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9일부터, 서울에서 관동대지진 93주기 추모행사 열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한국인 피해자를 추도하는 행사가 93년 만에 열렸다. 8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서울시청과 광화문광장에서 오충공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회를 시작으로 ‘관동대지진 학살 한인 추도식’이 열렸다. 1923추도모임은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과 한·일 정부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지난 2월 발족한 시민단체다. 행사는 이날 오후 6시 서울시청 바스락홀에서 열린 예비행사로 시작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과 일본 시민단체‘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관동대진재조선인학살의 사실을 알고 추도하는 사나가와실행위원회’, ‘치바현에서 있었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희생자추도 조사위원회’ 등이 학살 사건 조사 등의 활동 내용을 발표했다. 20일에는 서울시청과 광화문광장에서 학살 피해자 유족들의 기자회견과 추도식이 열렸다.
서울시민청, 8월 19일~20일 영화 상영회와 사진전
8월 19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시민청 바스락홀과 이벤트홀에서 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일본에서 시민단체 회원이 참석했고, 유족 조영균, 조광환, 권재익 씨가 참석했다. 지난 4월 타계한 고(故) 김의경 극단 현대극장 이사장의 아들 김진우씨와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심우성 선생과 고(故) 김의경 선생은 치바현에 위치한 관음사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보화종루를 건립하고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 규명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몇 달 전에 타계한 김의경 선생의 아들 김진우 씨는 선친께서 말씀하셨던 관동대진재와 보화종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선친이 함께 자리 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말을 전했다.
재일교포 오충공 감독의 관동대지진 학살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감춰진 손톱자국>, <불하된 조선인>에 이어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93년간의 침묵, 1923 제노사이드> 예고편을 상영했다.(지난 호 따뜻한 인터뷰 참조)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은 이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고, 각 단체의 주요 활동을 브리핑하였다. 시민단체 회원들은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을 결성해서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지고 운동을 확산시켜 일본 정부에 진지한자세로 사과하고 마주하고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 이틀간 추모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유족분들께 추도의 마음을 전하고자합니다.”라고 말했다.
영화 상영회와 함께 1983년부터 현재까지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자료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을 전시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행사에 참가한 관람객들과 유족들은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광화문,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추도제
영화 상영회와 사진전을 마치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방문한 시민단체 회원들과 유족, 참가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나눠들고 광화문까지 걸었다.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경복궁을 바라본다. 정부종합청사에 걸린 태극기가 유난히 슬펐다. 행사장을 둘러싼 넋전들이 펄럭였다. 6,661명의 넋들을 기리는 의미로 종이 넋전은 6,661개다.오후 4시, 행사가 시작되었다. 1부에서는 기독교, 불교, 천도교 3개 종단의 추모기도 및 연설의 형식으로 추도식을 진행했다. 헌화 및 헌향, 추도시와 추도곡을 헌정했고 행사를 주관한 추모모임, 일본 시민단체, 유족 등은 각각 성명서를
낭독했다. 2부 행사는 상여모심과, 넋전춤 등으로 이어졌다. 상엿소리가 울려 퍼지자 ‘관동 대학살 희생동포 위령’ 만장을 앞세운 상여가 광화문 북측 광장을 돌아 봉선화 꽃을 심어 만든 무덤 앞에 섰고 외지에서 겪는 설움을 담은 노래 ‘봉선화’를 불렀다. 뒤이어 넋전춤의 대가 심우성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과 양혜경씨가 넋전춤을 췄다. 넋전춤은 넋전을 작은 깃대에 달고 아리랑 등의 음악에 맞춰 추는 춤으로, 사람들의 애환을 기리는 우리 춤이다.
행사장 주변에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찾았고 93년 만에 부르는 이름 없는 수많은 넋들을 기리는 추모행사는 처절한 역사를 밝히고 기억하자는 의미를 되새기며 막을 내렸다.
93년 만에 고국에서 넋을 기리다
관동대진재 이후 93년을 맞이했다. 기록에 남은 희생자는 6,661명으로 알려져있으나,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6,661명이라는 기록된 사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6,661명이 남긴 유족들과 그 아픔일 것이다. 93년이 흘렀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증언을 해줄 목격자도, 피해자도 상당수 세상을 떠났다.
1924년 1주기를 추모하는 추도식은 천도교당에서 열렸다.(“진재참사동포, 기념추도, 금일 하오 3시, 천도교당에서” 1924년 9월 13일자 시대일보 기사) 서울청년회와 신흥청년회의 청년들이 나라를 빼앗긴 처절한 절망의 그 시기에 오늘을 잊지 말고 기억하
자고 다짐했을 것이다(관련기사 본지 31쪽 하단 상자기사 참조)
증거가,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역사의 기록을 쓴다. 그것이 우리가 진실을 알아야하는 책임일 것이다.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93주기 추모행사에서 넋전춤을 추신 심우성 선생을 찾았다. 선생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돌아들 가세요.” 1934년생, 올해로 83세의 걷기도 수월치 않은 어르신이 광화문광장에 나섰다. 춤을 추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행사에 함께한 사람들도 울었다. 선생은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일에 오랜 세월을 바쳤다. 치바현 관음사에 보화종루를 건립하고 위령의 종을 기증하였으며 누구보다도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희생자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분이었다. “선생님 말고는 이 이야기를 해 주실 분들이 거의 다 돌아가셨어요. 이야기를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가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드릴 수가 있어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며 또 쫓겨날까봐 가슴을 졸이며, 어떤 이야기든 듣기로 작정을 하였다. “보화종루는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세우게 되셨나요? 왜 종을 세우실 생각을 하셨나요?기금은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넋전춤은 무슨 의미인가요?”
막무가내로 혼자서 그냥 질문을 시작했다. 질문을 늘어놓느라 숨이 가빴다. 선생은 사진을 보여주며 “나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에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게 내가 일본에 가서 세운 보화종루, 위령의 종이에요. 이게 그동안 모은 자료들이고요. 아버지 친구 분이셨던 동경 푸크 인형극장의 가와지리 다이치라는 분께서 일본인들이, 그못된 놈들이 조선 사람 수천 명, 수만 명 죽였다고 일러주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곳곳을 돌면서 일본 전국을 조사했죠.”
“그게 몇 살 때인가요? 그때도 증언해 줄 사람이 많지 않았을 텐데요.”
“내가 보화종루 세울 때 나이가 오십인데,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좀 더 된 일이죠. 나는 역사에 대해 밝힐 것은 밝혀 놓는 것이 산 사람이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넋전춤도 추는거고. 보화종루 건립할 때 많은 돈을 제일 많이 마련해 온 사람이 김의경 씨(前 극단 현대극장 이사장, 2016년 5월 타계)예요. 돈이 많지 않았어요. 이게 그때 만든 서류예요. 여기 113명 이름이 있죠? 돈 낸 사람 명단이야.”
“정말 많은 분들이 기금을 보내 주셨네요. 보화종로 세운다고 했을 때 기금을 선뜻 주시던가요? 이분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다 죽었지. 나처럼 산 사람도 몇 있을 거고. 내가 내 아버지한테 받은 산을 팔았지. 가까운 선배들은 저 놈 미쳤지 하면서도 돈을 주더라고. 정신없이 앞장서 준 친구도 김의경 선생이었고요.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의경이고, 이게 보화종루 세운 거고, 주지스님 여기 있네. 이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내가 처음 쓴 글입니다.
– 이 글들을 어디에 보내셨어요? 일본어로도 다 번역을 하셨네요.
돈 준 사람들한테 다 보냈죠. 종을 세운 다음에. 그 후에 넋전춤도 췄지요. 이 넋전들. 수
없는 작은 인형들 보세요. 양손으로 들고 있죠. 그때 희생되신 분들을 상징하는 거야. 내가 종을 세운 이유는 이 아픔을 전 세계에 울려 퍼지게 하고 싶어서였어요.
– 일본에서 추모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일본 사람한테. 일본 여자 분들이 몇 분 왔더라고요. 그냥 고맙지. 자기네가 잘못한 게 아니고 아버지, 할아버지가 저지른 일인데 그걸 세월이 다 가서 자기들 주머니 털어서 참여하고 애달파하는 것. 허허, 일본에도 사람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9월 1일 추모행사에 나보고 오라더라고요. 나는 안간다고 했어요. 슬픈 일은 슬
프게 끝내면서 다시는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야지.
– 일본에서 역사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묻는 모임이 많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런 거 몰라요 나는. 아픈 과거잖아요. 딱하게도 일본 사람
들이 조선 사람을 못살게 군 비극이지만 그건 지나간 역사예요. 앞으로는 일본이고 한국이고 우리 동서양 모두가 이렇게 평화롭지 못한 일은 없어야 해요. 여기서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 따지는 것은 없어야 해요. 흘러간 일이에요.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해야죠. 나는 춤을 추면서 느꼈어요. 왜들 보는지, 춤을 보면서 슬픈지 안 슬픈지 모르겠어서 답답해서 울었어요. 젊은이들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참 다행이에요. 모르기라도 해야죠. 넋전이라는 건 흔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슬픔을 이기려고 했던 거예요.
– 넋전춤은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춤이라고 하셨는데요. 춤추시면서 기도 같은 것도 하시나요?
마음에 인형을, 그 모습을 종이로 오린 것이 넋지, 넋전이에요.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내 안에 품고 마음으로 만든 종이 인형이 열 개, 천 개, 만 개가 모두모두 내 마음과 합하여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 다른 생각은 안 나요. 그러다 보면 묘하게도 마무리할 때 눈물로 끝이나요. 그게 사람인가 봐요. 허허, 근데 너는 왜 우냐?
더는 말 할 수 없었다.
■심우성 선생 약력
1934년 충남 공주 출생,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 문화재청 감정위원.전(前) 중국 연변대학교 민족학연구원 객좌교수,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객원교수, 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고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지도위원, 아시아1인극협회 창립, 대표, 국립영화제작소 대한뉴스 아나운서, 민속극회 남사당 설립, 대표, 서울방송국 아나운서『무형문화재총람』 , 『남사당패연구』 – 동화출판공사, 『한국의 민속극』, 『마당극연희본』 , 『민속문화와 민중의식』 , 『우리나라 탈』, 『민속문화발자취』 등의 저서와 1인극 작품 <쌍두아> <문> <남도 들노래> <새야 새야> <판문점 별신굿> <결혼굿> <거창 별신굿>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4.3의 고개를 넘어간다> <녹두장군 오셨네> <넋전 아리랑> 등이 있다.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희생자의 유가족으로 왼쪽부터 조영균, 조광환, 권재익 씨.
유족들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 준비모임을 결성하기로 하고, 앞으로 더 많은 희생자의 유족을 찾아 함께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기로 하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민심이 술렁이는 틈을 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도둑질을 하고 부녀자를 강간했다’는 유언비어를 확산시켰다. 경찰과 군대, 소방관,민간인으로 구성된 자경단이 조직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조선인 6,661명을 살해했다. 대학살이었다. 학살 이후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도, 유족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폐허가 된 낯선 타국에서 학살당한 사람들. 93년이 흐른 지금도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본 적 없지만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 한 가지는 바로 ‘왜’라는 물음 앞에서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취재·글 신채원 ● 사진 정찬웅 ● 영상감독 김선구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