산 선생 뜻에 따라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않으려는 것이 김구 주석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이광수의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의 지금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作)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國歌)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否認)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안익태여야 했을까?
임진택 김구는 몰랐습니다. 이승만은 속았어요. 1955년에 한국전쟁 끝나고 이승만이 ‘사사오입’ 그런 거 해서 종신독재를 하려는 무렵이었어요. 내가 5살 때 기억이 나요.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노래 하던 거요. 그때가 이승만 대통령 80세 생일인데, 그때 10년 전 스페인으로 도망갔던 안익태가 이승만의 초청을 받아서 청와대, 그때는 경무대였죠, 그곳에서 연주를 한 겁니다. 그 안익태가 친일,친나치 행각을 했던 자료를 다 버리고 코리아판타지 악보, 그 표지에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한 도시를 적어요. 베를린, 빈, 부다페스트, 파리 등등 그러니 이승만이 자랑스럽다고, 애국자라고 바로 대한민국 제 1호 문화포장을 준 거야. 그때가 1955년인데, 2006년에 와서 그 악보에 적힌 연주 기록이, 연보가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 2006년이 무슨 해인지 알아? 안익태 탄신 100주년입니다. 연주 한 것은 사실인데, 연주 곡목은 코리아 판타지가 아니고 일본 축전곡, 만주환상곡이었던 거야. 2006년에 이 사람이 밝혀낸 거야. 이게 에키타이 안, 이경분이라는 학자가 2006년에 안익태 탄신 100주년에 안익태를 연구하는 지원이 있었거든. 문예진흥지원금을 받아서 독일을 갔어. (안익태 존경해서 간거여) 자료를 찾으러 갔는데 암만 찾아도 자료가 안 나와. 언뜻 생각하다가 에키타이를 쳤더니 나오더라는 거야. 음악을 전공한 이 연구자가, 안익태의 감춰진 것을 자꾸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나 민망했다더군.
왜 임진택이 해야 하나?
신채원 선생님, 그래서 여쭙고 싶은 거예요. 쉽지 않은 과정이잖아요. 왜 임진택이 해야 하나요?
임진택 『안익태 케이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안익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런 사악한 자의 곡조를 계속 불러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 대안을 생각한 겁니다. “아리랑애국가”의 발상이었죠. 아리랑이어야 했던 이유는, 우연히 KBS에서 <아리랑 로드>라는 특집다큐를 보다가, 해외에서 우리 동포들이 애국가보다도 아리랑을 더 많이 부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럼 차라리 애국가를 아리랑으로 부르면 되겠네, 이 생각을 했죠. 이전에도 이미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어요. 아리랑을 애국가로 합시다, 하는. 특히 교민들도 그런 의견이 많았죠. 통일운동 하는 사람들이요.
남과 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니까요. 그런데 고민의 지점이 좀 있었어요. 아리랑의 1절이 대표 가사인데,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이 가사는 애국가가 될 수 없어요. 그 다음 절인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등등 있지만 어떤 노래든 1절이 대표 가사 아닙니까. 그 가사를 가지고는 애국가를 쓸 수 없거든요. 첫째는 그것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아리랑은 그냥 그 자체로 이미 애국가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다시 국가가 지정하거나 합의에 의해 공식적 애국가로 승격하는 것을 굳이 할 필요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노래나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애국가라고 하지 않아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그 기능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애국가는 원래 보통명사였는데, 고유명사화 되어 있다, 국가화 되어 있다, 국가에 준하는 애국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애국가의 작곡자가 반애국자라면 그 애국가의 곡조가 국가에 준하는 독점적 지위를 가져선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한 번 들어볼까요?
(아리랑 애국가를 함께 들었다)
함께 부르는 노래, 아리랑
임진택 2절은 대한민국헌법으로 만들어 보았어요. 어떠신가요?
신채원 선생님 저는 지금 좀 눈물이 나서요,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조선학교 아이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펑펑 울었어요. 우리가 부르는 이 노래, 아리랑은 남과 북이 함께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임진택 우리가 이것을 국가로 지정하면, 오히려 북에서 부르기 불편할 수 있어요.
신채원 하지만 그걸 막을 수는 없어요. 이미 오랫동안 우리는 하나의 노래를 불러 왔잖아요.
임진택 내가 이걸 2절만 만들고 더 만들지 않는 이유는 3절은 북에서 만들었으면 했어요. 그럼 같이 부를 수 있잖아요. 1절은 도산 안창호가 지었으니까, 2절은 헌법으로 3절은 북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겠죠. 그러다 통일이 되면 서로 부르던 걸 가지고 다시 만들었으면 했어요.(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흐르는데, 역시 임진택 선생님은 선수 중의 선수다. 툭 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셨다. 나는 임진택 선생님의 이 감각적 해학과 공격적 재치, 그리고 젠틀한 자유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대의 정신이 되어
신채원 선생님, 선생님께 오랜 과업으로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학판소리’를 만드시겠다고 하신 말씀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늘 시대의 정신을 담은 작품을 해 오셨잖아요. 시절이 맞아서, 이제 동학도 수용자들에게 조금 가깝게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만.
임진택 이번에 나온 TV드라마 <녹두꽃>이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작품 중에서는 제일 좋았어요. 하지만 나는 그런 주인공 설정을 좋아하지 않아요. 혁명의 과정을 보면 우리가 가장 존중해야 할 사람이 있어. 그러나 삐딱하게 선 사람에 주목한단 말이야. 드라마는 자칫 동학의 정신과 주체에 대한 오해가 생기잖아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개성적인 인물일 수 있으나 내가 판소리를 만들면 그런 등장인물은 등장시킬 이유가 없어요. 우리 역사의 드라마에, 갑오년의 드라마에왜 그가 주인공이냐는 거야. 가장 올바른 사람을 말하고 싶어요. 직책이 낮아도 계급이 낮아도. 인물은 전형성이예요. 녹두를 유명하고 높은 사람만 다루나요? 녹두는 모두가 전봉준으로 봐야해요. 그가 농민을 대표해야지요.
신채원 민초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시대의 정신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임진택 광주 이야기를 해 볼까? 내가 <오월광주>를 1990년에 만들었어. 광주 5.18 35주년에 초청이 와서 한 대목 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윤상원이 결심을 하는 마지막 장면을 했지. 그런데 그 공연을 하는데 누가 화를 벌컥 내는 거야. 왜 광주에 윤상원밖에없나. 자기 아들도 죽었다, 이거지. 그 장면에서 이 이야기는 좀 다뤄도 좋겠어. 하나는 저 사람들이 광주항쟁에서 윤상원에 대한 고마움을 몰라. 자기 자식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하지. 윤상원 은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음을 택했어. 그가 죽음을 택했기 때문에 무고하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그 죽음이 개죽음이 되지 않은 거야. 윤상원과 마지막 도청을 지키며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거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숭
고해진거야. 그런데, 이 말을 어떻게 당사자에게 하냔 말이야. 판소리가 아니라면 모르겠어. 그러나 도청에 남았던 마지막을 사수한 사람들, 광주항쟁의 주체는 그들이야. “산 자여 따르라.” 그거야.
상원이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친구처럼 생각하면서 오월 광주를 함께 기릴 줄 알았는데, 그만 죽었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광주 정신일까요?
신채원 그렇게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해월, 수운까지 가는 거죠.
임진택 내 고향이 전북 김제입니다. 광주 판소리도 만들고 장보고도 만들고 다산도 만들었어.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을 아직도 못 만든 것이 그 곳이 고향이라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있어. 내가 1994년 동학100주년 때 동학 판소리를 만들다가 역량이 닿지 못했고 30년이 지났지. 그 작품을 짤 수 있는 역량이 지금은 되어 있지. 그것은 아마도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겠지. 그때 만들었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을 만들었겠지만 지금 만든다면 동학농민혁명사를 만들겠지. 수운과 해월까지가는. 훨씬 더 넓고 깊어지겠지. 그리고 손병희 선생님까지 가야겠지.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왔어. 3.1운동 당시엔 천도교가 세력이 컸지. 3.1혁명의 기획자가 의암 손병희 선생이잖아. 그분에 대한 평가절하, 몰이해를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거야. 지금 내가 애국가 바로 세우는 일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국부는 도산 안창호와 백범 김구다, 라고 말해. 이렇게 말하지만 그 안에 손병희라는 인물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
다 계획이 있었다
신채원 선생님, 선생님은 늘 반짝이는 빛이었고 앞선 사람으로 사셨잖아요. 앞으로 하실 일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저는 좀 걱정도 됩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얼굴 빛은 좋으신데요
임진택 낮에 한 잔 했거든. 지금 내 나이가 칠십이야. 칠십이 되면서 싸우지는 말아야지, 욕심내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 많이 해. 많이 내려놓고 있지만, 그러나 내가 해야 잘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지면 해야지. 오늘 이렇게 오랜 이야기를 했는데 취재 아니어도 자주 보자고.
다 계획이 있었다. 선생은 글쓴이에게도 계획이었다. 큰 이름 앞에서 오래 기다렸다. 문을 두드리려고 크게 숨을 들이킨 시간, 어쩌면 선생은 계단을 올라 문을 향해 걸어 온 발걸음을 듣고 계셨을 것 같았다.
임진택_________
1950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문화운동가, 판소리 명창으로 반세기를 살았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예술가, 그러나 그의 선택은 늘 민중을 향했고 시대의 정신으로 그가 펼치는 판에 고스란히 담겼다. 창작 판소리 <똥바다>, <오적·소리내력>, <오월 광주>, <백범 김구>, <다산 정약용>, <남한산성>, <세계인 장보고>, <윤상원가>등의 창작판소리를 만들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전태일>, <안중근>, <도산 안창호> 그리고 <판소리 동학농민혁명사> 등이다. 1세대 문화운동가로서 언제나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하여 새 길을 만들며 걸어왔다.
우리 역사의 드라마에, 갑오년의 드라마에 왜 그가 주인공이냐는 거야.
가장 올바른 사람을 말하고 싶어요. 직책이 낮아도 계급이 낮아도.
인물은 전형성이예요. 녹두를 유명하고 높은 사람만 다루나요?
녹두는 모두가 전봉준으로 봐야해요.
그가 농민을 대표해야지요.
1945년 10월 발행된 김구 제(題)
<한국애국가> 표지
김구 제(題) ‘韓國愛國歌的故事’는 도산 안창호에 대한 묵시(默示)적 헌사(獻詞)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중국에서 발간된 악보집 ‘한국애국가’에는 현행 애국가의 가사와 악보가 실려 있고, 김구 주석(主席)의 인물사진 밑에 ‘韓國愛國歌的故事=한국애국가의 유래’라는 주석(註釋)이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