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재 신채호 순국 80주년 추모 공연 ‘선택’
그해의 첫눈도 함박눈으로 내리던가요. 당신이 걷던 거리마다 피맺힌 발자국이아직 붉습니다. 넋이라도 있다면 한 말씀만 듣고 가세요.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지킨 오직 단 하나의 꿈이 광장에 깃발로 서 있으니 앞서서 나간 목숨들이여,산 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소서.
지난 11월 17일부터 19일까지 충북학생교육문화원 대공연장에서 단재 신채호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선택’이 무대에 올라갔다. 연극 ‘선택’은 단재의 순국80주년을 추모하며 만들어졌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국 근대사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언론인, 사상사, 역사 학자, 문학인,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민족혼을 일깨웠던 선각자였다.
<황성신문>에 논설을 싣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명을 떨치기 시작하여 이후 <대한매일신보> 시절을 거쳐 1910년 해외로 망명을 떠나기 전까지 수많은 명문장을 발표하며 짧았지만 매우 강렬했던 언론 활동 및 국권회복 운동을 펼쳤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이때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과 대립하다가 임정과 결별하고 다시 북경으로 온 신채호는 대한독립의 기치를 만방에 알리는 『천고』를 발행하는 한편 의열단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연극 ‘선택’은 이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대는 1919년부터 1936년까지 단재가 걸었던 발자취를 좇아가며 펼쳐진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활동이나 업적에 방점을 찍지 않고, 당시의 상황에서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다 입체적으로 단재를 그려내고 있다.
단재와 함께 했던 이회영, 김창숙, 김원봉, 류자명 등 수많은 동지들과의 모습에서는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한 독립지사로서의 모습이, 평생 동지이자 부부로 살았던 박자혜와의 관계에서는 인간적인 고뇌가, 이씨, 김씨, 박씨 등 조선 민중들의 눈에 비친 단재의 모습을 통해서는 그 시대에 그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원작자 김하돈 시인과 연출을 맡은 배우 유순웅을 만났다
원작자 김하돈 시인은 단재를 빼 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작가이다. 김 시인은 1996년부터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위원으로서 단재가 걸었던 역사의 길을 청소년들과 함께 걷기 시작하여 올해로 꼭 10년이 되었다. 김 시인은 단재의 삶을 두고 한마디고 ‘불꽃 같은 일생’이었다고 말한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뒤로 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하는 순간부터 단재의 생애는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인양 오로지 과녁만을 향해 날아갔다고 말하는 김 시인은 올 봄, 단재의 순국 80주년을 맞이하여 추모 공연을 무대극으로 올려보고자 대본을 쓰기 시작 했다. 올해가 80주기이기도 했고, 단재문화예술제전 행사 20주년을 맞이해서 국가보훈처, 충청북도, 교육청, 청주시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연출자의 도움이 컸다. 천만배우 유순웅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말하는 김 시인은 본 공연은 연출자와 스텝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 시대에 왜 단재인가
우리가 국민들에게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단재 신채호가 압도적입니다. 물론 교과서에 나오는 김구, 유관순, 안창호도 있지만요. 단재는 마니아들이 많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단재가 보여준 지조였어요.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어떤 것에도 타협하지 않았어요. 이번 작품에서도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무장투쟁, 직접투쟁을 표방한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단재
단재가 체포될 때 49세였는데 함께 행동했던 사람들이24~25세였어요. 처음에 지조라든지 강직함 비타협에다가 끝까지 지식인으로서 좌절하지 않고 실천까지 나아갔다는
것. 그런 인물은 단재가 유일해요. 단재는 민족사관, 근대사학에 기초를 남긴 역사학자였고, 대단한 언론인이었고, 문학인이었어요. 이번 작품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결별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임시정부가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단재는 절망했어요. 아직 단재의 죽음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어요. 인간 단재는 굉장히 비극이었어요. 항상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들을 버려야 했으니까요.
만약에 단재의 방식대로 임시정부가 갔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 수많은 질곡들 속에서 단재가 가졌던 생각, 단재의 이론은 3·1운동의 2천만 민중들과 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들과 국내, 국외에서 싸우는 것만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가 시켜주는 독립은 또 다른 식민지라고 생각했어요. 정부는 2천만 민중을 통솔할 수 있는 기능이 없었죠. 사실 무정부주의라고 하는 말은 일본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인데 적당치 않아요. 단재의 생각은 무강권, 무패권, 무지배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떠한 실체가 그것이 무엇일지언정 강권으로 지배하지 않는 것을 말해요. 국민이 우선이라는 말이에요. 반대로 되니까 국가가 강권주의가 된다는 말이에요.
무강권주의, 무페권주의, 무지배주의의 이론이 가장 가까운 말이 아닌가 싶어요.
임시정부가 단재의 방식대로 갔으면 어땠을까
작가의 환상이겠지만 그 환상이 관객에게 전달된다면 조선혁명선언은 가장 명문장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조선혁명선언의 태재가 절반이라도 구현되어서 뭔가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이런 것들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이 구현된 세상을 그려보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죠.
단재가 꿈꿨던 세상
주체죠. 아(我)와 비아(非我). 내가 주인이면 주체적인 국가인 거고 내가 비아면 똑같은 나라라도 내 나라가 아니거든요. 요즘 말하는 생명 생태 담론과 같은 겁니다. 시대가 100년 차이가 나니까요. 농부가 내가 먹을 쌀로 만들면 주인인 농부인 거죠. 일찍이 그 담론을 보신 것이고 그것을 주체성과 정체성으로 볼 수 있어요. 공동체라는 것이 주인으로 살게 되면 내 나라가 되는 것 아닐까요. 어느 시대고 아와 비아는 끊임없이 싸웁니다. 아와 비아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면 오늘날의 생태라는 것 자체가 마을이든 사회든 국가든 작가들이 있는 공동체를 이해하는 범위, 척도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죠.
천만 배우 유순웅이 연출가로 지역에 돌아오다
1인극 ‘염쟁이 유씨’의 유씨로 대학로에서 오픈런 소극장 공연의 성공 사례로 남은 배우 유순웅이 연출가로 다시 지역에 돌아오게 된 계기는 마음의 빚이었다.
최근에는 영화 ‘명량’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대중들과 만나느라 분주한 그였다.
연출자로서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실은 이번 작품은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는데 운명처럼 만났다고 할수 있어요. 단재는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거든요. 과거에 지역에서 오랜 세월 단재를 주제로 공연도 했었고 연출도 한 바도 있고요. 덕분에 지난 몇 달을 새롭고 신선하게, 즐겁게 작업했어요.
단재 이야기는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접했던 소재로 알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연출자로서 새로운 시선이 있었나?
작가가 써 놓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 연출의 몫이죠. 작가가 시인이다 보니 연극적 상상력에 한계가 있어서 그 부분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했고, 혁명가로서의 단재에 주목하고 싶었어요. 이번 작품은 장르의 형식이 소극장 무대라는 장르보다도 집체극이라고 할 수 있는 대극장 연극인데 역사극이라고 하면 지루하고 따분할 수 있는 지점이 있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죠. 물론 지역에서의 공연이다 보니 한계가 있어요. 서울에서 하는 뮤지컬과는 자본의 싸움에서 비교하기 어렵죠. 그러나 작품으로서는 부끄럽지 않아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단재 선생께서 말씀하셨죠. 다시 촛불 정국에서,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공연이 남긴 화두가 있을 것 같아요.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과연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도 독립이 되었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형식적으로는 권력을 되찾아왔지만 그 권력을 친일세력이 잡았고, 독재를 누렸고, 지금은 또 어떤 시절입니까. 독립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법적으로 독립국가라면 그게 독립인가요?
나에게 지금 이 시절은요, 나라가 혼란스러워도 배우를 안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냥 사는 거지. 다만 우리 사회가 조금 더 희망적으로 나아가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으로 어디에 있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이겠죠. 단재는 아주 작은 것에도 타협하지 않았어요. 예술가는 예술로 타협하지 않는 삶이 있겠죠.
단재가 꿈꿨던 독립을 우리는 언제쯤 이룰 수 있을까
1962년 대한민국은 신채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의 대한민국 국적이 회복된 것은 지난 2009년이었다. 신채호의 저술은 2008년 『단재 신채호 전집』 전 9권이 남한에서 출판되었으며, 현재 북한에는 모두 4,979쪽에 달하는 저술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5백 쪽짜리 전집 10권을 추가로 발행할 수 있는 분량이다.
끝으로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차디찬 감방에서 홀로 순국한 신채호의 모습을 그린 극중 신채호의 마지막 대사를 옮기며 글을 마친다. 지금 이 시절 민중의 조직된 힘을 와 닿는 말이 아닌가 싶다.
향년 57세, 조국을 떠나 이국땅을 전전한 지 26년 만이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무엇을 아라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조국과 민중의 편에 서는 자는 아이고 조국과 민중을 배반하는 자는비아이다. (중략)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의 불평과 부자연, 불합리한 장애물을 먼저 타파하는 것이 곧 민중을 각오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하여 저마다 혁명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작가 김하돈(왼쪽 사진)과 연출가 유순웅34
취재·글 : 신채원 |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취재수첩①
사진제공: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33